훌륭한 대통령은 '결정'을 잘 했다 [정숭호 칼럼]
훌륭한 대통령은 '결정'을 잘 했다 [정숭호 칼럼]
  • 정숭호 칼럼
  • 승인 2022.06.02 08:58
  • 수정 2022.06.02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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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한국에 왔던 미국 대통령 바이든이 우리 대통령 윤석열에게 영어 문구 ‘The buck stops here.’가 새겨진 명패를 선물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도중에 취임해 한국전쟁 와중에 퇴임한 미국 33대 대통령 해리 트루먼(1884~1972)이 집무실 책상 위에 뒀던 것과 같은 모양, 같은 크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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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언론은 이 문구를 “책임은 내가 진다”라는 말이라면서 “대통령직의 엄중함을 언제나 염두에 두라는 바이든의 당부가 담겼다”고 설명했지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간 해석도 있습니다. 72년 전 6월 25일, 한국전쟁이 터지자 공산주의 팽창을 막기 위해 곧바로 미군 파병을 결정한 트루먼 덕분에 한국이 자유민주주의를 지킬 수 있었음을 상기시키고, 지난 정권에서 느슨해진 한미동맹 회복에 윤 정권이 노력을 기울여달라는 주문이 들어있다는 해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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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든의 선물을 다룬 기사들을 읽다가 나라면 이 문구를 “책임은 내가 진다”가 아니라 “결정은 내가 한다”라고 번역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선, 이 문구의 연원, 역사를 살펴보면 그런 결론이 나옵니다. ‘buck’은 원래 ‘사슴’이나 이 문구에서는 ‘사슴뿔 손잡이가 달린 칼’, ‘buck knife’로 사용됐습니다.

트루먼(오른쪽)이 친구들과 포커를 하면서 '포커 페이스'로 자기 카드를 들여다보고 있다. 트루먼도서관 소장 사진.
트루먼(오른쪽)이 친구들과 포커를 하면서 '포커 페이스'로 자기 카드를 들여다보고 있다. 트루먼도서관 소장 사진.

트루먼이 태어나고 성장한 미주리주는 당시 미국의 변방이었습니다. 서부영화에 나올 만한 거친 사내들이 꽤 있었던 거지요. 이 사내들은 소 떼 몰고, 사냥하고, 농사짓다가 시간이 나면 포커판을 벌였습니다. 포커판에서 딜러-‘고스톱판의 오야’-가 된 사람이 자기 앞에 ‘buck knife’를 놓아두는 게 이 사내들의 ‘미풍양속’이었습니다.

딜러는 수없이 많고 복잡한 포커 게임 중에서 이번에는 어떤 게임을 할지, 판돈은 얼마를 어떻게 걸지 등등을 결정합니다. 서부의 거친 사내(카우보이)들이 큰 사슴의 멱을 따고 가죽을 도려내는 데 쓰는 이 칼을 포커판 딜러 앞에 놓아둔 것은 딜러의 결정에 이의를 제기하지 말라는 뜻이었습니다. “내 결정에 잔말 마라. 수틀리면 이 buck 맛을 보여줄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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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루먼은 포커를 정말 좋아했습니다. 그리고 ‘꾼’이었지요. 2차대전을 함께 승리로 이끈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이 퇴임하고 미주리를 방문했습니다. 처칠도 자기 나름 포커를 잘한다고 생각했던지 트루먼이 친구들과 벌여놓은 포커판에 끼어들었다가 털린 적도 있다고 합니다. 입 걸쭉하고, 거친 농담을 즐기던 트루먼은 “처칠이 똑똑하긴 하지. 영국식으로는 말이야. 하지만 미주리에서는 절대 아니지”라고 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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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드 캔필은 1차대전 참전 장교였던 트루먼의 동네 후배이자 군대 졸병으로 프랑스 전선에서 함께 싸웠습니다. 먼저 뭘 해보자는 생각은 하지 못해도 트루먼이 시키는 것은 잘했던 캔필은 트루먼이 대통령이 되자 백악관 안에서 자리를 하나 얻으려 했지만 고향 부근 마을 연방보안관으로 그치고 말지요. 캔필은 어느 날 미주리주 옆 오하이오주의 소년원에서 ‘The buck stops here.’가 새겨진 명판을 보고는 소년원장에게 새로 하나 똑같이 새겨서 자기 보스에게 보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캔필 대신 백악관에 들어간 명판은 포커테이블이 아니라 트루먼의 집무실에 자리 잡고 대통령의 결정의 순간들을 지켜봅니다. 2차대전 종식 후 대대적으로 벌어진 파업 개입, 흑인민권법 제정 등 국내 문제와, 마셜플랜 및 베를린 공수, 이스라엘 승인, 한국전쟁 참전 등 세계사의 흐름을 바꾸는 트루먼의 결정을 이 명패는 다 지켜봤습니다. 이 문구를 “결정은 내가 한다”라고 번역하는 게 옳다는 내 생각은 여기서 비롯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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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루먼의 외동딸 마거릿 트루먼(1924~2008)은 성악가가 꿈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 앞에서 피아노 치는 걸 망설이지는 않았으나 솜씨는 그저 그랬던 아버지처럼 노래 실력이 그다지 뛰어나지는 않았던 마거릿은 성악가의 꿈을 포기한 후 아버지와 어머니의 전기 집필에 시간을 많이 쏟았습니다. 1990년 10월 마거릿은 아버지의 일기와 편지, 메모, 가족과 비서에게 구술한 글을 모아 책을 냈습니다. 제목은 ‘Where the buck stops’, 내용은 ‘대통령론’이었습니다. 미국 역사에서 좋은 대통령은 누구였고 나쁜 대통령은 누구였으며 그렇게 분류된 이유가 적혀 있습니다.

트루먼이 생각한 훌륭한 대통령은 ‘결정’을 잘 내리는 사람이었지요. 트루먼은 “대통령은 스스로 작심할 수 있고 이견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며, “무엇을 이루려는 대통령은 결단을 내려야 하며,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대통령은 분란의 원인을 제공하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또 대통령은 “자신의 역할을 법의 관리자로 한정해서는 안 된다. 대통령은 지도력을 제공해야 하며 프로그램이 있어야 하고 이를 실행할 배짱과 능력이 있어야 한다”라고 남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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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준에 따라 트루먼은 훌륭한 대통령은 물론 “없었어도 우리가 그럭저럭 해나갔을 대통령”의 이름을 실명으로 밝히면서 그 이유를 적었습니다. 자기 후임자인 아이젠하워도 “애처럼 귀엽게 보이는 미소나 지을 뿐 아무 결정도 하지 않은” 나쁜 대통령으로 찍었습니다. 트루먼은 “미국 역사에는 좋은 대통령보다 나쁜 대통령이 훨씬 더 많았다”면서도 그들을 실명으로 거론한 게 부담이었던 듯 딸에게 “우리 부부가 죽은 후에 책으로 내라”고 부탁한 사실이 이 책 서문에 나옵니다.

마거릿 트루먼이 편집한 'Where the buck stops' 표지.
마거릿 트루먼이 편집한 'Where the buck stops' 표지.

이 책이 나온 1990년은 존슨, 닉슨, 포드, 카터 등 20세기 후반의 대통령 대부분에게 미국 사람들이 크게 실망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트루먼식으로 말하자면 “결정할 때 결정을 내리지 못했거나, 결정을 내리고도 반대 세력의 목소리에 겁을 먹고 결정을 스스로 뒤집은” 대통령들입니다. 이런 대통령들에게 질린 미국 사람들은 때맞춰 나온 이 책을 베스트셀러로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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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거릿 트루먼의 이 책의 내용은 한국일보 주필과 사장을 지낸 언론인 김창열(1934~2006)이 1991년에 쓴 칼럼 ‘사슴이 머무는 곳(Where the buck stops)’을 통해 한국에도 알려졌습니다. 1991년은 6공의 첫 대통령이었던 노태우 정권 때였지요. ‘물태우’라는 별칭이 말해주듯 노태우는 결정을 내리지 않고 우물쭈물한 적이 많았습니다. 군부독재가 끝나고 민주화된 한국은 총체적으로 혼란 덩어리였습니다. 김창열은 그때 한국이 처한 위기를 걱정하면서 “위기는 나라를 위해 이로울 수가 있다. 어떤 대통령은 위기가 아니면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결단은 당장에 내려져야 한다. 그 결단은 뒤로 미룰 수 없기 때문에”라는 트루먼의 말을 빌려 노태우 정권이 정신을 차려주기를 촉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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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트루먼에게 대통령직과 결정은 분리할 수 없는 단어였습니다. 이는 트루먼의 어록을 모은 책 ‘트루먼의 위트와 지혜(The wit and wisdom of Harry Truman)’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책에서 ‘결정(Decision)을 검색하면 46개 문장이 뜹니다. 반면 ’책임(Responsibility)’이 들어간 것은 18개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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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buck stops here.’를 “책임은 내가 진다”보다 “결정은 내가 한다”라고 하는 게 좋다는 내 생각은 이런 것만이 이유가 아닙니다. 정치인들은 걸핏하면 “모든 책임을 지겠다”고 하는데 도대체 그들이 생각하는 책임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있나요? 자기 말대로 ‘책임진’ 정치인을 본 적 있습니까? 간혹 책임을 진다며 자리에서 물러나는 사람이 있긴 했다. 지난 대선에서 본 것처럼 약속을 어기고 실정을 거듭하면 정권을 내놓고 물러나기도 합니다. 이런 것들이 그들이 말하는 ‘책임’이라고 할 수는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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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들의 정치와 정책의 실패로 막장에 몰린 숱한 사람의 삶은 그런 것으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지난 정권의 소득주도성장, 최저임금 인상, 부동산거래 억제 같은 정책으로 삶이 망가진 사람들의 일상이 정권이 바뀐 후에 원상회복되었나요? 이른 시일 내에 그럴 가능성이 있기는 한가요? 그렇다고 대답할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상황이 이러하니 정치인들은 “책임은 내가 진다”보다 “결정은 내가 내린다”고 하는 것이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 모두에게 편할 것입니다. 물론 “결정을 내리기 전에 충분히 들어라. 내린 결정이 생각대로 결과를 가져오지 않을 때는 또 들어라. 그리고 다시 결정해라. 듣는 것이 설득이다”라는 ‘결정의 명수’ 트루먼의 말을 명심하는 게 좋겠지요.

/메타버스인문경영연구원 이사장, 한국일보 경제부국장, 신문윤리위원 역임

*출처= 자유칼럼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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