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인사이드] TV드라마 '탄핵' 계기로 돌아보는... 빌 클린턴 대통령의 섹스 스캔들과 탄핵 논란
[WIKI 인사이드] TV드라마 '탄핵' 계기로 돌아보는... 빌 클린턴 대통령의 섹스 스캔들과 탄핵 논란
  • 최석진 기자
  • 기사승인 2021-09-11 14:50:50
  • 최종수정 2021.09.12 06: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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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린턴의 탄핵 가결을 알리는 '워싱턴포스트' [트위터 캡처]
클린턴의 탄핵 가결을 알리는 '워싱턴포스트' [트위터 캡처]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75)의 성 추문, 이른바 ‘지퍼 게이트’가 10부작 TV 드라마 시리즈로 만들어져 미국 케이블 FX에서 최근 방송을 시작,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탄핵'으로 이름 붙여진 이 TV시리즈는 클린턴의 상대였던 전 백악관 인턴 모니카 르윈스키(48)가 공동제작자로 참여해 더욱 큰 주목을 받고 있다.

미국 역사상 탄핵이 가결된 대통령은 앤드류 존슨, 빌 클린턴, 도널드 트럼프, 이렇게 3명뿐이다. 그중에서도 빌 클린턴의 탄핵 과정은 한 편의 드라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클린턴은 대통령에 취임하기 전부터 논란에 휩싸여있었다. 그는 1992년 대통령 선거 유세 동안 병역 기피와 외도(外道) 문제 때문에 공격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승리를 거두었고, 재선에도 성공했다. 유권자들이 그의 스캔들보다는 매력을 더 쳐준 것이다.

그러나 1998년 모든 것이 바뀌어버렸다. 그 해에 클린턴 대통령이 22세의 모니카 르윈스키라는 백악관 인턴과 성관계를 갖은 사실이 폭로된 것이다.

그 뒤 몇 개월 동안 두 사람의 성관계와 관련된 충격적인 내용들이 타블로이드 언론들과 방송국 뉴스룸, 그리고 의회 청문회를 도배했다. 미국인들은 이 사건에서 눈을 떼지 못했고, 클린턴은 대통령직을 사임할지도 모른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위기에 몰렸다.

이후 일어난 일들은 미국을 영원히 뒤흔들고, 한 젊은 여성의 삶을 완전히 뒤바꾸어놓았다. 다음은 빌 클린턴 대통령의 탄핵과 그에 이르도록 한 불명예스러운 스캔들 이야기다.

빌 클린턴은 누구인가?

정치인 빌 클린턴은 미국의 제42대 대통령을 역임했다. 1946년 8월 19일 아칸소주 호프에서 태어난 클린턴은 예일대학 로스쿨을 졸업한 후 아칸소주 주지사가 되었다.

클린턴은 1992년 승리 가능성이 별로 점쳐지지 않는 상태에서 대통령직에 도전했다. 그는 민주당 소속이었으며, 당시 백악관은 1981년부터 공화당이 장악해오고 있었다. 여기에다 제1차 걸프전 이후 현직 대통령이던 조지 H.W. 부시 대통령이 인기가 치솟던 때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빌 클린턴은 미국민들이 당시까지 보아오던 여느 대통령 후보와 달랐다. 그는 유권자들에게 따듯하고 매력적인 이미지로 다가가기 위해 노력했다. 그가 1992년 6월 ‘아세니오 홀 쇼(The Arsenio Hall Show)’에 등장해 색소폰을 연주한 사건은 너무나 유명하다.

그러나 미국 대중들은 빌 클린턴에게도 어두운 면이 도사리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는 대통령 유세 기간 내내, 베트남전 참가를 기피했고, 제니퍼 플라워스라는 아칸소주 여성 공무원과 혼외정사를 벌였다는 비난에 시달려야 했다.

클린턴은 부시를 누르고 승리를 거머쥐었지만 그에게는 더 많은 스캔들이 백악관까지 따라다녔다. 그가 대통령 임기를 시작하고 얼마 있지 않아서 한 특별검사가 그가 관여했던 토지거래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이 거래는 ‘화이트워터(WhiteWater)’ 사건으로 알려져 있다.

린다 트립 [AP연합뉴스]
린다 트립 [AP연합뉴스]

‘화이트워터’ 스캔들은 무엇인가?

클린턴이 첫 임기를 시작한 직후 법무부장관 자넷 레노는 빌 클린턴과 그의 아내 힐러리 클린턴이 과거 아칸소에서 저지른 위법행위를 조사하기 위한 특별검사를 임명했다.

1978년 클린턴 부부는 휴가 용 전원주택지로 판매할 목적으로 불량 토지에 투자했다. 불량 토지에 투자한 행위 자체는 범죄는 아니지만 그들은 그 과정에서 부동산 사업가 짐 맥도걸과 밀접한 관련을 맺게 되는데, 바로 이 부분이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나중에 맥도걸이 소액 저축 및 대출 협회와 소규모 투자회사를 사취한 것으로 밝혀진 이후, 그러니까 ‘화이트워터’ 사건이 불거진 이후 일부 사람들은 클린턴 부부가 어두운 부동산 거래에 연루됐을 수도 있다고 의심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어떤 사람들은 그들이 맥도걸과 공범이라고 믿기까지도 했다.

이 ‘화이트워터’ 사건은 클린턴을 대통령 임기 내내 괴롭히다가 결국 켄 스타의 손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켄 스타는 누구인가?

미국 대법원에 수십 건의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던 변호사 켄 스타는 빌 클린턴을 탄핵으로 내모는 조사를 담당했던 특임검사였다.

스타는 1994년 처음으로 ‘화이트워터’ 사건을 넘겨받았다. 스타 특임검사가 임무를 맡으면서 범죄행위에 대한 대대적인 조사가 이루어졌다. 그는 해당 스캔들과 관련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전직 백악관 부보좌관 빈스 포스터 사건을 포함해서 ‘화이트워터’ 사건을 속속들이 조사하고 나섰다.

하지만 다방면의 조사에도 불구하고 클린턴 부부가 ‘화이트워터’ 사건에 연루됐다는 정황은 끝내 드러나지 않았다. 그러나 스타의 조사는 마침내 모니카 르윈스키라는 젊은 여성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스타가, 르윈스키가 클린턴 대통령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을 사실을 포착한 것이다.

2015년 세상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모니카 르윈스키 [위키미디어]
2015년 세상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모니카 르윈스키 [위키미디어]

모니카 르윈스키는 누구인가?

1995년 모니카 르윈스키라는 젊은 여성이 클린턴의 백악관에서 무급 인턴으로 일을 하게 되었다. 같은 해 11월 클린턴은 당시 22세이던 이 여성과 성관계를 갖게 된다.

르윈스키는 나중에 자신들의 첫 관계를 ‘강렬한 유혹(intense flirting)’으로 묘사하기도 했다. 두 사람은 이내 지근 거리의 방에서 근무를 하게 되었는데, 특히 그들은 국가 예산 문제를 두고 여야가 대립한 결과 연방정부가 셧다운 되었을 때 더욱 가까워진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서 클린턴은 르윈스키를 자신의 개인 서제로 초대하기에 이르렀다.

“우리는 간단히 대화를 나누면서 전부터 서로 간에 화학적으로 이끌렸음을 인정했고, 그가 내게 키스를 해도 되는지를 물었습니다.”

르윈스키는 이후 이렇게 증언했다. 두 사람의 정사(情事)는 1995년 11월 15일부터 시작된 후 약 18개월간 지속되었다.

두 사람은 밀회를 들키지 않기 위해 조심했지만 르윈스키가 클린턴을 찾는 모습을 눈치챈 백악관 참모들도 있었다. 결국 1996년 4월 한 백악관 부참모장이 르윈스키를 국방부로 전출시켜 다른 일을 하도록 했다.

하지만 이 전출 명령은 치명적인 결과를 낳게 된다. 르윈스키가 국방부에서 린다 트립이라는 동료를 사귀면서, 그녀와 신뢰 관계가 생긴 후 클린턴과 사이에 있었던 일을 털어놓았던 것이다.

그러나 트립에게는 자신만의 계획이 따로 있었다. 르윈스키가 비밀을 털어놓자 트립은 켄 스타 변호사에게 손을 뻗쳤고, 이후 르윈스키의 인생은 다시는 전과 같아질 수 없었다.

린다 트립은 누구인가?

린다 트립은 클린턴 대통령을 싫어하던 공무원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첫 번째 상관이던 조지 H.W. 부시 전임 대통령을 좋아했다. 그녀는 클린턴이 여성들을 학대한다고 의심했다. 사실, 그녀는 클린턴의 섹스 스캔들과 혼외정사를 폭로하는 책을 쓸 계획까지 가지고 있었다.

트립은 1996년 르윈스키로부터 클린턴과의 부적절한 관계를 듣고, 횡재했다는 생각에, 출판기획자 루시안느 골드버그와 협의한 후 르윈스키와의 대화를 녹취하고, 르윈스키에게 클린턴의 정액이 묻은 푸른색 드레스를 잘 보관하라고 조언까지 해주었다.

몇 개월 뒤 탄핵 조사관은 바로 그 드레스를 입수하게 된다. 오물이 묻은 드레스가 클린턴-르윈스키 밀회의 스모킹 건이 된 것이다.

1998년 트립은 켄 스타와 접촉했고, 비슷한 시기에 트립의 녹취 테이프는 폴라 존스의 법률 팀으로 넘어가게 된다. 그리고 폴라 존스는 클린턴을 성범죄 혐의로 고소하게 된다.

클린턴과 르윈스키 [위키미디어]
클린턴과 르윈스키 [위키미디어]

폴라 존스는 누구인가?

혼외정사의 루머와 함께 부적절한 성관계 추문은 백악관까지 따라다니며 클린턴을 괴롭혔다.

클린턴을 비난하던 사람 중에 아칸소주의 전 공무원이었던 폴라 존스라는 여성이 있었다. 1994년, 그녀는 1991년 클린턴이 아칸소주 주지사일 때 자신을 성적으로 괴롭혔으며, 성기를 노출하기까지 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일부 사람들은 존스가 돈을 목적으로 클린턴을 물고늘어진다고 여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스는 강경했다. 그리고 그녀의 변호인단은 클린턴-르윈스키의 소문을 포착한 후 곧바로 공격에 나섰다.

먼저, 그들은 르윈스키를 법정으로 소환했다. 그러나 르윈스키는 클린턴과 정사를 나준 적이 없다고 부인했다. 다음으로, 변호인단은 클린턴이 법정에서 증언하도록 만들었는데, 클린턴은 선서 후에 자신의 전직 인턴과의 부적절한 관계를 부인했다.

그러나 둑은 이미 터져버렸다. 클린턴이 법정 증언을 마친 직후 소규모 독립 언론이던 ‘드러지 리포트(Drudge Report)’가 클린턴과 르윈스키 관계를 폭로했다. 그러자 얼마 있지 않아 주류 언론들까지 가세하게 되었다.

1998년 1월 26일, 빌 클린턴은 기자회견을 열고, 그 뒤로도 두고두고 회자되는 항변 연설을 했다.

“나는 그 여성, 르윈스키 양과 성관계를 갖지 않았습니다.”

이 회견이 있고 며칠이 지나자 클린턴의 지지율은 성추문 의혹이 불거지기 전보다 10%나 상승한 71%까지 치솟았다.

그러는 한편으로 빌 클린턴의 부인인 힐러리 클린턴은 남편의 성추문 의혹은 자신의 남편을 망가뜨리려는 우익들의 대대적인 음모의 일환이라고 남편을 두둔하고 나섰다. 그녀는 왜 침묵을 지키느냐고 질문을 받자, “한두 번 겪은 일이 아닙니다. 빌과 저는 이러한 음모 뒤에 도사리고 있는 세력들로부터 살인혐의를 포함한 온갖 음모에 시달려왔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한쪽에서는 클린턴 탄핵의 첫 번째 라운드가 시작되고 있었다.

‘스타 리포트(Starr Report)’는 무엇인가?

켄 스타는 1998년 내내 빌 클린턴과 모니카 르윈스키 관계를 물고 늘어졌다. 그는 특히 클린턴이 장래 좋은 자리를 보장함으로써 르윈스키의 입을 막지나 않았는지에 조사의 초점을 맞췄다.

그러자 클린턴은 자신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고, 두 사람의 밀회가 결국 들통나고 말 것이란 점을 인식하게 되었다.

1998년 8월 17일, 클린턴은 대배심원 앞에서 자신이 전직 인턴과 ‘부적절한(inappropriate)’ 관계를 맺었음을 시인했다. 그러나 그는 이와 함께 두 사람이 구체적인 ‘성교(sexual intercourse)’에까지는 이르지 않았으므로 르윈스키와 ‘성적인 관계(sexual relationship)’를 맺지 않았다는, 자신이 이전에 한 증언은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의 대중은 1998년 9월 11일 전국민을 깜짝 놀라게 할 ‘스타 리포트’가 나오기 전까지는 두 사람이 하는 말은 아무것도 믿지 않으려 했다. 갑자기 미국민들이 대통령의 은밀한 순간을 가장 앞자리에 앉아 들여다보게 된 것이다.

르윈스키는 대통령의 정액이 묻은 자신의 드레스와 대통령에게 어떻게 구강성교를 해주었는지, 심지어는 대통령이 시가(여송연)를 빼서 입에 물기 전에 자신의 성기에 집어넣기도 했다는 내용을 증언했다.

당혹스러운 성행위 내용들이 언론에 도배가 되면서 르윈스키는 대중들의 비난에 무방비로 노출되게 되었다. 그녀는 클린턴과의 밀회를 후회하고, 실수를 저질렀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녀는 몇 년이 지난 뒤 자신이 클린턴과는 다르게 여러 면에서 모욕의 대상이 되고 있음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저는 매춘부나 싸구려, 천한 여자로 낙인찍혔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그 여자’로 불렸습니다. 하지만 저의 진심을 알아주려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 여자’에게도 여러 모습이 있고, 영혼이 있음은 쉽게 잊혀졌습니다.”

하지만 르윈스키와는 다르게 취급받았다고 해서 클린턴이 멍에를 완전히 벗은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아직은 아니었다. 켄 스타가 가공할 리포트를 공개하면서 대통령이 자신의 행위 때문에 탄핵당할 수도 있다고 공언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스타 리포트’ 안에는 대통령을 탄핵에 이르게 할 수 있는 11개 항목의 근거들이 포함되어있었다.

‘아세니오 홀 쇼(The Arsenio Hall Show)’에 등장해 색소폰을 연주하는 클린턴 [유튜브 캡처]
‘아세니오 홀 쇼(The Arsenio Hall Show)’에 등장해 색소폰을 연주하는 클린턴 [유튜브 캡처]

빌 클린턴은 왜 하원에서 탄핵 가결되었나?

클린턴의 탄핵 가결에는 여러 요소들이 작용했다. 그러나 가장 치욕적인 요소는 대통령이 모니카 르윈스키와의 성관계에 대해 대배심원 앞에서 선서를 하고도 거짓말을 했다는 켄 스타의 단언이었을 것이다.

미국 하원의 공화당은 스타가 리포트에서 주장한대로 빌 클린턴을 탄핵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그들은 ‘스타 리포트’의 11개 항목을 4개로 줄였다.

하원 공화당 의원들은 클린턴을 대배심원 앞에서의 거짓말과 폴라 존스 재판에서의 위증, 사법방해, 그리고 권력남용으로 기소하고자 했다.

클린턴은 언제 탄핵 가결되었나?

1998년 12월 19일, 미국 하원은 빌 클린턴 대통령의 탄핵과 관련된 2개 조항을 가결했다.

대통령이 대배심 앞에서 거짓말을 했다는 첫 번째 조항은 228 대 206으로 통과되었다. 그리고 대통령이 르윈스키와의 관계를 숨기기 위해 사법을 방해했다는 두 번째 조항은 221 대 212로 통과되었다.

나머지 두 조항, 즉 폴라 존스 재판에서의 위증과 권력남용 혐의는 통과되지 않았다.

일부 사람들이 대통령이 사임해야한다고 주장했지만 클린턴은 “임기의 마지막 순간까지 자리를 지킬 것”이라고 공언했다. 실제로 진행되던 스캔들은 그의 전반적인 명성을 크게 해치지는 않았다.

스캔들이 터지면서 클린턴의 지지율은 55%까지 떨어졌지만, 하원이 탄핵을 가결한 뒤에는 그가 최초에 스캔들을 부인했을 때와 같이 71%까지 다시 치솟았다. 반대로 르윈스키에게 우호적인 여론은 스캔들 내내 지속적으로 떨어져서, 한 때 5%에 불과하기도 했다.

그러나 클린턴 탄핵 절차는 아직도 진행 중이었고, 그는 어쩌면 대통령직을 잃을 수도 있었다. 클린턴의 탄핵은 1999년 1월 상원으로 이첩되었다.

하지만 상원은 1999년 2월 12일 클린턴을 탄핵 기소한 두 항목을 기각 결정했다. 상원은 55 대 45로 대통령의 위증혐의에 무죄를 결정했다. 그리고 사법방해 혐의에 대해서는 50 대 50으로 팽팽하게 맞섰다. 대통령을 탄핵시키기 위해서는 상원의원 2/3의 찬성이 필요했다. 결국 클린턴은 계속해서 미국을 이끌 수 있게 되었다.

클린턴 탄핵에 찬성한 민주당 의원들은 몇 명?

클린턴 탄핵과 관련해서 민주당과 공화당 의원들은 주로 당론에 따른 투표를 했다. 그러니까 대부분의 민주당 의원들은 대통령을 지지했고, 대부분의 공화당 의원들은 대통령을 반대했던 것이다.

하지만 하원에서는 5명의 민주당 의원들이 탄핵 기소된 4개 조항 중 3개 조항에 찬성표를 던졌다. 버질 구드, 랄프 홀, 폴 맥헤일, 찰스 스텐홈, 진 테일러가 그들이었다. 그리고 진 테일러는 권력남용 혐의에도 찬성표를 던졌다.

한편, 상원에서는 민주당 중 탄핵에 찬성표를 던진 의원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10명의 공화당 의원들이 탄핵의 첫 번째 조항에 대통령이 무죄라는 데 찬성표를 던지기도 했다. 그리고 두 번째 조항에는 5명의 공화당 의원들이 대통령의 손을 들어주었다.

클린턴은 하원 탄핵 가결 이후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는가?

아니다. 클린턴은 하원 탄핵 가결 이후에도 대통령직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상원이 무죄를 판결했기 때문이다. 대통령은 사임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앤드류 존슨과 도널드 트럼프 때도 마찬가지였다.

클린턴은 2001년 1월 20일 후임자인 조지 W. 부시 대통령에게 자리를 물려줄 때까지 대통령직을 유지했다.

클린턴 부부 [연합뉴스 자료사진]
클린턴 부부 [연합뉴스 자료사진]

클린턴 탄핵이 미친 영향은?

클린턴은 비교적 큰 상처를 입지 않고 스캔들을 벗어났다. 그는 자리를 유지했고, 지지자들과 정치적 우군들로부터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모니카 르윈스키는 달랐다. 온라인을 달군 최초의 대형 스캔들 와중에서 그녀는 이후 자신을 가리켜 “사건 즉시 전 세계적으로 개인적 명예가 실추된 ‘페이션트 제로(최초 환자)’”라고 묘사했다. 르윈스키의 어머니는 그녀가 혹시 샤워실에서 자살이라도 저지를까봐 항상 문을 열어놓고 샤워하도록 했다.

클린턴 탄핵 사건 이후 한참 시간이 지난 뒤 르윈스키는 생계유지를 위해 일자리를 찾기 위해 애를 썼다. 그녀는 2005년 무렵부터 대중들의 눈에서 사라져, 10년을 조용히 보냈다. 그러다가 그녀는 스캔들 이후 자신이 상처 때문에 얼마나 힘들어했는지를 밝히기 위해 2014년 대중 앞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저는 그의 권력을 보호하기 위한 희생양에 불과했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대중들로부터 받은 모욕에 대해 ‘배너티 페어(vanity fair)’지의 기사를 통해 이렇게 밝혔다.

“클린턴 행정부, 특별검사라는 하수인들, 양당의 정치꾼들, 미디어 등 권력을 가진 모두가 나를 낙인찍는 데 가담했습니다.”

올해 48세가 된 르윈스키는 집단괴롭힘 방지 운동가로 새로운 삶을 살고 있지만, 그녀의 이미지는 극한적인 조롱거리가 되었던 그때 그 시절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한 젊은 여성의 삶을 바꿔놓은 것과는 별개로 클린턴의 탄핵 사건은 미국에 잊혀지지 않는 영향을 미치고 있다.

당시 부통령 앨 고어는 2000년 대통령 선거에 나섰을 때 눈에 띄게 클린턴 백악관과 거리를 두려고 했다.

그와는 반대로 고어의 상대방 조지 W. 부시 후보는 백악관에 존엄을 되찾겠다고 유세를 펼쳤다. 부시 후보의 아버지이자 전임 대통이었던 조지 H. W. 부시를 그리워하고 클린턴을 미워하던 유권자 측에게는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결국 고어는 대선에서 패배했다. 그는 전체 투표에서는 승리했지만 플로리다의 선거인단 투표에서 아슬아슬하게 패배함으로써 근래 이루어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가장 논란이 많은 선거 결과를 만들어냈다.

고어의 패배는 미국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만약에’라는 가정법을 만들어냈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선거 유세에서 클린턴을 활용했으면 이겼을지도 모른다고 아쉬워하기도 하고,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고어가 대통령이었다면 9/11 테러에 어떻게 대처했을지를 가정해보기도 한다.

또, 클린턴 탄핵 이후 그 섹스 스캔들이 미국 역사에서 양당 간의 극한 대치를 격화시켰고, 공화당과 민주당을 미래의 충돌로 이끌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한다.

“양당 모두에게 우물에 독을 뿌린 결과가 되었습니다.”

뉴욕주 공화당 하원의원인 피터 킹은 이렇게 분석했다. 그는 당시 당론은 어기고 클린턴 탄핵에 반대했다.

“국가가 잘 굴러가기를 바라기보다는, 조지 부시가 취임한 첫날부터 복수를 꿈꾸는 민주당원들이 있었음은 의심할 나위가 없습니다.‘

클린턴 탄핵의 파급은 이런 식으로 후대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 재판은 분명히 르윈스키 같은 개인의 삶을 바꿔버린 측면이 강하지만 이보다 광범위한 영향을 미치고 있음도 분명하다. 그 영향으로 미국의 정치, 문화, 나아가서는 세계가 변화됐는지도 모른다.

dtpchoi@wikileaks-kr.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