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관 탐구④ 박상옥] 공소장의 재구성
[대법관 탐구④ 박상옥] 공소장의 재구성
  • 윤여진 기자
  • 승인 2022.01.28 17:00
  • 수정 2022.01.29 09: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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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5~ 2021. 5
-사법연수원 11기 수료
-양승태 前 대법원장 제청
-박근혜 前 대통령 임명

2020년 1월 30일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대법관 12대1(별개) 의견으로 박근혜 정부 시절 청와대에서 근무한 김기춘 전 비서실장과 조윤선 전 정무수석에게 각각 징역 4년과 징역 2년을 선고한 원심을 파기했다. 이들은 김종덕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과 공모해 '좌파 문화예술인'을 상대로 문화예술기금 지원을 배제한 혐의(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로 재판에 넘겨졌었다. 문체부 간부들은 문체부 산하 법인 한국문화예술위원회·영화진흥위원회·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의 문예기금 사업 자체 심의에 앞서 이들 법인 사무국 직원에게 지원 신청자 명단 제출을 요구했다. 문체부는 신청자 명단과 먼저 정무수석실로부터 통보받은 '배제 대상자 명단(블랙리스트)'과의 교집합을 세 법인에 내려보냈다. 1·2심은 "특정 인물·단체를 지원 사업에서 배제하도록 심의 과정에 개입하게 한 행위"를 '직권남용'이라 판단했다. 그러면서 법인 사무직원들의 신청자 명단 제출 행위를 '의무 없는 일'이라 단정했다. 직권남용죄는 직무권한 남용으로 다른 사람에게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한 공무원을 처벌하는 형벌 조항이다. 전합은 직권남용과 의무 없는 일은 각각 원인과 결과라면서도 엄밀히 보면 직권남용죄를 구성하는 별개 구성요건이라고 새로운 법리를 세웠다. 이같은 법리에선 명단 제출 행위가 의무 없는 일에 해당하는지 심리하지 않고 직권남용 인정만으로 곧바로 직권남용죄를 인정한 원심은 파기를 면할 수 없었다. 

박상옥 대법관. [출처=연합뉴스]
박상옥 전 대법관. [출처=연합뉴스]

파기환송 결론은 같이 했으나 이유를 달리한 박상옥 대법관은 김 전 실장의 직권남용이 원인이고 예술위·영진위·출판원 사무직원의 의무 없는 일이 결과라는 다수의견의 전제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김 전 실장의 행위가 단순 헌법에 어긋나는 '위헌 행위'에 그친다면 직권남용은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직권남용이 성립하지 않는다면 의무 없는 일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나아가 박 대법관은 원심과 다수의견이 채택한 헌법 제9조 '문화국가의 원리'는 지나치게 추상적이어서 김 전 실장 행위가 위헌 행위에도 이르지 않는다고 봤다. 박 대법관이 보기에 원심은 위헌 행위만으로 의무 없는 일을 끌어냈는데 다수의견은 문제의 일부만 지적했다. 박 대법관은 원심과 다수의견을 함께 묶어 "피고인들에게 불리하게 범죄구성요건을 확장 해석하는 것"이라 따진다. 

◇ 진짜 피해자를 찾아라
김명수 대법원장 체제에서 유일하게 검찰 출신 대법관인 박 대법관은 법관을 탓하는 것에서 멈추지 않는다. 작의적이고 자의적인 공소장을 집필한 건 검찰과 검사인 탓이다. 박 대법관은 직권남용 상대방을 뜻하는 피해자부터 잘못 상정됐다고 지적한다. 만일 김 전 실장이 청와대와 문체부의 조직력을 이용해 범행을 저질렀다면 예술위·영진위·출판원 역시 공범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피해자는 이들 법인 사무직원이 아닌 좌파로 찍혀 문예기금을 받지 못한 문예인들이다. 박 대법관은 검사가 유죄를 쉽게 받아내기 위해 모순적인 공소장을 써냈다고 일갈한다. 

박 대법관은 별개의견 중간에 '직권남용죄 검찰 소추의 문제점'이란 부제를 달아 "굳이 피고인들을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죄로 의율하려면, 공소사실과 같이 예술위·영진위·출판원의 직원들에게 의무 없는 일을 하도록 한 것이 아니라, 피고인들의 행위로 인하여 각 법인의 기금 배분을 위한 공모사업 신청자들에 대한 권리행사를 방해한 것으로 보는 것이 실체적 진실에는 보다 더 부합하는 것"이라 했다. 직권남용죄는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할 때뿐 아니라 '권리행사방해'까지 처벌한다. 사상범으로 찍힌 문예인들은 정당하게 문예기금 사업에 공모할 권리를 침해받았다. 

진짜 피해자와 가짜 피해자를 뒤바꾸는 검사의 행동을 법관이 용납한다면 공소장은 '쉽게 쓰인 공문서'로 전락한다. 범죄사실 전체가 부분으로 쪼개지고, 그 부분은 다시 쪼개져 제2의 가해자와 제2의 피해자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박 대법관은 "법인 직원들로 하여금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하였다는 점은 지원 배제라는 피고인들의 목적을 달성하는 결과에 이르는 과정에 불과하다"며 "목적 달성 과정에서 이루어진 이러한 행위들을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죄에서 말하는 의무 없는 일로 포섭한다면 앞서 본 직권남용의 부당한 확정 해석과 더해져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죄의 처벌 범위가 무한하게 확대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직권남용은 미수범이 아닌 기수범을 처벌하는 만큼 중간 행위가 아닌 최종 행위를 처벌하는 게 직권남용죄가 만들어진 이유와 어울린다는 얘기다. 이 사건 주심으로 다수의견을 대표집필한 안철상 대법관은 노정희 대법관과 같이 쓴 보충의견에서 "(블랙리스트인) 이들에 대하여 지원 배제를 함으로써 이들의 권리행사를 방해한 행위 또는 이들에 대하여 지원배제의 처분이나 의결을 하게 한 행위를 소추하는 것이 기본"이라며 이례적으로 소수의견의 날 선 지적을 반박하지 못했다.  

◇ 한수원은 공범이다
직권남용죄를 쉽게 구성하지 말하는 박 대법관의 의견은 다수의견인 법정의견이 아니어서 구속력이 없다. 그런데도 박 대법관의 말은 일선 법관들에게 즉각적인 효력을 발휘했다. 

지난해 2월 9일 새벽 대전지법 오세용 영장전담판사는 백운규 전 산업통상부 장관의 구속영장을 기각했다. 언론에 공개한 569자(字) 기각사유에선 빠졌으나 대전지검 수사팀에 통보한 내용에는 '한수원 이사회가 경제성 평가조작을 공모 내지 방조했는지 따져봐야 한다'는 부분이 있었다. 근거로는 문체부 블랙리스트 사건에서 박 대법관의 '공소사실에서 피해자인 직권남용 상대방이 실제로는 공범일 수 있다'는 별개의견을 인용했다. 검찰은 백 전 장관으로부터 '월성 1호기 원전의 조기 폐쇄 및 즉시 가동 중단' 검토를 지시받은 산자부 공무원이 한국수력원자력 이사회를 압박해 경제성을 낮췄다는 이유로 한수원을 직권남용 상대방인 피해자로 상정했었다. 오 판사가 보기에 한수원은 피해자가 아닌 공범이었다. 기각 직후 대전지검 수사팀은 '영장판사가 대법원 다수의견도 아닌 별개의견을 인용했다'며 반발했다. 검사의 자의적 공소를 법관이 통제해야 한다는 검사장 출신 대법관의 주문은 1년 만에 현실이 됐다.

◇ 법관이 수사기관을 교정하지 못한다면
박 대법관의 대법원 판결엔 '내가 만일 검사라면, 법관이 만일 검사라면'이라는 가정이 깔려있다. 때문에 박 대법관은 때로는 블랙리스트 사건 때처럼 자의적인 검사의 법 적용을 경계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현실적인 수사기관의 입장을 대변하기도 한다. 

수사기관의 자의적인 행태를 제대로 걸러내지 못한 법관을 비판한 대표적인 판결은 대법원 1부가 2017년 9월 29일 선고한 '인천세관 압수물 가환부 사건'이다. 형사소송법 제218조의2 1항은 '압수를 계속할 필요가 없는 압수물은 공소제기 전 소유자, 소지자, 보관자, 제출인이 청구하면 환부 또는 가환부해야 한다'고 정한다. 문제는 '필요적 몰수' 대상인 밀수출 물품이 피고인이 아닌 제3자의 소유물인 경우, 제3자에게 가환부할 수 있는지였다. 1994년 대법원 결정은 "가환부의 청구가 있는 경우 가환부를 거부할 수 있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가환부에 응하여야 한다"고 하면서 특별한 사정이 있는지 심리할 때 "몰수 대상인지 여부"를 검토하게끔 했다. 박 대법관 결론은 밀수품은 몰수 대상이지만 몰수의 범위는 점유자인 피고인에게만 미치고, 소유자인 제3자는 몰수의 상대방이 아닌 까닭에 인천세관 특별사법경찰관은 가환부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박상옥 대법관. [출처=연합뉴스]
박상옥 전 대법관. [출처=연합뉴스]

그런데도 원심은 몰수 물건은 가환부를 할 수 없다는 잘못된 판단을 해버렸다. 대신 형소법 133조 제2항 "증거에만 공할 목적으로 압수한 물건"을 적용해 가환부를 인용했다. 박 대법관은 "검사의 압수물 가환부에 관한 적용법조 및 가환부 거부의 특별한 사정 유무 등에 관한 법리를 오해한 잘못이 있다"이 있다며 원심이 수사기관의 잘못된 행태를 지적하면서도 제대로 교정하지 못하는 모습을 꼬집었다.

검사가 끊임없이 자신의 권한과 의무를 살펴야 한다는 박 대법관의 태도는 진혜원 검사의 징계취소소송 사건에서도 발견된다. 지난해 2월 10일 박 대법관이 주심인 대법원 2부는 진 검사가 문무일 전 총장을 상대로 경고처분을 취소하라는 원심을 파기했다. 진 검사는 2017년 제주지검에 근무하면서 수사사무 19건을 '부적정처리'했다는 이유로 '검찰총장 경고'를 받았다. 박 대법관은 "검사의 사건처리가 검사에게 주어진 재량권 범위 내에 이루어진 것이어서 위법하지 않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상급행정기관의 행정규칙 또는 내부기준에 위배되거나 증거관계 등 제반사정에 비추어 가장 적합한 조치가 아니라고 판단되는 경우에는 검찰총장은 직무감독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판시했다. 최고의 답안지를 써내지 못한 검사의 증거 판단에 검찰총장이 직접 개입할 수 있다는 뜻이다. 검사의 잘못은 검사동일체인 검찰의 수장인 검찰총장이 교정해야 한다는 강박으로까지 읽힌다.  

◇ 더는 양보할 수 없다
박 대법관 스스로 현실적인 수사기관이 된 판결은 지난 2019년 11월 21일 전합이 선고한 '정당하지 않은 증언거부 사건'이 대표적이다. 당시 쟁점은 증인이 정당하게 증언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을 때 검찰에서의 진술을 증거로 사용할 수 있는지였다. 증거능력 예외를 규정한 형소법 제314조는 "사망·질병·외국거주·소재불명 그 밖에 이에 준하는 사유로 인하여 (법정에서) 진술할 수 없는 때"는 검사가 작성한 조서를 증거로 쓸 수 있다고 정한다. 문제는 앞선 2012년 전합은 '정당한 증언거부 사건'에서 이미 정당한 증언거부는 예외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결론냈다는 점이다. 정당한 증언거부와 정당하지 못한 증언거부를 구분하지 않고 모두 검찰의 조서를 쓸 수 없을 때라고 한다면 사실상 대법원 판례를 변경하는 것이 된다. 

박 대법관은 별개의견에서 "대법원은 이미 전원합의체 판결로써 정당하게 증언거부권을 행사하여 증언을 거부한 경우에는 형사소송법 제314조의 '그 밖에 이에 준하는 사유로 인하여 진술할 수 없는 때'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단하였다"며 "위 전원합의체 판결은 정당하게 증언거부권을 행사하여 증언을 거부한 경우에만 형사소송법 제314조의 '그 밖에 이에 준하는 상유로 인하여 진술할 수 없는 때'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단하였고, 그 근거는 정당하게 증언거부권을 행사한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라 지적했다.  

김선수 대법관이 작성한 다수의견은 정당한 증언거부나 정당하지 못한 증언거부나 모두 피고인의 반대신문권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같다고 했다. 박 대법관에게 이같은 논증은 논리의 전복이다. 증거는 법정에서 내보여야 한다는 '전문법칙'의 예외를 정한 형소법 제314조 자체가 피고인의 반대신문권을 보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박 대법관은 "일단 반대신문권이 실현되지 않는 상황을 전제로 하여 구체적인 개별 상황에 대하여 형사소송법 제314조의 '그 밖에 이에 준하는 사유로 인하여 진술할 수 없는 때'에 해당한다고 볼 것인지가 문제 되는 것"이라고 적었다. 다수의견 논리라면 전문법칙 예외인 증인의 소재불명과 예외가 아닌 증인의 정당한 증언거부를 같게 취급해야 하는 모순이 발생한다. 

박 대법관은 별개의견에서 검사들이 유죄 입증을 위해 자주 입에 담는 "실체적 진실"이란 말을 10번이나 사용하며 "증인으로 출석하여 증언할 의무는 형사소송법의 중요한 이념인 실체적 진실의 발견을 위한 것"이라 강조했다. 애초 형소법 제148조가 정한 정당한 증언거부권이 "형사소송법이 이러한 실체적 진실의 발견이라는 근본적인 이념을 양보"한 결과인데 정당하지 못한 증언거부에서 또 한 번의 양보를 할 수 없다는 얘기다. 해당 조항은 "형사소추 또는 공소제기를 당하거나 유죄판결을 받을 사실이 드러날 염려가 있는 증언을 거부할 수 있다"며 그 대상을 '친족이거나 친족이었던 사람' '법정대리인, 후견감독인'으로 나열한다. 자녀의 입시에 사용할 서류를 조작한 혐의(사문서 위조)로 부인인 정경심 전 동양대 교수와 함께 재판에 넘겨진 조국 전 법무장관이 정 전 교수 재판에 출석해 "형소법 148조"를 연거푸 언급한 바 있다. 

박 대법관은 "다수의견에 따른다면 적어도 다음과 같은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것을 쉽게 예상할 수 있다"며 전합 판결 이후를 염려한다. 피고인은 수사기관에서 자신에 유리하지 않게 진술한 증인을 재판에서 회유하거나 협박해 증언을 못하게끔 유도할 수 있다. 다수의견대로라면 정당하지 못한 증언거부 때 검찰조서를 대신 증거로 쓸 수 없다. 결국 피고인은 자신에게 불리한 증거를 합법적으로 폐기할 수 있다. 형소법은 증인의 정당한 이유 없이 증언을 거부할 때 최고 50만원 과태료를 부과한다. 피고인은 이제 50만원을 대납하고 증인은 "별다른 거리낌 없이 증언을 거부할 유혹에 빠지게 될 것"이다. 검사의 권한과 의무 쟁점인 사건에서 박 대법관은 선례구속주의자의 면모를 숨기지 않는다. 박 대법관은 "형사소송법이 국민에게 부여한 증언의무는 하루아침에 거래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라며 더는 검사가 아닌 박 대법관은 검사로서 체념한다.

◇ 국가재정은 피해자에 우선할 수 없다
박 대법관의 '만일 내가 검사라면'이라는 정의관념은 '만일 내가 국가라면' 국가관으로 확장된다. 박 대법관은 '정당하지 않은 증언거부 사건' 대법원 판결이 즉각적으로 미칠 범죄로 "사회적 법익 또는 국가적 법익에 관한 범죄"를 꼽았다. 뇌물죄, 정치자금법위반죄, 마약·조직폭력범죄를 막지 못할 때 피해자는 국가다. 때문에 박 대법관은 수사기관의 권한과 의무가 쟁점일 때와 마찬가지로 국가의 자의적인 행태를 비판하면서 동시에 국가의 정당한 이익을 보장한다. 

국가의 자의적인 행태를 비판한 판결로는 '과거사 소멸시효 사건'이 있다. 박 대법관이 주심인 대법원 2부는 지난해 4월 29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상 '중대한 인권침해·조작의혹 사건'으로 형사 재심에서 무죄를 확정받은 경우 국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청구권의 소멸시효는 기존 6개월이 아닌 3년이라고 판결했다. 앞서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인 2013년 박병대 대법관이 "채권자에게 권리의 행사를 기대할 수 없는 객관적인 사실상의 장애사유가 있었던 경우에도 그러한 장애가 해소된 때에는 그로부터 상당한 기간 내에 권리를 행사하여만 채무자의 소멸시효 항변을 저지할 수 있다"며 이때 소멸시효를 뜻하는 '상당한 기간'을 6개월로 단축한 것을 정상화한 것이다. 

박상옥 전 대법관. [출처=연합뉴스]
박상옥 전 대법관. [출처=연합뉴스]

당시 박병대 대법관은 재심무죄판결에 따른 국가 손배 소멸시효를 민법 제766조 1항 '손해 및 가해자를 안 날로부터 3년'(단기소멸시효)이 아닌 6개월(민법상 시효정지)로 정했다. 유신 및 권위주의 시절 수사기관의 증거조작을 재심에서 밝혀낸 피해자들은 공동으로 손배를 청구하는 경우가 많았다. 피해자 일부는 함께 소송할 이들을 기다리다 자신의 재심무죄판결 확정일로부터 6개월을 지나쳐버렸다. 이들은 과거사 사건에서 민법상 소멸시효 조항 ①제766조 2항 '불법행위를 한 날로부터 10년'(장기소멸시효) ②제166조 1항 '소멸시효는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때부터'와 국가재정법상 예외 ③'국가에 대한 권리는 5년' 조항을 과거사정리법상 '중대한 인권침해 ·조작의혹 사건'에 적용하면 위헌이라고 주장하며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을 청구한다. 2018년 헌재는 과거사정리법상 '민간인 집단 희생사건'과 '중대한 인권침해사건·조작의혹사건'에 적용하는 ①②에 위헌을 선고했다. 헌법재판소법이 금지한 재판소원(재판취소)을 사실상 받아들이면서 형식은 법 조항 일부에 위헌을 선고하는 '일부위헌'을 취했다. 다만 대법원이 효력을 부정하는 법 적용에 위헌을 선고하는 '한정위헌' 시비는 피할 수 없는 결정이었다.

2020년 4월 29일 대법원 1부(박정화 권순일 이기택 김선수)는 헌재가 위헌을 선고한 ①②를 과거사 사건에 적용한 2014년 대법원 판결을 취소했다. 역시 박병대 대법관의 법리를 따른 것이었다. 문제는 재심대상판결을 취소하면서 재심무죄판결로 인한 소멸시효는 기존처럼 6개월인지 아니면 단기소멸시효인 3년인지 밝히지 않았다는 점이다. 심지어 대법원과 별개로 재심대상판결의 원심을 취소한 항소심 재판부인 서울고법 민사합의6부(이정석 방웅환 김상철)는 2019년 10월 "(재심무죄판결일로부터) 3년이 지나지 아니한" 소멸시효는 완성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던 터였다. 대법원이 명확한 갈피를 잡아주지 않으면서 박상옥 대법관이 주심으로 심리한 상고심 사건의 원심 재판부인 서울고법 민사합의4부(홍승면 구민승 박지연)는 재심무효판결에서 소멸시효를 과거 박병대 대법관 판례처럼 6개월이라 못 박았다. 

이 사건에서 원고는 재심무죄판결로부터 6개월 이내 손해배상을 청구했지만 1심이 장기소멸시효를 적용하는 바람에 돈 한 푼 받지 못했다. 헌재의 위헌 결정 기속력을 무시한 것이다. 항소심은 이같은 1심 판결을 취소하면서도 재심무죄판결 소멸시효에 단기소멸시효가 아닌 6개월을 적용했다. 원고 1은 배상 길이 열렸다. 대신 과거 불법구금으로 재판에 넘겨진 원고1과 달리 불법구금으로 원고1에 불리한 진술을 한 나머지 원고2에게는 단기소멸시효를 적용하고 그 기산점을 재심무죄판결 확정일이 아닌 불법구금 해제일로 봤다. 원고 1의 가족인 원고 2는 배상을 받을 수 없다는 게 항소심 결론이었다. 

때문에 재심무죄판결이 있을 때 소멸시효가 6개월인지는 엄밀히 따질 때 상고심 쟁점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박상옥 대법관은 원고 2의 소멸시효 기산점 역시 원고 1의 재심무죄판결 확정일로 본다고 달리 판단하면서 소멸시효 역시 6개월이 아닌 단기소멸시효가 적용된다고 했다. 박상옥 대법관은 "원고들에 대한 불법적인 수사목적의 동일성, 원고들 사이의 인적 연관성 및 원고들의 손해배상청구가 사실상 가능하게 된 상황 등을 고려할 때 원고 1에 대한 유죄확정판결이 취소된 이후에야 원고들이 불법행위의 요건사실에 대하여 현실적이고 구체적으로 인식하였다고 봄이 합리적"이라고 적었다. 이어 "원고 1에 대하여 무죄를 선고한 형사 재심판결이 확정된 때부터 3년 이내에 원고들이 이 사건 소를 제기한 이상 원고들의 청구에 관하여 단기소멸시효는 완성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고 덧붙였다. 대법원 2부 대법관은 대법원 1부 대법관들이 피한 쟁점을 정면으로 받았다. 그 결정은 박상옥 대법관이 주도한 것이다. 2013년 국가재정을 염려해 재심무죄판결 소멸시효를 임의로 3년에서 6개월로 줄인 박병대 대법관의 법리를 따라 과거사 피해자의 손배소를 기각한 대법원 판결은 기자의 전수조사 결과 19건(재심무죄판결 6개월 이내 손배소 사건 제외)이다. 헌재 결정을 적극적으로 재해석한 박상옥 대법관의 결단으로 20번째 대법원 판결은 나오지 않게 됐다. 이때 박 대법관은 반(反)선례구속주의다. 

◇ 국민건강보험공단이 왜 피해자 돈을
국가재정을 이유로 피해자의 보상권을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박 대법관의 철학은 '선 보험급여 공제 후 과실상계 사건'으로 이어진다. 지난해 3월 18일 전합은 대법관 12대1 의견으로 기존 '선 과실상계 후 보험급여 공제' 원칙을 폐기했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이 전체 치료비에서 먼저 부담하는 보험급여를 언제 공제하느냐에 따라 수급자인 피해자가 받을 수 있는 금액은 달라진다. 가령 전체 치료비 100만원, 보험급여 60만원(60%), 피해자 과실비율이 30%일때 가해자의 손해배상액 종전 판례 계산법은 '100만원x70%-60만원=10만원'이다. 가해자는 나머지 60만원을 공단에 줘야 한다. 반면 박 대법관이 주심인 전합이 변경한 계산법은 '(100만원-60만원)x70%=28만원'이다. 공단은 42만원만 받는다. 18만원을 공단이 아닌 수급자가 더 받는 셈이다. 가해자가 부담하는 금액은 과실비율에 따라 고정돼 판례변경 전후에서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박상옥 전 대법관. [출처=연합뉴스]
박상옥 전 대법관. [출처=연합뉴스]

박 대법관은 "변경된 법리에 따르더라도 가해자가 부담하여야 할 손해배상의 범위에는 변화가 없다"면서 "차이점은 보험급여를 실시하는 데 든 공단부담금 중 '피해자의 과실비율에 해당하는 금액'을 피해자가 부담할 것인지 공단이 부담할 것인지"라고 쟁점을 분명히 했다. 전합 판결로 공단의 보험재정이 열악해진다는 이동원 대법관의 반대의견에는 "보험재정 확보를 위하여 제58조를 공단에 가장 유리하고 수급권자에게 가장 불리하게 해석하는 것은 정당화될 수 없다"고 했다. 애초 제3자의 과실비율이 섞이지 않은 수급자의 과실에 의한 사고에서도 공단은 보험급여비율에 따른 돈을 지급한다. 전체 치료비 70만원이 들었다면 보험급여는 42만원(60%)이다. 새로 바꾼 법리에 따른 계산법에서 공단이 부담해야 할 금액과 정확히 같다. 우연에 가까운 제3자의 과실이란 변수로 피해자가 더 부담하는 건 맞지 않다는 게 박 대법관 판단이다. 

박 대법관은 이 정도에서 만족할 수 없다. 보험급여를 먼저 공제하지 않는 만큼 피해자의 손배해상금 청구 사건과 공단의 구상금 청구가 이원화될 가능성을 우려한 것이다. 박 대법관은 "새로운 법리를 따를 때 관련 소송의 심리에 관하여 유의할 점을 살펴본다"며 민유숙 대법관과 함께 보충의견을 썼다. 박 대법관은 "(두 소송에서) '가해자 책임비율'이 일관성, 통일성 있게 판단되어야 한다"며 하급심을 상대로 한 사실상의 소송지휘 역할에 나섰다. 피해자 소송과 공단 소송이 1개 법원에서 별도 진행된다면 "법원은 소송지휘권을 행사해 두 소송의 변론을 병합하거나 병행심리를 하여 가해자 책임비율을 통일적으로 판단할 수 있도록 운용의 묘를 발휘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때 '운용의 묘'는 사법적극주의자의 상징이다. 

◇ '피해자가 아닌 자'의 이익
'과거사 소멸시효 사건'과 '선 보험급여 공제 후 과실상계 사건'에서 국가경제가 피해자의 이익에 우선할 수 없다는 박 대법관의 다짐을 엿볼 수 있다. 이 말을 거꾸로 뒤집으면 국가경제가 '피해자가 아닌 자의 이익'에는 우선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선거운동원의 수당에는 최저임금법을 적용할 수 없다고 2020년 1월 9일 대법원 2부가 판결한 이경일 전 고성군수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이 여기에 딱 맞다. 

이 전 군수는 제7회 지방선거를 앞둔 2018년 5월부터 6월까지 모텔 2층에 설치한 선거사무소에서 일한 선거사무원 17명에게 50만원이 든 봉투 1개씩을 나눠준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공직선거법 제135조 2항은 선거사무 관계자에게 수당과 실비를 지급할 경우에도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정한 범위' 내에서만 가능하다고 정한다. 중앙선관위가 정한 선거사무원의 수당은 하루 3만원에 불과했다. 이 전 군수는 이 규정을 어기고 '수당 외에 추가로 금품을 지급해달라'는 선거사무원들의 요구를 그대로 들어줬다.

이 전 군수는 1심에서부터 상고심까지 계속해서 선거법 전문가 법무법인 소백 황정근 대표변호사를 선임했다. 황 변호사는 '선거사무원은 근로자'라는 2007년 대법원 판결을 인용해 선거운동원의 수당에도 최저임금법이 적용돼야 하는데 선거법이 준용한 중앙선관위 규정은 여기에 어긋나 무효라는 주장을 폈다. 황 변호사는 이같은 주장이 1·2심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자 항소·상고이유서에 "피고인은 선거사무원에게 공직선거관리규칙에 정해진 수당만을 지급한다면 최저임금법 위반으로 형사처벌될 수 있다"고 적었다. 박 대법관은 "공직선거의 특수성을 고려할 수밖에 없는 공직선거법과 근로자의 생활안정과 노동력의 질적 향상을 통해 국민경제의 건전한 발달에 이바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최저임금법은 그 입법 취지와 규율 영역을 달리한다고 할 것"이라 반박했다. 최저임금법이 선거법에 우월할 수는 없다는 취지다. 그러면서 박 대법관은 "보전되는 선거비용이 증가하는 경우에는 국가 또는 지방자치단체의 재정부담이 증가하는 측면도 고려하여야 한다"고 덧붙였다. 선거사범은 피해자가 아니라는 검사적 시각과 피해자가 아닌 자에게 국가 돈을 내어줄 수 없다는 국가관이 짙게 배인 판결이다. 황 변호사는 판결 직후 자신의 페이스북에 "선거법에 최저임금법을 적용하지 않는다는 특별규정이 없는데, 대법원이 '사법에 의한 입법'을 한 것이나 진배없다"고 했다. 선례구속주의를 부정하는 박 대법관에게 '당신은 사법적극주의자인가' 물음을 던진 것이다. 

박상옥 전 대법관. [출처=연합뉴스]
박상옥 전 대법관. [출처=연합뉴스]

◇ 선거운동원은 근로자가 아니다
'고성군수 사건'에서 선거운동원을 사실상 근로기준법상 근로자로 인정하지 않은 박 대법관 판결은 노동자의 권익 향상에 관심이 없는 편이라는 오해를 심어주기 싶다. 하지만 박 대법관은 2020년 4월 28일 '덕성여객자동차 사건'에서 버스운행 노동자에게 장갑, 음료수, 담배 등의 물품 실비 변상조로 지급되는 'CCTV 수당'의 통상임금성을 인정했다. 이 회사는 1998년 버스에 CCTV를 설치하면서 장갑, 음료수, 담배 명목으로 일비 1만원을 지급했다. 문제는 2012년부터 해당 물품을 구입할 수 있는 일비 1만원 상당의 물품구입권을 배부했다는 점이다. 박 대법관은 "(CCTV 수당은) 정기적·일률적·고정적으로 지급한 것이므로 통상임금"이라며 "물품구입권으로 교부되었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라고 간결하게 판결했다. 원심이 2012년을 경계로 물품구입권을 이전의 CCTV 수당으로 보지 않고 "후생복지나 근로제공에 필요한 물품을 제공하기 위한 조치"라 본 것과 다르다. 
 
박 대법관은 통상임금 요건 중 노동자에게 가장 불리한 '고정성'을 개방한 대법관이기도 하다. 2020년 4월 29일 박 대법관이 주심인 대법원 2부는 '한국알스트롬뭉쇼 사건'에서 정기상여금 지급 전에 퇴직한 노동자도 근무한 기간에 비례한 만큼 청구할 수 있다는 판결을 내놨다. 기존 '재직요건'이 붙은 상여금은 계속 재직 여부에 따라 지급 여부가 달라져 고정성이 없다는 게 기존 대법원 입장이었다. 박 대법관은 이 회사 단체협약이나 취업규칙에 '특정 시점에 재직 중인 근로자에게 지급한다'는 규정과 '정기상여금은 근무기간에 비례하여 지급한다' 규정이 병렬적으로 기술돼 있는 만큼 "구체적인 사안별로 신중하게 살펴야 한다"고 했다. 근무한 기간에 비례해 지급되는 한도에서 고정성이 부정되지 않는다는 관점이다. 고정성에서 재직요건을 필요충분조건이 아닌 필요조건으로 격하한 것이다. 

전년도 근무 성과에 따라 임금인상 소급분이 뒤늦게 지급되는 경우 이미 퇴직한 노동자는 근무기간만큼의 임금을 받지 못하는 현상은 대기업, 중소기업을 가리지 않고 나타난다. 왜곡된 임금시장에 눈 감고 있던 대법원에 작은 틈을 마련한 대법관이 검사 출신이라는 점은 지난해 5월 박 대법관 퇴임 이후 '검사를 제외한 대법원'이라는 새로운 관습에 의문을 남긴다. 박 대법관은 검사 포함 수사기관의 의무와 권한이 쟁점일 때 자의적 법 적용과 집행을 경계하는데 주저함이 없다는 점에서 의문은 더 커진다. 공익의 대변자 검사는 '작은 국가'다. 박 대법관이 정당하지 않은 배상을 하는 '큰 국가'를 질책하는 이유다. 노동자가 정당하지 못한 대우를 받을 때 개입하는 것도 연장선이다. 검사라는 정체성을 기준으로 박 대법관을 선례구속주의자로, 동시에 사법적극주의자라로 명명할 수 있다고 6년의 판결이 말한다. 

[위키리크스한국=윤여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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