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프리즘] 30년 전 12월 동유럽 사회주의가 사상누각처럼 무너지던 날의 풍경
[WIKI 프리즘] 30년 전 12월 동유럽 사회주의가 사상누각처럼 무너지던 날의 풍경
  • 최석진 기자
  • 승인 2019.12.31 07:07
  • 수정 2019.12.31 07: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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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장벽에 올라가 환호하는 동서독 시민-안드레아스 스프링거의 `베를린 장벽의 붕괴' 사진집 [연합뉴스 자료사진]
베를린 장벽에 올라가 환호하는 동서독 시민-안드레아스 스프링거의 `베를린 장벽의 붕괴' 사진집 [연합뉴스 자료사진]

1989년 12월, 동유럽에서 소비에트 제국이 붕괴하던 날 BBC의 외신부장인 존 심슨은 불과 6주 사이에 급물살을 타고 있던 민중 혁명 현장의 목소리를 보도하기 위해 현지로 급파되었다. 그는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던 현장과 체코슬로바키아의 평화적인 정권이양, 그리고 루마니아 공산정권 우두머리가 처형되는 순간을 생생하게 전할 수 있었다. 다음은 BBC가 30일(현지 시간) 돌아본 그날의 모습이다.

1989년 10월 1일 크리스마스까지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것을 내다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체코슬로바키아가 자유를 찾고 루마니아의 독재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의 실각도 마찬가지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비에트 동맹이 영원할 것으로 믿었다. 하지만 사실상 그들은 사상누각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러시아의 개입으로 간신히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1953년 동독에서 있었던 봉기는 잔인하게 진압되었다. 1956년 헝가리에서 자유를 향한 몸부림이 시작되었을 때 소련의 탱크가 이들의 혁명을 무참하게 짓밟았다.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의 정치 운동가 알렉산더 두브체크가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를 도입하고자 했을 때도 소련 당국은 탱크를 보냈다.

하지만 1989년 10월이 될 쯤 해서는 권위적인 정부들의 위협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동독에서 시위대들이 거리로 나서자 소비에트 연방의 개혁적인 지도자 마하일 고르바초프는 동독 정권을 향해 무력을 사용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그래도 소비에트 동맹의 붕괴는 급작스럽게 찾아왔다.

소비에트 제국의 몰락

1989년 11월 9일 밤 동독 정부의 대변인 귄터 샤보브스키는 일상적인 언론 브리핑을 하고 있었다.

집권 공산당 정치국은 국민들에게 서독 행 비자를 발급함으로써 정치적 긴장 상태를 완화하고자했다. 하지만 그것도 관료적 절차를 통해 아주 더디게 진행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귄터 샤보브스키에게 이런 움직임을 알려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그는 기자회견 실에 급하게 달려오느라 이러한 계획을 담은 서류를 가져오지 못했다.

누군가 새로운 조치가 언제부터 시작되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허둥대다가 그만 ‘즉시’라고 답하고 말았다.

그때는 이미 동독 사람들도 모두 시청하고 있던 서독의 TV 방송들은 이 뉴스를 베를린 장벽이 그날 밤부터 열리는 것이라고 해석해버렸다. 그러자 동독에서는 엄청난 인파가 모여들었고 장벽을 지키던 경비병들은 그들을 제지하지 않았다.

소비에트 블록의 압제를 상징하던 장벽은 동서독을 가르던 역할을 그것으로 종지부를 찍었다.

다음날 밤 필자는 장벽 위에서 춤을 추었다. 야수같이 거친 일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벌어지던 필자의 꿈에서조차 이루어지지 않았던 일이었다.

다시 찾은 광명

이웃 국가인 체코슬로바키아에서의 야당 운동은 ‘차터 77(Charter 77)’이라는 지식인 그룹이 이끌고 있었다. 그들은 잔인하게 탄압받고 있었지만 지도자 격인 극작가 바츨라프 하벨은 경제와 법제도의 세밀한 개혁을 제시하며 다가올 정권의 접수를 차분히 기다리고 있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8일이 지난 11월 17일 프라하의 바츨라프 광장에서는 시위들이 연달아 벌어졌다.

11월 19일 필자는 공항에 내리자마자 광장으로 직행했다. 그날 필자는 1968년 소련의 침공을 가슴 아프게 경험했던 나이든 세대들 대부분이 그냥 집으로 총총히 향하는 모습을 목격할 수 있었다. 하지만 1968년을 겪지 않은 젊은 세대들은 시위를 격렬하게 밀어붙이고 있었다.

다음날부터 며칠간 이어진 시위에서는 나이든 세대들도 데모에 참여했다. 그리고 24일 되자 광장은 입추의 여지가 없게 가득 찼다.

그날 밤, 1968년 이래 가택연금 상태에 있던 알렉산더 두브체크가 광장이 내려다보이는 멜란트리치 호텔에 모습을 드러냈다.

필자는 그때 바츨라프 하벨이 알렉산더 두브체크에게 인사하고 그를 수많은 인파가 내려다보이는 발코니로 안내할 때 바로 옆에 있었다. 하벨은 마치 아들이 연로한 아버지를 대하듯 두브체크에게 정중하고 부드러웠다.

광장은 민중들의 환호성으로 넘쳐났다. 처음에는 가볍게 떨리던 두브체크의 목소리는 차츰 힘을 얻고 있었다.

“빛이 이제 우리 앞에서 빛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광명을 찾은 사람답게 행동해야합니다.”

발코니 앞에 모인 사람들은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날 밤 늦게 필자는 매직 랜턴 극장에 자리 잡고 있던 ‘차터 77’ 본부에서 두브체크와 하벨, 그리고 다른 멤버들이 무대에 오른 모습을 보았다. 그때 그들의 대변인 잔 어반이 샴페인 한 병을 들고 서둘러 입장하면서 공산 정권이 물러났다고 알려줬다. 혁명이 끝난 것이다. 그것도 아주 평화롭게 혁명이 성취된 것이었다.

루마니아의 독재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와 김일성
루마니아의 독재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와 김일성

연료가 떨어진 루마니아의 독재자

마지막으로 깨져야할 아성은 언제나처럼 루마니아였다. 하지만 그 아성이 깨지기까지는 한 달이 더 지나야 했다.

공산 정권의 지도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는 지난 몇 년 동안 점점 더 전체주의적 통치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비밀경찰인 ‘세쿠리타테(Securitate)’는 포악하기 그지없었다.

12월 중순 경에는 루마니아에서 탄압받고 있던 헝가리 어를 사용하는 소수민족들이 티미쇼아라 거리에서 시위를 벌였다.

하지만 아무도 티미쇼아라의 시위 사태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차우셰스쿠에게 알려주지 못하고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12월 21일 부쿠레슈티에서 관제데모를 꾀하고 있었다.

‘세쿠리타테’는 관제데모 대의 숫자를 과장하기 위해 공장 노동자들을 실어 날랐는데, 그들 중 일부가 야유를 보내기 시작했다. 차우셰스쿠는 연설을 하다말고 어안이 벙벙한 채 얼어붙고 말았다. 그의 생에 야유를 받아보기는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차우셰스쿠의 아성이 느닷없이 무너지는 모습을 TV 생방송으로 지켜보았다.

그날 밤부터 혁명의 불길이 본격적으로 당겨지기 시작했다. 다음 날인 12월 22일에는 차우셰스쿠와 그의 부인 엘레나는 시위 군중들이 거처로 몰려들자 헬리콥터에 올라타서 북쪽으로 피신하고자했다.

그러나 헬기 조종사는 연료가 떨어졌다며 곧바로 착륙해버렸다. 차우셰스쿠의 호위병들은 모두 사라져버린 상태였다. 남편보다 더 성격이 거칠었던 엘레나는 권총을 빼어들고 지나가는 차를 강제로 세웠다. 하지만 결국 두 사람은 붙잡혔다.

크리스마스 날 필자와 촬영팀은 차우셰스쿠의 버려진 아파트를 찍을 수 있었는데, 아파트를 관리하던 사람이 독재자의 연필이라며 기념품을 건네주었다.

그날 밤 필자가 방송국에서 막 방송을 시작하려고 하는데 누군가가 차우셰스쿠 대통령 내외가 총살당했다는 소식을 알려주었다.

그래서 필자는 방송 원고를 재빨리 고쳐 쓰고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차우셰스쿠 본인의 펜으로 그의 부고를 알린 셈이 되었던 것이다.

 

dtpchoi@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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