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프리즘] '정치 연륜은 무시하는 것인가?' 뿔난 독일의 노인 정치가들
[WIKI 프리즘] '정치 연륜은 무시하는 것인가?' 뿔난 독일의 노인 정치가들
  • 최석진 기자
  • 승인 2018.12.19 07:20
  • 수정 2018.12.19 15: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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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겔라 메르켈 총리(오른쪽)와 새로 당선된 아네그렛 크램프 카렌바우어 기민당 총재. [AP=연합뉴스]
앙겔라 메르켈 총리(오른쪽)와 새로 당선된 아네그렛 크램프 카렌바우어 기민당 대표. [AP=연합뉴스]

독일을 기업가와 노동자, 여와 야, 여성과 남성 간에 사회적 합의가 가장 잘 이루어진 선진화된 나라로 부러워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독일 사회의 실상은 알려진 바와 많이 다르다는 평가들이 나오고 있다. 

최근 실시된 독일 집권당 대표 선거에서 앙겔라 메르켈의 뒤를 이어 또 다시 비교적 젊은 여성 정치인이 선출되었다. 이를 두고 독일 주류 정치계를 이루고 있는 나이 많은 보수적 남성 정치인들 사이에서 불만이 심각하게 표출되고 있다.

독일의 집권 보수당인 기독교민주연합당(기민당)을 오랫동안 지배해왔던 노익장들은 비교적 젊은 정치인이, 그것도 여성 정치인이 당을 이끌게 되었다는 사실에 불만을 나타내고 있다. 이 노회한 정치가들은, 앙겔라 메르켈이 18년 동안 당을 이끈 이후 자신들처럼 나이든 남성 정치인이 새 대표를 할 것으로 확신했었다.

그러나 56세 밖에 안 된 아네그레트 크람프-카렌바워(Annegret Kramp-Karrenbauer)가 기민당의 새 대표로 선출되자 당의 노년층들은 큰 충격을 감추지 못하고, 상당수는 당을 떠났으며, 추가로 수백 명이 탈당하겠다는 위협을 하고 있는 실정이다. 기민당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 정계를 지배하고 있는 가장 영향력 있는 정당이다.

“기민당에는 남자가 새 대표로 뽑히기를 바랐던 괴팍한(?) 노인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프리드리히 메르츠가 선출될 것으로 굳게 믿었습니다.”

베를린 자유대학의 정치학자인 게로 노이게바우어는 이번 기민당 대표 선거를 이렇게 평했다. 나아가, 그는 기민당에는 또 다시 여성이 자신들을 이끌게 되었다는 사실에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는 정치인들이 적지 않다는 사실도 들려주었다.

“그들은 또 다른 여성이 자신들이 내세운 후보를 누를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노이게바우어는 이렇게 말했다.

“이 사람들은 지금 충격을 받고, 비통함과 실망감에 휩싸여 있습니다. 그들은 여자가 자신들을 대표한다는 사실이 그냥 싫은 겁니다. 그런 허탈감을 극복하지 못할 겁니다. 지금의 쓰라린 충격은 한참 갈 것으로 보입니다.”

일부 남성 지도자들은 성차별이 노골적으로 묻어나는 발언들을 통해 ‘AKK’를 거역하는 쿠데타를 감행하겠다는 험악한 말도 서슴지 않고 있다. 새 여성 대표인 아네그레트 크람프-카렌바워는 ‘AKK’라는 별칭으로 더 알려져 있는데, 그녀의 까다로운 이름을 부르기 위해서는 독일 사람들일지라도 혀를 8번이나 꼬부려서 음절들을 발음해야하는 어려움을 겪기 때문이다.

‘AKK’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녀가 2021년에 앙겔라 메르켈을 이어받아 총리 선거에서 자동적으로 보수당의 후보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정상적으로 판단한다면 ‘AKK’가 기민당의 후보가 되는 것이 마땅하다.

일부 정치인들은 기존의 전통을 깨고, 프리드리히 메르츠가 독일의 다음 총리가 되어야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부유한 사업가인 메르츠(63)는 999명의 대의원들이 참여한 당 대표 선거에서 ‘AKK’에게 아슬아슬하게 패배하였다. 더욱 불길한 조짐은, 기민당 내의 일부 음모론자들이 당의 조직책들을 비난하고 나섰다는 점이다.

이들 음모론자들은 메르츠가 대의원들을 향해 연설을 할 때 당의 조직책들이 마이크를 조작해서 방해하였고, 고온의 조명을 비추도록 해서 땀을 흘리는 모습을 연출하도록 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당의 관리들은 이러한 일방적 주장들을 모두 부인하고 있다.

기민당의 등록 당원 숫자는 전국적으로 426,000명에 이른다. 독일 16개 주들 가운데 가장 커다란 2개의 주, 바덴뷔르템베르크 주와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에 속하는 당원들 중 수십 명이 메르츠의 패배 소식을 듣고 당을 떠난 것으로 보도되고 있다. 다른 주들에서는 탈당 당원의 숫자가 비교적 적은 것으로 보도되고 있다.

앙겔라 메르켈이 직접 지정한 후계자인 크람프-카렌바워는, 인기 있는 TV 토크쇼에 출연해서, 정치적 리더십과 관련하여 자신을 비방한 두 명의 영향력 있는 남성을 향해 재기 발랄한 답변을 함으로써 한 주 내내 언론의 헤드라인들을 장식했다.

이 토크쇼의 사회자 안느 윌이 이렇게 물었다.

“크람프-카렌바워의 승리를 이 국가에서 나이든 백인 남성의 우위가 종식되는 현상으로 받아들여도 될까요?”

그러자 참여 패널 중의 한 명인, 볼프강 쿠비키가 이렇게 답했다. 쿠비키는 중도주의 성향의 자유민주당 대표이다. 그는 그녀가 ‘순전히 감상에만 호소하는 화려한 말잔치’를 벌였다고 크람프-카렌바워를 직접 걸고넘어졌다.

또 다른 패널인, 은퇴한 사업가이자 언론인인 가보르 스타인가트는 크람프-카렌바워가 자를란트 주지사로서 한심할 정도로 한 일이 거의 없다고 비난을 퍼부었다. 그는, 메르켈이나 메르츠 중 어느 누구도 자그마한 주 정부라도 이끌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간과한 채, 크람프-카렌바워가 총리가 될 자격이 있는지 의문이라는 소리를 한 것이다.

크람프-카렌바워는 이 두 남자의 발언을 무례하고 무식한 소치라고 일축했다.

“당신들이 여기서 지껄이는 허튼소리는 내가 살면서 무수히 겪어야했던 일들 중 하나다.”

그녀는 이렇게 서두를 꺼냈다.

“이런 식의 여성혐오증에 걸린 쓰레기 같은 소리를 수도 없이 들었다.”

“내가 정치판에서 함께 일했던 남자들은, ‘애들을 셋이나 키우면서 정치가 가능한 가요?’라는 질문을 절대로 받지 않는다. 이런 소리들은 여자들을 불쌍한 종족으로 취급하는 발언들이다. 인구의 절반이 여성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크람프-카렌바워의 성취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소리는 잦아들지 않고 있다. 그런 분위기를 반영이라도 하듯이, 반대자들을 유혹하는 토크쇼의 시청률이 한 주 내내 상위를 유지하고 있다. 수요일 방영된 또 다른 토크쇼에서 극단적 보수주의 출판업자인 헬무트 마르크보르트는 크람프-카렌바워의 경륜을 무시하면서 그녀가 좌파라는 험한 말도 했다.

“이런 말 하기는 미안하지만, 그 여자는 일생동안 회사에서 직접 일을 해본 적이 없어요. 사업가로서의 경력이 전무해요.”

마르크보르트(82)는 이렇게 말했다.

“그녀는 그냥 정치인으로만 먹고 살았어요.”

정치학자인 게로 노이게바우어는, 자신들을 이끄는 자리에 또 다른 여성이 선출된 데에 대해 깊은 좌절감을 느끼는 남자들이 꽤 많다고 말했다. 독일 보수 정당의 과거 세 지도자 중 두 명이 지난 44년 세월 동안 43년이나 자리에 역임한, 독일 정치의 안정성과 지속성을 감안하면 이들 나이든 정치인들은 자신들의 생애에 다시는 남성 지도자를 볼 수 없을 지도 모른다. 크람프-카렌바워의 나이는 56살이다.

독일의 유리천장은 두껍기로 악명이 높다. 독일 최상의 30개 기업 중 여성 대표는 한 명도 없다. 그리고 이사회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은 8%에 불과하다. 남녀 간 임금 격차도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해 독일이 높다. 슈피겔 잡지가 최근에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독일 여성들은 남성들에 비해 21%나 적게 벌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앙겔라 메르켈은, 이전 동독 공산주의 치하의 개신교 목사의 딸로 태어나, 서독 출신 남성 로마가톨릭 신도들이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하는 당에서 활동 중이다. 그녀의 믿기지 않는 성공 신화를 반영하듯이, 그녀는 2000년에 대표가 되었을 때 처음에는 과도기적 인물 정도로 받아들여졌다. 보수주의자들이 정치자금 추문 등의 악재로 반대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 발생한 역사의 우연 정도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극단적일 정도로 투명하고 신선한 메르켈의 이미지는 그녀의 초지일관하는 고집과 어울려 나이 많은 남성 지도자들이 망쳐놓은 상처를 회복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녀는 그 이후 메르츠뿐만 아니라 십여 명의 다른 남성 경쟁자들을 뛰어넘고, 2005년 총리가 되면서 기민당을 집권당으로 이끌었다.

당 대표의 취임 첫 주는 보통의 경우라면 덕담이 넘쳐나는 허니문 기간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크람프-카렌바워를 두고는 당 내부의 논란이 멈추지를 않고 있다. 이런 와중에 메르츠를 지지하던 가장 강력한 정치 지도자 중 한 사람이 패배를 받아들일 것을 권고하고 나서 눈길을 끌고 있다.

재무부장관을 오랫동안 역임했던 볼프강 쇼이블레(76) 독일연방 하원의장은 빌트 지와의 회견에서, “재선거를 열망하거나 복수전을 치러야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사태를 잘 못 판단하고 있는 겁니다. 그것은 민주주의가 아닙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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