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백악관 X파일(141) 부시 행정부 출범과 함께 한반도에 몰려오는 ‘먹구름’ … 파월 장관의 대북발언 취소소동  
청와대-백악관 X파일(141) 부시 행정부 출범과 함께 한반도에 몰려오는 ‘먹구름’ … 파월 장관의 대북발언 취소소동  
  • 유 진 기자
  • 승인 2023.04.09 07:15
  • 수정 2023.04.09 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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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고(故) 김대중 대통령이 백악관을 방문, 부시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고 있다. [청와대 사진기자단]
2001년 3월 고(故) 김대중 대통령이 백악관을 방문, 부시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고 있다. 회담 전만 해도 두 사람은 웃었지만, 정상회담 뒤 김대중 대통령 표정은 굳어져버렸다. [청와대 사진기자단] 

2001년 2월, 미국 정권이 민주당에서 공화당으로 바뀌었다. 정권이 북한에 대해 강경한 입장이던 정당으로 교체되면서 한반도에 ‘먹구름’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김대중 정부로서는 어떻게든 햇볕정책을 지속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해야 했다.

조지 W 부시 제43대 미국 대통령의 임기가 2001년 2월 시작됐다. 부시 대통령이 공식 취임하자마자 청와대와 외무부, 주한미대사관은 한미정상회담을 위해 총체적으로 노력했다.

부시 행정부는 그러나 한미간 현안을 검토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입장이었다. 특히 북한문제에 대해서는 전 정부의 공과 실을 낱낱이 확인하겠다는 심산이었다.

2001년 2월 23일 부시 대통령은 캠프 데이비드에서 토니 블레어 영국 수상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취임 후 첫 정상회담이었다. 백악관은 3월 2일 준이치로 고이즈미 일본 총리와, 7일 김대중 대통령과의 정상회담도 계획하고 있었다.

고이즈미 총리는 그러나 이날 일본 중의원 대정부 질문에 참석할 예정이었던 터여서 그 일정을 변경하고 싶어했다. 백악관과 미 국무부는 일본의 편의를 고려해 한국과의 정상회담 일정을 연기하자고 요청했다.

우리 측은 그러나 ‘일본 사정 때문에 연기되는 것이니, 일본 정상회담 일정을 한미정상회담 뒤 다른 날로 변경하는 것이 순리’라고 설득했다.

결국 한미 정상회담은 3월에 예정대로 진행됐다. 김 대통령은 부시-블레어 회담 이후 백악관을 방문한 최초의 아시아 국가원수로 기록됐다.

정상회담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난감한 문제가 불쑥 생겨나기도 했다. 외국 원수가 백악관을 방문하면 블레어하우스에서 머무는데, 기간은 관례적으로 최장 3일이었다.

하지만 한국 정부는 하루를 더 연장해달라고 했다. 백악관은 처음에는 예외를 만들 수 없다며 난색을 표했다가 슬그머니 일정연장을 받아들였다.

주미한국대사관 직원들은 블레어하우스에서 김대통령이 부시 행정부의 새 내각 각료들을 만날 수 있도록 시간을 마련했다.  

블레어하우스에서 무리하게 일정을 하루 연기해달라고 요청한 것은 새 각료들을 만나기 위한 것이었다. 각료들을 블레어하우스에서 만나는 것은 ‘국빈’ 자격이라는 상징성이 크기 때문이었다.  

한-미 정치 40년 비사를 엮는 청와대-백악관 X파일. [위키리크스한국]
한-미 정치 40년 비사를 엮는 청와대-백악관 X파일. [위키리크스한국]

20~30분이라는 길지 않은 시간 동안 김 대통령은 새 부시 내각의 주요 각료들을 차례로 접견했다.

콜린 파월 국무장관,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 폴 오닐 재무장관, 존 애쉬크로포트 법무장관, 앤 베너먼 농무장관, 도널드 에반스 상공장관, 노만 미네타 교통장관, 토미 톰슨 보건장관, 그리고 로버트 조엘릭 미 무역대표부 등 미국을 이끌어갈 각료들을 모두 만났다.

김대중-부시 정상회담이 열리기 하루 전인 3월 6일. 콜린 파월 국무장관은 워싱턴 프레스클럽에서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상원 인준청문회에서 분명히 밝힌 바 있는데, 우리는 클린턴 대통령과 행정부가 이룩한 성과를 그대로 이어받아 북한과의 관계 개선을 계속할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이 발언은 백악관과 새 행정부를 뒤흔들어놓았다.

딕 체니 부통령과 도널드 럼스펠드 국방장관 등 부시의 이른바 네오콘(신보수주의) 외교안보팀이 즉각 반발하고 나섰다.

파월 장관은 7일 김대중-부시 정상회담이 열리는 도중 백악관에 모인 기자들 앞에서 자신의 전날 발언을 철회해야 했다. 파월의 이 발언 철회는 대북 정책에 있어 김대중 정부와 부시 정부의 불협화음을 암시하는 신호탄이었다.

대북정책에 대한 이견은 2001년 3월 7일 백악관 오찬 석상에서도, 오찬이 끝난 후 백악관 대통령 집무실에서 가진 짧은 기자회견장에서도 나타났다. 

백악관 집무실에서 부시 대통령은 ‘회의감(skepticism)’이라는 단어를 두번이나 사용했다.

2000년 뉴욕에서 클린턴 대통령과 가진 정상회담과 2001년 워싱턴에서 부시 대통령과 가진 정상회담의 분위기는 완전히 달랐다. [청와대 사진기자단]
2000년 뉴욕에서 클린턴 대통령과 가진 정상회담과 2001년 워싱턴에서 부시 대통령과 가진 정상회담의 분위기는 완전히 달랐다. [청와대 사진기자단]

그는 “나는 북한 지도자에 대해 약간의 회의감을 갖고 있다”라고 말했다. 그는 또 “김대중 대통령은 자신의 비전을 설명할 때 매우 솔직담백했다. 그리고 나 역시 우리 두 나라가 알고 있는 자유를 누리지 않는 나라로부터 합의를 도출해낼 수 있을지 김 대통령의 비전을 지지하는 문제에 솔직히 회의를 느낀다”고 했다.

한-미 양국은 1972년 탄도요격미사일조약(ABM Treaty)과 국가미사일방어 정책을 놓고 마지막 순간까지 서로 간에 미묘한 견해차 때문에 힘든 과정을 겪어야 했다.

특히 김대중- 부시 정상회담의 공동성명에 나오는 용어와 자구를 놓고 서로 합의를 도출하는데 많은 시간과 신경전을 벌였다.

부시 대통령이 김 대통령을 ‘이 사람(this man)’이라고 지칭한 대목이 한국에서 즉각 부정적 반향을 일으켰다. (“우선 나는 북한에 먼저 손을 내민 이 사람(this man)의 리더십을 아주 높이 평가한다고 말하고 싶다.”)

좋게 봐도 ‘예의 없는’ 표현이었고, 나쁘게 보면 비하하는 것을 뜻하는 말이라고 한국 언론이 비판했다. 

이는 햇볕정책에 대한 미국 정가와 언론의 미묘한 기류와도 연관되어 있었다. 워싱턴포스트의 짐 호글랜드 칼럼니스트는 그의 칼럼에서 김대중 대통령을 현세상의 성자( earthly saint)’라고 표현했는데 이는 여러 각도로 해석될 수 있는 표현이었다.
 
2000년 뉴욕에서 클린턴 대통령과 가진 정상회담과 2001년 워싱턴에서 부시 대통령과 가진 정상회담의 분위기는 완전히 달랐다. 김 대통령이 만난 이 두명의 정치인은 배경, 성장과정, 그동안 걸어온 정치이력, 전문분야, 정치비전, 그리고 개성이 근원적으로 달랐기 때문이기도 했다.

[기획취재팀= 최석진, 유 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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