[WIKI 프리즘] 직접증거 없는 유아 바꿔치기 母女 유죄 비밀은 2009년 대법 판례
[WIKI 프리즘] 직접증거 없는 유아 바꿔치기 母女 유죄 비밀은 2009년 대법 판례
  • 윤여진 기자
  • 승인 2021.08.20 10:29
  • 수정 2021.08.20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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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격자 부재·혈흔 오염 2012년 대전 판암주공 살인 사건과 판박이

생후 4개월에 기아로 사망한 아이의 친모로 알려진 사람이 유전자 검사 결과 언니이고 외할머니로 불린 사람이 친모라는 '구미 유아 바꿔치기 사건'은 검경 수사 결과에 이어 17일 법원 1심 선고에서도 진실로 드러났다. 숨진 유아를 실제 낳은 이는 생전 엄마로 알려진 A가 아닌 그의 친모 B(아래 사진)라는 직접증거는 존재하지만, A가 실제 낳은 아이는 따로 있고 비슷한 시기 B가 출산한 아이와 바꿔치기(미성년자 약취) 됐다는 직접증거는 모두 부재하는데 죄가 인정됐다. 때문에 이 사건에선 직접증거가 없는 형사재판에서 친자 관계 확률을 소수점 아래까지 밝혀내는 과학적 증명 범위와 증거판단 전권을 가진 사실심 법관의 권한이 충돌한다. 공소사실이 진실하다는 법관의 심증을 형성하는 증거가 없다면 유죄의 의심이 있어도 '피고인의 이익으로'라는 재판하라는 무죄추정은 어디까지인지 이 사건은 묻는다. 

'구미 유아 바꿔치기 사건'으로 기소된 B. [출처=연합뉴스]
'구미 유아 바꿔치기 사건'으로 기소된 B. [출처=연합뉴스]

◇ '피고인의 이익으로' 그리고 '국민 법 감정'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의 이익으로'라고 하는 원칙은 형사재판에서 양보할 수 없는 기본원칙이지만 사실관계를 일일이 증명하는 것이 곤란한 사안에서 결단력을 갖추지 못하여 만연히 의심으로 도피하게 된다면 그러한 원칙의 남용에 해당할 여지가 있고..."

구미 유아 바꿔치기 사건 법원 1심 재판부인 대구지법 김천지원 형사2단독 서청운 부장판사는 17일 B씨에게 징역 8년을 선고하며 판결문에 "국민적 공분" "국민들에게 크나큰 충격과 분노" 같은 이례적인 어휘를 남겼다. 국내 형사재판에서 '국민 법 감정'은 더는 소환할 수 없는 개념으로 대법원 판결 기준 2005년 이후로 판결문에 등장하지 않는다. 서 부장판사가 국민 여론에 반하는 판결을 할 수 없음을 드러낸 대목이다. B가 유죄라는 국민 여론을 강하게 조성한 것 하나엔 ABO식 혈액형이 있다. 서 부장판사가 증거로 채택한 것 중엔 A의 혈액형은 BB형이고 B의 혈액형은 BO형인데 숨진 채 발견된 유아의 혈액형은 AO형인 까닭에 A는 친모가 될 수 없다는 대검찰청 디엔에이·화학분석과 검사 결과가 있다. B 변호인이 키메리즘(Chimerism·한 사람의 몸 안에 둘 또는 그 이상의 유전적으로 구분되는 세포를 가지는 현상) 가능성을 주장하자 서 부장판사는 "과학적 증거방법이 당해 범죄에 관한 적극적 사실과 이에 반하는 소극적 사실 모두에 존재하는 경우"라는 2009년 대법원 판례를 인용했다. 당시 대법원은 "여러 가지 변수로 인하여 반증의 여지가 있는 소극적 사실에 관한 증거로써 과학적 증거방법에 의하여 증명되는 적극적 사실을 쉽사리 뒤집어서는 안 될 것"이라는 했었다. 키메리즘 또한 과학적 증거방법이기는 하지만 혈액형 검사 결과와 이를 뒷받침하는 피고인에게서 채취한 손톱·모발·구강 상피세포 유전자 검사 결과와 비교해볼 때 "단순히 관념적인 의심이나 추상적인 가능성에 기초한 의심"에 그친다는 얘기다. '피고인의 이익으로' 판단하려면 합리적인 의심이 필요하다.  

◇ 목격자 없는 살인 사건
2009년 대법원 판례를 적용한 대표적 사건은 2012년 대전 판암주공아파트 살인 사건이다. 이 사건은 이번 구미 유아 바꿔치기 사건처럼 직접증거가 없다. 피고인 C는 585g 무게의 라쳇절단기(쇠파이프를 자르는데 사용하는 공구)로 피해자 D를 가격해 머리 손상으로 살해한 혐의로 기소됐다. C는 D와 같은 아파트 다른 동에 거주했는데 살해 장소와 살해 도구는 피해자 주거지와 피해자 물건이었다. 살해 장소에는 제3의 인물 E가 있었는데 그 역시 절단기로 가격당한 채로 발견됐고 경찰 수사를 받고 얼마 못 돼 간 괴사로 사망했다. 아파트 현관문에 설치된 CC(폐쇄회로)TV 녹화 결과와 CCTV 등장인물 진술을 종합하면 사건 당일 C, D, E 모두 피해자 집에서 다른 아파트 거주민들과 함께 화투를 쳤다가 끝까지 남은 사람들이었다. 추정 사망 시각 전에 다른 이들은 이미 사건 현장에서 빠져나갔고 새로이 침입한 사람은 없었기에 용의자는 C 아니면 E였다. 그런데 E 옷가지에선 D의 충격비산혈흔(둔기 등 외력에 의해 흩어지는 혈흔)이 발견되지 않았고 그 역시 중상에 입을 정도로 절단기에 가격당한 상태였기 때문에 D를 같은 방법으로 가격했다고 보기 어려웠다. D와 E가 절단기를 두고 쟁탈전을 벌였다면 다량의 출혈이 발생한 D의 혈흔이 발견되어야만 했다. 문제는 E가 누구로부터 가격을 당했는지 입원 중에 진행된 경찰 조사 때 기억하지 못했고 재판 전에 사망했다는 점이다. C는 범행현장에서 절단기를 만지고 많은 양의 혈흔족적을 남겼으며 자신의 옷에 D 혈흔이 묻은 것엔 "(화투판에서 중간에 빠져 자신의 집으로 이동한 뒤) 잠을 자다가 (화투판)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하여 그다음 날 D의 집에 다시 가게 되었는데, D와 E가 피를 흘리면서 쓰러져 있었다. D와 E 상태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점퍼, 바지, 모자에 피를 묻히게 됐고, 겁이 나 집에 가 옷을 갈아입은 후 다시 D 집에 돌아가 경찰에 신고했다"고 해명했다. 세탁한 피고인 옷에서 발견된 D 혈흔이 충격비산혈흔으로 판명되지 않은 것은 "과학적 증거방법이 당해 범죄에 관한 적극적 사실과 이에 반하는 소극적 사실 모두에 존재하는 경우"로 피고인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하지만 1심 재판부는 "피고인이 구호조치를 하지 않은 채 범행현장에서 피가 묻은 라쳇절단기를 만지고 많은 양의 혈흔족적들을 남길 정도로 피해자의 집 안을 돌아다닌 행동들은, 범인으로 누명을 쓸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가진 사람의 행동이라고 보기 어렵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당시 재판부는 C가 D를 살해했다는 직접증거가 없는 것에는 어떻게 설명했을까. 1심 재판부인 대전지법 형사12부(당시 재판장 안병욱 부장판사)는 소거법을 썼다. 범행시각 범햄형장에 C, D, E 외에 누가 있었는지 먼저 밝힌 다음, 이들이 D를 살해했을 가능성이 있는지를 모두 검증하고, 마지막으로 C와 E가 범행에 이르렀을 가능성을 살피는 식이다. 현장 감식 및 유전자 검사 결과 진범일 수 없는 E와 달리 그렇지 못한 C는 이동동선을 CCTV 기록과 달리 진술했다. 범행시각 범행현장에 있지 않았다는 주장과 달리 CCTV에는 범행시각 C가 D 집에서 나오는 장면이 발견되지 않은 것이다. 재판부는 "이 사건에서 피고인이 피해자를 살해하였다는 점에 관하여 목격자의 진술 등 공소사실에 부합하는 직접증거는 없다"면서도 "제3자의 범행으로 사망하였을 가능성이 합리적인 의심 없이 배제되고 적법한 증거들에 의하여 인정되는 간접사실들에 논리법칙과 경험칙을 적용한 결과 피해자의 사망이 피고인의 행위로 인한 것이라고 밖에에는 도저히 볼 수 없을 정도로 공소사실이 합리적 의심 없이 추단되는 경우"라고 판시했다. 피고인이 범인이 아니라면 상황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게 재판부가 유죄 심증을 형성한 이유다. 구미 유아 바꿔치기 사건에서도 담당 재판부는 "피고인 이외의 제3자에 의하여 여아 바꿔치기가 이루어졌을 가능성을 합리적 의심의 여지 없이 배제할 수 있다"며 피고인의 과거와 현재 가족 등을 상대로 같은 소거법을 썼다.  

◇ "빠짐없는 증명을 요구하지 말라"
실체적 진실이라는 퍼즐을 맞추는 건 사실관계를 형법에 맞춰 공소사실로 재구성하는 검사와 공소사실이 증거로 충분히 뒷받침됐는지 판단해 유·무죄를 가르는 판사 몫이다. 구미 유아 바꿔치기 사건에서 판사는 "객관적·직접적 증거가 전혀 없는 사건에서, 피고인만 알고 있거나 피고인이 감추고 알려주지 않는 범행 전후의 연결고리까지 빠짐없이 증명할 것을 요구한다면 실체적 진실의 발견을 통한 형벌권의 정당한 행사를 도외시하는 부당한 결과가 초래될 것"이라고 했다. 이같은 경고는 증거재판주의와 무죄추정주의를 대원칙으로 삼는 국내 형사사법을 흔드는 예단으로 비춰질 수 있다. 판암주공 살인 사건과 유아 바꿔치기 사건, 두 재판부에 유죄 심증 근거를 제공한 건 2009년 대법원 판례다. 김명수 대법원장 취임 이후 적법절차 원칙을 보다 중시하는 진보 성향 대법관이 수적 우위를 점하면서 대법원은 위법수집증거를 더욱 원칙적으로 배제하는 등 증거법 적용을 엄격히 하는 추세다. 유아 바꿔치기 사건이 항소심을 넘어 상고심까지 간다면 적어도 소수의견에선 '직접증거가 없다면' 법리가 더 촘촘하게 전개될 가능성이 높다. 

[위키리크스한국=윤여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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