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숭호 칼럼] 조나던 스위프트의 역지사지와 토론수업
[정숭호 칼럼] 조나던 스위프트의 역지사지와 토론수업
  • 정숭호 칼럼
  • 승인 2022.12.21 07:51
  • 수정 2022.12.21 0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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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나단 스위프트. /위키피디아
조나던 스위프트. /위키피디아

정치꾼들의 이전투구, 내로남불, 말 뒤집기, 민생 외면, 내 돈과 내 가족 먼저 등등 더럽고 추한 꼴을 더 보지 않으려면 그들의 뇌를 수술해야 한다는 조나던 스위프트(1667~1745)의 독설은 그의 풍자소설 『걸리버 여행기』 3부 ‘하늘을 나는 섬의 나라’에 나온다. 소설 속에서 이 나라의 한 교수가 걸리버에게 해준 ‘정치꾼 버르장머리 고치기 처방’은 다음과 같다.

“정당들이 서로 격렬한 싸움을 할 때 각 정당에서 백 명의 지도자를 뽑아 머리 크기가 비슷한 사람끼리 짝을 짓게 한다. 그런 다음 외과 의사들에게 이들의 뇌가 거의 절반으로 나누어지도록 머리를 자르게 한다. 다음엔 잘라낸 머리를 반대편 정당 사람의 절반 남은 머리에 붙인다. 이렇게 하면 두 개의 뇌가 하나의 두개골 속에서 논쟁을 벌이고, 곧 서로 이해하게 돼 세상을 다스리고 감독하기 위해 태어났다고 생각하는 정치가들의 머리에서 국민이 오매불망 바라는 조화로운 사고와 중용이 생겨난다. 각 정당을 이끄는 지도자들의 두뇌의 양이나 질의 차이는 완전히 무시해도 좋다.”

걸리버에 따르면 이 교수는 위험천만한 뇌수술을 해야만 정치꾼들의 개싸움 버릇을 고칠 수 있다고는 믿지 않았다. 그의 원래 생각은 ‘반대에 찬성하기’였다. ‘반대에 찬성하기’는 “국가의 최고회의에 참석하는 상원의원은 자신의 의견을 발표하거나 변호한 후에 정반대의 방향으로 투표토록 하는 것”이다. 교수는 “이렇게 하면 국회는 반드시 국민에게 이로운 방향으로 움직일 것”이라고 확신했다. 

나는 『걸리버 여행기』에서 이 부분을 읽고는 스위프트 선생도 역지사지가 어렵고 어렵다는 것을 일찍부터 아셨음을 바로 간파했다. ‘역지사지’는, 우리 모두 알다시피, “반대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입장을 바꿔서도 생각해 보라”라는 것인데, 스위프트 선생은 이러한 자발적 역지사지는 실천이 잘 안된다는 걸 깨닫고 ‘반대에 찬성하기’를 대안으로 제시한 것이다. 하지만 이 역시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는 아예 뇌수술로 정치꾼들의 뇌를 섞어버리는 게 역지사지를 위한 최고의 방법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는 게 내 생각이다.  

걸리버 여행기 (초기 출판본)
걸리버 여행기 초본 /위키피디아

‘반대에 찬성하기’나 ‘뇌를 섞는 것’ 둘 다 억지로 역지사지를 시키는 것이니 ‘억지사지’라고 이름해도 무방할 것이다. 어쨌든, 정치꾼들에게 뇌수술로라도 역지사지를 시키려던 스위프트 선생의 시도는 무위로 끝났다. 성공했다면 영국의 의회정치를 본떴다는 세계만방의 정치가 지금 우리가 매일 보다시피 정치꾼들에 의해 이처럼 엉망진창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니까.

그런데 선생의 시도가 꼭 실패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도 없지 않다. 그가 300년 전에 제안한  ‘억지사지’가 ‘토론수업’이라는 형태로 영국을 비롯 유럽 서쪽 나라와 미국에서 뿌리를 내린 것 같아서다. (나는 면밀한 조사 끝에 작금 서구에서 시행되는 토론수업과 선생의 제안이 직접적인 인과로 연결됐는지는 찾아내지는 못했으나 스위프트의 시대가 지난 후에야 토론수업이 영국의 각급 학교에 도입됐음은 확인할 수 있었다.)

토론수업은 한 주제를 두고 학생들이 편을 나누어 내 생각이 옳으니 네 생각이 옳으니 토론하는 수업이다. 어느 편이 되는가는 평소의 소신이나 신념과는 상관없다. 감세가 평소의 신념인 학생이 증세를 주장해야 하는 편에 들어가게 되면 자신의 믿음과는 상관없이 증세가 왜 바람직한가를 주장하고 상대편을 설득해야 한다. 설득을 잘할수록 점수도 높게 받고 장학금 받아 대학도 가게 되겠지. 사고로 숨진 사람을 국가가 애도해야 하는가, 그때 국가는 어떤 책임을 져야 하는가라는 답이 뻔한 주제에 대해서도 이런 식으로 편을 나누어 토론은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토론수업을 하다 보면 학생은 자기 생각만 옳다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다름’과 ‘틀림’을 구별할 줄 알게 되고, 생각의 다양성을 받아들이며, 양보와 배려의 정신을 익히게 되는 것도 토론수업의 장점이라고 한다. 이렇게 배운 학생들이 많을수록 더 성숙한 사회가 될 것이다.  

나는 이런 장점 외에 토론수업을 하게 되면 말을 천천히, 한 번 더 생각한 후에 하는 것을 배우는 것도 큰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한때 권위 있는 기관에 의해 ‘세계의 지식인 100명’에 선정되기도 한 영국 출신 역사학자 토니 주트(1948~2010)는 회고록 『기억의 집』에서 “나는 고등학교 때 말을 잘해 토론에 자주 나섰는데, 언제나 가장 부담스러웠던 상대는, 눌변이지만, 대답하기 전에 뒤로 물러나 한 번 더 생각하고 답변에 나서는 상대였다”라고 말했다.   

프랑스 철학자인 베르나르 앙리 레비(1948~ )의 미국 여행기 『아메리칸 버티고』에도 비슷한 말이 나온다. 미국 대통령 선거 토론을 지켜보는 그에게 한 미국인이 “토론을 잘하면(말을 잘하면) 아무래도 서정적이 되고 자기 말에 도취하게 되죠. 그래서 앞으로의 유세 과정에서 감당 못 할 말을 내뱉게 됩니다. 토론을 잘하는 건 권할 일이 아닙니다라고 말했다”는 대목이 이 책에 있다. 

꼭 해야 할 일이 없는 아침에는 종편의 뉴스쇼를 보게 되는데 생각 없이 말하는 자, 말꼬리만 잡는 주제에 자기가 말을 지독히도 잘한다고 생각하는 자, 상대방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나는 당신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다 알아”라는 표정으로 자기 말을 늘어놓는 자, 질문과 답변의 유형을 정리해 놓은 듯 앵무새처럼 같은 말을 늘어놓는 자들만 눈에 띈다. 

이런 자들 때문에 사회 곳곳에서 악다구니 소리가 그치지 않고, 목청 큰 자가 더 많이 가져가는 괴이한 풍조가 용인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내가 300년 전에 뇌수술로라도 정치인들을 역지사지시키려던 스위프트 선생을 존경할 수 밖에. 하지만 지금 당장 한국 교육에 토론수업을 본격적으로 도입하라고 할 생각은 없다. 목소리만 큰 자들이 교탁을 점령한 학교가 너무나 많다고 보기 때문이다.

/정숭호 메타버스인문경영연구원장, 전 한국일보 부국장, 전 신문윤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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