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 여성 총리가 나온 영국을 부러워하며 [정숭호 칼럼]
40대 여성 총리가 나온 영국을 부러워하며 [정숭호 칼럼]
  • 정숭호 칼럼
  • 승인 2022.09.07 06:25
  • 수정 2022.09.07 06:2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트러스 영국 총리가 6일 총리 관저 앞에서 취임 후 첫 연설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트러스 영국 총리가 6일 총리 관저 앞에서 취임 후 첫 연설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5일 영국 새 총리에 올해 47세인 엘리자베스 트러스 외교장관이 확정됐다. 마가릿 대처(재임 1979~1990)와 테레사 메이(재임 2016~2019)에 이어 영국의 세 번째 여성 총리다.

트러스 총리의 등장을 보면서 40대 여성이(도) 총리가 되는 영국이 부러웠다. 정치 이외의 분야에서도 40대를 ‘애’로 낮춰 보는 ‘어른’이 많은 대한민국이어서 그렇다. 40대인데다 여성이라면 더 낮춰 보는 사람이 많은 한국이다. 

대학생(옥스퍼드)이던 20세에 정당에 가입, 정치활동을 시작한 트러스는 2010년 총선에서 당선돼 의원이 됐으며 총리가 되기 이전 8년간은 4개 부처 각료로 정치 경력을 쌓았다. 환경장관, 법무장관, 국제통상장관, 외교장관을 지냈다. 

한국에서 여자든 남자든 이처럼 젊은 나이에, 이처럼 길면서도 화려한 경력을 쌓은 후 국가의 최고 결정권자가 되는 날이 오기는 올까? 현재 여·야 양당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국의 젊은 정치인, 혹은 정치지망생 가운데 트러스처럼 정치·행정 경험을 쌓다가 때가 되면 나라의 지도자가 될 수 있는 사람이 있기나 할까?

그런 자질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을 잘 이끌고 키워낼 기성 정치인이 눈에 띄지 않으니, 뿌리를 내리기도 전에 말라비틀어질 가능성이 훨씬 크겠지? 이런 생각에 영국이 더더욱 부러워졌다.  

영국에서는, 당연히 그렇겠지만, 트러스가 젊다거나 여성이라는 점은 큰 화제가 아니다. “이 어려운 시기에 총리를 잘 해낼 수 있을까?”가 영국 사람들 관심사다. 특히 “대처 총리처럼 나라를 이끌어 가겠다”며 대처의 옷차림, 대처의 머리 모양에 대처처럼 각진 네모 핸드백을 들고 다니며 대처처럼 강인한 모습을 보여주려는 그의 발언이 지켜질 것인가를 주목하고 있다. 

영국 공영방송 BBC는 트러스의 총리 확정 직후 “그는 어떤 총리가 될 것인가”라는 제목의 평론에서 트러스와 대처를 비교하며 “그도 절대 선회하지 않는 여성이 될 수 있을까?”라고 물었다. ‘선회(旋回)하지 않는 여성-a Lady not for Turning’은 1979년에 총리가 된 대처가 그 이듬해 의회 연설에서 했던 말이다. 

취임한 해 150만 명이던 영국의 실업자는 경제를 살리고 실업률을 낮추겠다는 공약이 무색하게 대처가 이 연설을 하던 무렵에는 200만 명으로 오히려 크게 늘어났다. 야당은 물론 여당까지 대처에게 정책 기조-작은 정부, 국·공영 기업 민영화, 규제 완화를 통한 기업활동 지원, 강성노조에 대한 엄격한 대책, 법인세 인하 등등 자유주의 시장경제적 정책-를 바꾸라고 아우성치기 시작했다. 거의 온 영국이 대처에게 불평을 털어놓고, 물러나라고 요구할 때였다. 

이 때 대처의 반응이 “나는 선회하지 않을 것입니다”였다. 이듬해 실업자는 300만 명으로 급증했으나 여전히 대처는 눈 한번 깜빡임 없이 자신의 정책을 ‘대차게’ 밀어붙여 기어코 영국 경제를 영국병(높은 실업률, 잦은 파업, 높은 물가 등등)에서 벗어나게 했다. 1945년 2차세계대전에서 승리한 영국의 경제는 계속 내리막인데 패전국 독일의 경제는 승승장구하던, 30년 넘은 모순적 상황을 ‘대처리즘’이라는 이름이 붙은 정책과 소신으로 바로잡는 데 성공했다.

BBC가 “트러스도 선회하지 않는 여성(여총리)가 될 것인가?”라고 물은 것은 트러스가 맞은 상황이 엄중하기 때문이다. 당선 직후 대처의 취임 발언과 흡사한 “감세와 성장을 위한 담대한 구상을 내놓겠다”는 야심을 밝혔지만 당장 영국 경제를 뒤흔들고, 국민을 불안케 하는 에너지 가격 급등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수급 불안정으로 다음 달 영국의 에너지 가격은 표준가구 기준으로 1년 전보다 2.8배 비싼 연 3,549파운드(약 555만원)에 이를 전망이다. 내년 1월에는 요금 상한선이 연 5,000파운드(약 783만 원), 4월에는 연 6,000파운드(약 939만 원)를 넘길 수도 있다. 

에너지 가격이 이 정도면 ‘살인적’이다. 물가가 치솟게 된다. 경제가 돌아갈 수 없다. 기업은 기업대로 난관을 맞게 되며 겨울을 앞둔 가계는 찰스 디킨스의 소설 ‘크리스마스 캐럴’에서 스크루지가 한 덩어리의 석탄을 아끼고 촛불에 언 손가락을 녹이던 19세기 비슷한 상황이 될 것이다. 

만에 하나 에너지 가격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그의 담대한 구상도 웃음거리가 된다. 중국 및 러시아와, 브렉시트로 인한 EU와의 관계 재설정 등등의 문제에서도 동력을 얻지 못하게 된다. “대처를 닮은 것은 패션 뿐”이라는 경멸을 피할 수 없다.

“대처는 그녀는 어정쩡하게 중간에 서 있는 사람들을 경멸했다. ‘길 중간에 서 있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양쪽에서 오는 자동차에 치일 위험이 있으니까요.’ 대처는 행동하는 사람이었다. 자문위원과 동료들에게 ‘내게 무엇을 할 것인지 말하지 마십시오.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를 말해 주시오’라고 말하곤 했다.” 영국사를 전공한 박지향 서울대 명예교수는 2007년에 쓴 대처 일대기 『중간은 없다-마가릿 대처의 생애와 정치』 (기파랑)에서 대처의 생각과 행동을 이렇게 정리했다. 

‘젊은 여성 총리’의 성공을 바라는 마음에서 그가 진실로 대처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한국의 미래를 책임지겠다는 ‘야망’을 품은 사람도 이런 마음가짐이면 좋겠다. 어정쩡하다가는 자신만 망치는 게 아니라 이 나라를 망칠 것이니까.
/한국일보 경제 부국장, 신문윤리위원 역임, (현) 메타버스 인문경영연구원장

wiki@wikileaks-kr.org


  • 서울특별시 마포구 마포대로 127, 1001호 (공덕동, 풍림빌딩)
  • 대표전화 : 02-702-2677
  • 팩스 : 02-702-1677
  • 청소년보호책임자 : 소정원
  • 법인명 : 위키리크스한국 주식회사
  • 제호 : 위키리크스한국
  • 등록번호 : 서울 아 04701
  • 등록일 : 2013-07-18
  • 발행일 : 2013-07-18
  • 발행인 : 박정규
  • 편집인 : 박찬흥
  • 위키리크스한국은 자체 기사윤리 심의 전문위원제를 운영합니다.
  • 기사윤리 심의 : 박지훈 변호사
  • 위키리크스한국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위키리크스한국. All rights reserved.
  • [위키리크스한국 보도원칙] 본 매체는 독자와 취재원 등 뉴스 이용자의 권리 보장을 위해 반론이나 정정보도, 추후보도를 요청할 수 있는 창구를 열어두고 있음을 알립니다.
    고충처리 : 02-702-2677 | 메일 : laputa813@wikileaks-kr.org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