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프리즘] 인류 역사상 최고 천재 과학자가 안고 있었던 남모를 고통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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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석진 기자
  • 승인 2018.11.14 08:04
  • 수정 2019.03.17 06: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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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버트 아인슈타인, 그리고 정신병동에서 일생을 보낸 숨겨진 막내아들의 사연
알버트 아인슈타인 가족. 왼쪽부터 에듀아르트, 알버트 아인슈타인, 한스 [ATI]
알버트 아인슈타인 가족. 왼쪽부터 에듀아르트, 알버트 아인슈타인, 한스 [ATI]

알버트 아인슈타인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과학자 중 한 사람이며, 그의 이름은 곧 천재를 의미한다. 역사상 최고의 천재를 꼽는다면 단연 아인슈타인이 손꼽힐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아인슈타인이라는 물리학자와 그의 업적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만 그의 아들 에두아르트 아인슈타인의 비극적 삶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조현병에 걸린, 알버트 아인슈타인의 아들 에두아르트는 정신병자 수용소에서 30년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위대한 천재였던 아버지도 아들의 조현병 문제만은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에두아르트 아인슈타인의 어린 시절

에두아르트 아인슈타인의 어머니 밀리어 매릭은 알버트 아인슈타인의 첫 번째 부인이었다. 매릭은 1896년 아인슈타인과 함께 다닌 취리히 폴리테크닉 대학 물리학과의 홍일점이었다. 아인슈타인은 매릭이 4살이나 연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 홀딱 빠져버렸다.

두 사람은 1903년 결혼을 해 리설, 한스 알버트, 그리고 에두아르트 이렇게 세 자녀를 낳았다. 이들 중 리설은 역사에서 흔적이 묘연한데 양자로 보내졌을지도 모른다는 설이 있다.

막내인 에두아르트는 1910년 7월 28일 스위스의 취리히에서 태어났다. 아인슈타인은 1914년 매릭과 이혼했지만, 아들들과는 꾸준히 서신을 주고받았다.

매릭은 훗날 너무나 유명했던 그녀의 남편이 가족보다는 과학 연구에만 지나치게 깊이 빠져있었다고 회한을 털어놓았었다. 그러나 아들인 한스 알버트는 자기와 동생이 어렸을 때 ‘아버지는 일을 제쳐두고 몇 시간씩이고 우리를 돌보아 주었지만 어머니는 집안 일로 바쁘기만 했다’고 회상했다.

어린 에두아르트는 병약한 아이로 태어나서 병치레가 잦은 탓에 가족 여행을 함께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아인슈타인은 가족과 떨어진 뒤에도 막내아들에 대해서 절망적인 심정을 떨쳐버리지 못했다.

아인슈타인과 첫째부인 밀리어 매릭. [ATI]
아인슈타인과 첫째부인 밀리어 매릭. [ATI]

그는 1917년 동료에게 보낸 편지에서, ‘내 막내아들 때문에 스트레스가 너무 심하다. 그 아이는 제대로 된 성인으로 자라지 못할 것이다’고 토로했다.

아인슈타인의 과학적 성취와 대비되는 개인적 삶에 대해서는 여러 말들이 많지만, 어쨌든 그는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내팽개치지는 않았다. 그는 아픈 아들을 위해 병원비를 지불하고 여러 요양소를 찾아다니는 등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다하겠다고 약속했다.

▷에두아르트의 정신병세가 깊어지다

아인슈타인은 막내가 어렸을 때부터 ‘테테’(tete)라고 부르며 사랑을 베풀었다. tete는 귀엽다는 프랑스어 ‘petit’에서 따온 말이었다. 

막내아들 에두아르트는 자라면서 시와 피아노 연주, 그리고 마지막에는 정신의학(정신분석학)에 관심을 보였다.

에두아르트는 지그문트 프로이트를 좋아해서, 아버지의 뒤를 따라 취리히대학에 등록했다. 하지만 그는 과학자가 아니라 정신분석학자가 되고자 했다.

이때쯤 그의 아버지 아인슈타인은 이미 많은 성취를 이룬 뛰어난 인물이 되어있었다.

정신분석의 자기분석 과정 중 하나에서 그는 ‘그처럼 위대한 아버지를 둔 사실이 가끔씩 나를 힘들게 했다. 위대한 인물의 아들은 너무 작아질 수 밖에 없기 때문이었다’고 썼다.

정신분석학자를 지망하던 아들은 같은 대학에서 연상의 연인을 사랑함으로써 아버지의 전철을 밟았고, 이 사랑 역시 불운하게 막을 내렸다.

에두아르트의 정신 건강에 심각한 문제가 생긴 것은 이 시기 즈음으로 보인다.

그는 상태가 더욱 나빠져 1930년에는 자살 시도까지 감행하게 된다. 그는 조현병이라는 진단을 받았지만 당시의 열악한 치료 환경 때문에 병세가 완화되지 않았고 결국은 언어기능과 인지능력까지 영향을 받게 되었다.

1917년 찍은 알버트 아인슈타인의 두 아들의 사진. 에듀아르트와 한스 알버트. [ATI]
1917년 찍은 알버트 아인슈타인의 두 아들의 사진. 에듀아르트와 한스 알버트. [ATI]

▷에두아르트를 남겨두고 미국으로 이민을 떠난 가족

아인슈타인은 에두아르트의 병이 모계에서 옮겨진 유전병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이러한 과학적인 판단도 그의 슬픔과 죄책감을 덜어주지는 못했다.

아인슈타인의 두 번째 부인인 엘사는 ‘이러한 슬픔이 아인슈타인의 삶을 갉아먹었다’고 말한 바가 있다.

곧이어 에두아르트를 둘러싼 환경의 변화가 천재 물리학자를 더욱 곤혹스럽게 했다.

1930년대 초반에 유럽에서는 나치가 득세를 했고, 1933년 히틀러가 정권을 잡은 후에는 아이슈타인은 1914년부터 일을 하던 베를린의 프러시안 과학원으로 되돌아갈 수가 없었다.

아인슈타인은 인류 역사상 가장 뛰어난 과학자 중의 한 사람이었을지 모르지만 그는 유태인이었다. 그가 유태인이라는 사실은 그의 조국이 그를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했고, 결국 1933년 미국으로 도피하도록 만들었다.

아인슈타인은 막내 아들이 아버지와 형제가 있는 미국으로 합류하기를 희망했지만, 나빠지기만 하는 에두아르트의 정신 건강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아인슈타인은 이민을 떠나기 전 요양소를 찾아 마지막으로 아들을 보았다. 이후 부자간에는 지속적으로 편지 교환이 이뤄졌고,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돈을 계속 보내기도 했지만 이 부자간의 만남은 다시는 이뤄지지 못했다.

에두아르트는 여생을 스위스의 요양소에서 보내다가, 55살이 되던 1965년 10월, 뇌졸중으로 사망, 취리히의 횡거베르크 묘지에 묻혔다. 그는 취리히 대학의 부르크휠츨리 정신의학클리닉에서 30년 이상의 생애를 보내야만 했다.

알버트 아인슈타인. [연합뉴스]
알버트 아인슈타인. [연합뉴스]

 

 

6677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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