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히스토리] 국제정치와 리더십...제국을 이루면서도 자비를 잃지 않았던 고대 페르시아의 키루스 대왕
[WIKI 히스토리] 국제정치와 리더십...제국을 이루면서도 자비를 잃지 않았던 고대 페르시아의 키루스 대왕
  • 최석진 기자
  • 승인 2023.02.13 05:41
  • 수정 2023.02.26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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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을 이룩하고도 피정복민을 관용으로 다스렸던 키루수 대왕 [사진 = ATI]
제국을 이룩하고도 피정복민을 관용으로 다스렸던 키루스 대왕 [사진 = ATI]

시대착오적인 전쟁광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우유부단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역사의 시계바퀴를 거꾸로 되돌리려는 시진핑 중국 주석... 

오늘날 세계 지도자들의 모습은 인류에 실망감만 안겨주고 있다.

성공하는 지도자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많은 정치전문가들은 인류 역사상 '롤모델' 리더 중 대표적인 인물로 고대 페르시아 제국을 건설한 키루스 대왕(Cyrus the Great; 성경의 고레스)를 꼽는다.

키루스 대왕은 인류 역사상 가장 광활한 제국을 건설한 인물 중 한 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관대함과 자비심을 잃지 않은 영민한 지도자였다.

키루스 대왕은 정복 전쟁을 벌여 광대한 영토를 점령한 뒤 자비로운 통치를 베풀면서 채 15년도 되지 않아 인구가 얼마 되지 않던 반(半) 유목 부족을 고대 세계 최초의 초강대국인 페르시아 제국으로 변화시켰다. 다음은 ‘히스토리 채널’이 소개하는 키루스 대왕의 삶과 업적이다. 

키루스 대왕의 부상(浮上)

‘아케메네스(Achaemenid) 페르시아’라고도 불리는, 최초의 페르시아 제국을 건립한 키루스 대왕은 B.C. 약 600년경 반(半) 유목 종족이던 ‘파사르가디아(Pasargadae) 부족’에서 태어났다. 파사르가디아는 지금의 이란 남부, 페르세폴리스(Persepolis) 동북쪽에 있던 고대 도시로 고대 페르시아 제국 초창기의 수도였으며, 지금도 제국의 창설자 키루스 대왕 영묘 등의 유적이 남아 있다. 파사르가디아 부족은 양과 염소, 소를 목축하며 살았다.

키루스 2세라고 불리기도 하는 키루스 대왕의 어린 시절이나 가계와 관련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역사가들은 그가 아케메네스 왕족으로 태어났거나 결혼을 통해 이 왕족과 인연을 맺었을 것으로 짐작할 뿐이다.

B.C. 558년 오늘날 이란 지역 대부분을 지배하던 ‘메디아 제국(Median Empire)’의 분봉왕 자리에 오른 키루스 대왕은 5년 뒤 다른 페르시아 부족들을 통합한 후 메디아 왕 아스티아게스(Astyages)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메디아를 배반한 장군의 도움을 받아 파사르가디아 전투에서 아스티아게스 군대를 물리치고 B.C. 550년 메디아 엑바타나(Ecbatana)를 정복하는 데 성공했다. 엑바타나는 고대 메디아 왕국의 수도이자 페르시아 제국의 중심 도시로, 지금의 이란 하마단에 해당한다.

한때는 피정복민에 불과하던 페르시아인들이 이제는 정복자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하지만 키루스 대왕은 복수보다는 관대함과 절제를 선택했다.

키루스 대왕은 아스티아게스가 제왕 자격으로 명예롭게 물러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고, 엑바타나를 그의 여름 수도로 그대로 남겨두었으며, 메디아 귀족들에게는 자신의 궁정과 군대에서 높은 지위를 부여했다. 

그러나 키루스 대왕의 자비에도 어느 정도 한계가 있었다. 그는 아스티아게스의 사위와 손주들을 자신의 권력에 대한 위협으로 여겨 모두 죽여버렸던 것이다.

페르시아 유물이란이 영국박물관으로부터 대여받아 39년만에 재전시할 예정인 페르시안 유물 `키루스 실린더'. [사진=연합뉴스]
페르시아 유물이란이 영국박물관으로부터 대여받아 39년만에 재전시할 예정인 페르시안 유물 `키루스 실린더'. [사진=연합뉴스]

리디아를 정복하고 제국을 확장한 키루스 대왕

키루스 대왕의 부상(浮上)은 리디아(Lydia)의 왕이던 크로이소스(Croesus : B.C. 560-546)를 좌불안석으로 만들었다. 리디아는 현재 튀르키예 영토의 서쪽 반을 차지하던 왕국이었다.

이웃 국가 페르시아의 세력이 점차 강해지자 대책을 고심하던 크로이소스는 그리스의 델포이 신전으로 사람을 보내 신탁(神託)을 물었다.

“크로이소스가 전쟁을 일으키면 그는 대제국이 무너질 것이다.”

신탁의 영매(靈媒)는 이런 답을 보내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신의 메시지에 고무된 크로이소스는 B.C. 547년 리디아와 페르시아의 국경 역할을 하던 할리스 강(Halys River) 너머로 대규모 군대를 진격시켜 페르시아를 공격했다. 

지루한 전쟁이 이어지던 끝에 키루스 대왕은 겨울의 추위를 뚫고 퇴각하는 리디아 군대를 리디아의 수도 사르디스(Sardis)까지 추격함으로써 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전세를 결정 지은 ‘팀브라 전투(Battle of Thymbra)’를 통해 수적 열세를 감지한 메디아의 하르파구스 장군은 페르시아로 망명을 결심했다. 

이제는 페르시아의 장군이 된 하르파구스는 기병을 짐 싣는 낙타에 태워 전선에 배치했다. 그러자 돌진하던 리디아의 기마들은 낙타 부대의 악취 때문에 전투를 포기하고 전장에서 도망쳐 버렸다. 성안으로 후퇴한 리디아군은 페르시아군의 공성작전으로 결국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대제국이 멸망한다는 델포이 신전의 신탁(神託)이 틀리지 않았음이 입증되었다. 다만 멸망의 대상이 키루스 대왕이 아니라 크로이소소 자신이었을 뿐이었다.

키루스 대왕은 리디아 사람들에게도 메디아의 경우처럼 유화 정책을 베풀었다. 그는 사르디스의 보물에 손을 대지 않고 크로이소스에게도 왕으로서 대접했다. 그는 속국일지라도 그 지방의 문화를 존중하고, 그 나라의 종교와 법률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도록 해주어서 새로운 신민(臣民)의 충섬심을 얻어낼 수 있었다.

“키루스 대왕은 그가 정복한 지역의 기존 행정 구조를 빠르게 동화시키거나 접수할 수 있었고, 속국의 지역 엘리트들의 권리를 그대로 유지해주기도 했다.”

캘리포니아 대학 역사학과의 존 리 교수는 이렇게 평가했다.

키루스 대왕 [사진 = ATI]
키루스 대왕 [사진 = ATI]

하지만 키루스 대왕은 언제나 관용만을 베풀지는 않았다. 리디아의 재정을 담당하던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는 대왕은 그들을 처형하고 그 추종자들을 노예로 만들어버렸다. 여기에다 대왕의 부하 하르파구스 장군은 리디아를 정복한 후 이오니아의 그리스 정착촌을 잔인하게 포위·공격해서 많은 사람들이 도시 전체를 버리고 이탈리아로 탈출하지 않을 수 없도록 하기도 했다.

“고대나 지금이나 키루스 대왕과 관련해서는 자비로운 대왕이라는 잘못된 신화가 넘쳐난다.”

존 리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키루스 대왕이 피정복지의 종교와 관습에 관대했고, 토착 엘리트들을 중용한 것은 분명 사실이지만 전해오는 당대 문서를 기록한 설형문자 돌판에 의하면 키루스 대왕도 다른 제왕들처럼 피정복지에서 부와 노예에 의한 노동력을 착취하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바빌론까지 무너뜨린 페르시아 제국

페르시아는 제국으로 성장하면서 군사력도 강대해졌다. 키루스 대왕은 말에 올라탄 채 활을 능란하게 쏠 수 있는 최정예 기마부대와 바퀴에 칼날을 단 병거부대를 창설했다.

“키루스 대왕의 군대는 사기도 높고 훈련도 잘 되어있었으며, 대왕 자신도 정신적 지도자로 군림했다.”

존 리 교수는 이렇게 평가했다.

“그는 심지어는 겨울에도 어떤 적들보다 군대를 빨리 기동시킬 수 있었다.”

키루스 대왕은 페르시아 제국의 동쪽마저 점령한 이후 이제 서부 아시아 지역에서는 마지막 남은 강대국으로 눈길을 돌렸다. 바로 신바빌로니아 제국(Neo-Babylonian Empire)이었다.

B.C. 539년, 페르시아군은 부유하고 비옥한 제국 신바빌로니아를 침공해 티그리스강의 전략 도시 오피스(Opis)를 빼앗았다. 그리고 그로부터 일주일 뒤, 페르시아군은 고대 최대의 도시 바빌론의 성벽에 도달하여 무혈 입성하는 데 성공했다.

1879년에 발굴된, 바빌론 설형 문자가 새겨진, 점토 원통인 키루스 실린더(Cyrus Cylinder)에 따르면, 페르시아 왕은 “기쁨과 환희 속에 평화롭게” 바빌론에 의기양양하게 입성했다고 한다.

바빌론을 함락시킨 직후 키루스 대왕은 그보다 50년 전 이스라엘을 침공해 예루살렘 성전을 무너뜨린 네부카드네자르 2세(Nebuchadnezzar II/ 한글 성경에서는 ‘느부갓네살 2세’ : 605-562 B.C.)에게 강제로 끌려와 있던 유대인(히브리 민족)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내 주었다.

바빌론 유수(幽囚)에서 해방된 상당수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의 영적 고향 예루살렘으로 귀향했다. 구약성경 ‘이사야서’에서 선지자 이사야는 키루스 대왕을 “열국을 그 앞에 굴복시키고 왕들의 갑옷을 벗기기 위해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고 상찬하고 있다.

신바빌로니아 제국을 정복한 페르시아 제국은 서쪽으로는 에게해에서부터 동쪽으로는 인더스강까지 세력을 넓혀나갔다. 키루스 대왕은 고대 최대의 제국 중 하나를 건설했으며, ‘키루스 실린더’에 기록된 것처럼 스스로를 “나는 우주의 제왕 키루스”라고 불렀다.

B.C. 529년에 사망한 키루스 대왕의 죽음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어떤 기록에 의하면 그는 제국 동방에서 벌어진 전투에 참여했다가 입은 상처 때문에 목숨을 잃었다고도 한다.

키루스 대왕의 시신은 파사르가디아로 운구돼 황금관에 안치된 후 해가 뜨는 쪽을 향해 조성된 거대한 석묘에서 영면에 들었다.

페르시아 제국의 왕위는 키루스 대왕의 아들 캄비세스 2세(Cambyses II)가 이어받았고, 캄비세스 2세는 정복 활동을 계속 펼쳐 제국의 영역을 또 하나의 고대 문명 제국 이집트까지 펼쳐나갔다.

페르시아 제국은 이후에도 B.C. 330년까지 번영을 누리다가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정복되었다.

키루스는 삶과 죽음, 제국의 흥망성쇠에도 깊은 통찰력이 있었던 인물이었다. 

파사르가드에 있는 키루스 대왕의 무덤.
파사르가드에 있는 키루스 대왕의 무덤.

알렉산더 대왕이 페르시아를 점령했을 때 다리우스왕이 세운 페르세폴리스를 불태웠다. 그리고 키루스 대왕의 무덤을 깨기 위해 파사르가드까지 달려왔다. 그러나 무덤 앞에서 알렉산더 대왕은 경건히 멈춰셨다. 

무덤 비문에 "나 키루스는 한때 세계를 지배했지만 언젠가는 이 땅이 다른 왕에 의해 점령될 것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점령자여, 그대도 언젠가는 누군가에 의해 점령당할 것이니 내 무덤을 건드리지 말아다오"라고 쓰여 있었던 것이다.

말에서 내린 알렉산더 대왕은 자신이 입고 있던 대왕의 옷을 벗어 키루스 대왕의 무덤에 덮어줬다. 대제국을 이뤘던 알렉산더 역시 수년 후 암살 당하며 역사의 무대 뒤로 사라질 수 밖에 없었다. 

[위키리크스한국 = 최석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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