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히스토리] 이스라엘 통일왕국 최고 통치자 '다윗'의 역사성...텔 덴 석비의 의미는
[WIKI 히스토리] 이스라엘 통일왕국 최고 통치자 '다윗'의 역사성...텔 덴 석비의 의미는
  • 최석진 기자
  • 승인 2020.06.30 06:47
  • 수정 2020.07.01 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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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 왕과 솔로몬 성전 (윌셔대로 회당 벽화), Hugo Ballin, 1929 (미국)다윗왕 (월셔대로 벽화, 미국)
다윗 왕과 솔로몬 성전 (윌셔대로 회당 벽화), Hugo Ballin, 1929 (미국)

성서고고학을 전문으로 다루는 웹사이트 ‘바이블아키알러지리포트(biblearchaeologyreport.com)’는 역사적 실재성과 관련해서 논란이 많은 다윗이 실제로 이스라엘을 다스렸던 통일왕국의 지도자였다는 사실을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밝히고 있다. 다음은 이 기사의 전문이다.

다윗은 구약 성서에 등장하는 인물 중 그 역사성을 놓고 가장 격렬한 논쟁이 되고 있는 대상 중 하나이다.

일부 학자들은 다윗이 신화적인 인물이라고 주장하며, 만일 실존했었다면 한 부족의 족장 정도에 불과한 인물이었을 것이며, 이스라엘 왕조의 역사에 등장하는 왕은 분명히 아니라고 확신한다.

예를 들어, 셰필드 대학의 필립 데이비스 같은 교수는 ‘다윗 왕이 (영국 역사에 등장하는 신화적 인물) 아더 왕에 견줄 정도의 역사성만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는 전문가들은 나 말고도 많다.’고 말하고 있다. 또, 고고학자 이스라엘 핀켈스타인은 ‘성경에 묘사된 다윗 왕과 솔로몬 왕의 통일왕국 통치권은 한 지역에 국한되어있었으며, 기껏해야 부족을 통일시킨 통합부족이었을 것이다. …… 다윗 왕의 왕국은 손에 막대기를 들고, 소리를 지르며, 침을 뱉거나 욕을 하던 500명 정도의 통합된 부족민에 불과했을 것이다.’라고 말한 것으로 인용되고 있다.

회의론자들의 이러한 주장은 성경이 묘사하고 있는 다윗 왕국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다윗이 비천한 목동에서 강건한 군 사령관이 되고, 유대와 온 이스라엘을 통치하는 왕에 오르는 성경 속의 과정은 손에 땀을 쥐게 한다.

성경 속의 다윗은 처음에는 7년 동안 헤브론에서 유대 종족만을 다스리는 왕으로 등장하다가, 이스라엘의 장로들에 의해 전체 왕국을 통치하는 왕의 자리에 오른다. 그는 이후 33년을 더 왕의 자리에 머무르게 된다. 그 기간 동안 그는 주변 국가들을 정복하고 제국의 영토를 넓혔다.

다윗이 예루살렘의 여부스 족속을 정복하자 두로의 왕 히람이 다윗의 왕궁을 짓기 위해 백향목과 함께 목수들과 석공들을 다윗에게 보냈다. 또, 다윗이 소바 왕 하닷에셀을 무찌르자 하맛 왕 도이가 금, 은, 청동의 선물과 함께 축하사절을 보냈다. 이 장면을 성경은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다윗 왕은 이것들도 따로 구별하여서, 이미 정복한 모든 민족에게서 가져온 것에서 따로 구별하여 둔 은금과 함께 주님께 바쳤는데, 그것들은, 그가 에돔과 모압과 암몬 사람들과 블레셋 사람들과 아말렉에게서 가져온 은금과, 르홉의 아들인 소바 왕 하닷에셀에게서 빼앗아 온 물건 가운데서, 따로 떼어놓은 은과 금이었다.’(삼하, 8:11~12, 새번역)

다윗은 통치 기간 후반기에 왕국 내 군인들의 숫자를 파악하기 위해 인구조사를 실시했다. 군인들의 숫자를 헤아리는 데는 9개월이 넘게 걸렸으며, 총 800,000명의 군인들이 등록되었다.(삼하, 24:9)

성경은 최종적으로 다윗이 오늘날 터키의 일부와 시리아, 레바논, 요르단, 그리고 이스라엘에 이르는 광활한 왕국을 조직적으로 다스렸다고 묘사하고 있다.

그렇다면 다윗 왕과 그의 왕국에 대해서는 어떤 증거들이 남아있을까?

‘다윗 왕궁(House of David)’이라는 비문이 새겨진 텔 댄 석비는 다윗의 역사성과 그의 왕조가 실존했음을 증명한다. (사진 출처 : Wikimedia Commons)
‘다윗 왕궁(House of David)’이라는 비문이 새겨진 텔 댄 석비는 다윗의 역사성과 그의 왕조가 실존했음을 증명한다. (사진 출처 : Wikimedia Commons)

텔 댄 석비/ 다윗 왕의 왕궁(Tel Dan Stele/“House of David”)

다윗 왕관 관련된 고고학적 증거를 논할 때는 반드시 ‘텔 댄 석비’부터 시작해야 한다.

1993년 이스라엘 북부의 고대 도시 댄 지역을 발굴 중이던 고고학자들이 부서진 돌조각 하나를 발견했다. 높이 32Cm, 폭 22Cm의 이 돌조각에는 아람어 비문이 새겨져있었다. 그리고 이듬해 비문을 새긴 돌조각 두 개가 더 발굴되었다.

이 돌조각들은 전문가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비문에 ‘bytdwd’ 즉, ‘Beit David’ 또는 ‘House of David’라고 새겨져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비문은 이스라엘 왕 오므리와 그의 동맹을 상대로 한 아람 왕의 승리를 기록하고 있다.(여기에 아람 왕의 정확한 이름은 나타나지 않지만 아마도 하사엘이 아닌가 한다.) 이 때 등장하는 오므리 왕의 동맹자 이름이 ‘다윗 왕궁에 사는 왕’이라고 기록되어있다. 이 비문이 기록된 시기는 B.C. 9세기로 다윗 왕 통치 시기 이후 약 200년이 경과된 때이다.

비판적인 학자들이 해석을 다르게 해보려는 시도가 있기는 하지만 대다수 학자들은 현재 ‘텔 댄 석비’의 비문이 분명이 다윗 왕을 지칭한다는 데 이론을 제기하지 않는다.

고고학자 요세프 가핑켈은 이 비문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다.

“‘다윗의 왕궁(House of David)’이라는 말은 ‘다윗 왕조’를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다윗이라고 불리던 남자가 있었으며, 그가 왕조를 소유하고 있었다고 알 수 있다. …… 이로써 다윗이 신화적인 인물이 아니라는 사실이 명백해졌다. 신화적인 패러다임이 한순간에 무너진 것이다.”

메사 비문이라고도 알려진 모압 석비(사진 출처 : Wikimedia Commons)
메사 비문이라고도 알려진 모압 석비(사진 출처 : Wikimedia Commons)

모압 비석/메사 비문(Moabite Stone/Mesha Inscription – “House of David”)

1994년 비문(碑文) 해석가 안드레 르메이르는 널리 알려진 모압 비석에는 ‘다윗 왕궁(House of David)’이라는 구절도 들어있다고 주장했다. 모압 비석에는 모압 왕 메사가 적어 넣은 비문을 포함하고 있다. 메사는 이 비문에서 이스라엘 왕을 배반한 사실을 두고 자랑스러워하고 있다.(왕하, 3장에 묘사된 장면)

이 비석은 요르단에서 발견되었는데, 요르단 사람들은 이 비석을 의도적으로 훼손하였다. 하지만 비문의 탁본은 비문이 훼손되기 전에 뜰 수 있었다.

문제가 되는 구절의 비문은 비석 부분이 훼손되어 읽기가 쉽지 않다. 31번째 줄의 결정적인 글자가 빠져있는 것이다. 하지만 르메이르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깨끗이 복원된 비문과 탁본을 조사한 후 저는 글자 ‘b’라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사상 최초로 잃어버린 글자가 ‘d’라고 추정합니다. 그 결과 ‘bt[d]wd(dw[d]tb)’ 즉, ‘House of [D]avid’라고 확신합니다.”

한편, 2019년에는 고고학자 이스라엘 핀켈스타인, 나다브 나만, 그리고 토마스 롬머가 ‘텔이비브 대학 고고학회 학술지’에 모압 비석의 31번째 줄을 분석하는 논문을 게재했다. 그들은 비석에는 두 문장을 구별하는 수직선이 그어져있으므로, ‘bet’라는 단어는 House를 나타내는 ‘beit’보다는 사람의 이름인 ‘Balak’로 읽어야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비슷한 시기에 ‘예루살렘 프랑스 연구센터’ 소속 연구자인 마이클 랭글로이스는 학술지 ‘세미티카(Semitica)’에 르메이르가 주장한 ‘House of [D]avid’ 설을 뒷받침하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그는 이 논문에서 문장 구분용 수직선 같은 것은 없으며, 줄을 구분 짓는 표시는 이후에 삽입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랭글로이스는 고해상도 컴퓨터 이미지와 컴퓨터 알고리즘 등의 첨단 분석 기법을 활용해서 수년간 연구를 했다. 최근 그는 이 비문의 고해상도 백라이트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비문 그 자체와 원래의 탁본을 여러 각도에서 서로 다른 불빛에 비추는 또 다른 첨단 기법을 동원했다.

랭글로이스는 연구 결과에서 새로운 첨단 기법을 활용한 결과 이전의 연구들에서는 무시되었던 점이 발견되었다고 주장했다. 그 결과 르메이르가 애초에 읽었던 ‘House of David’가 올바른 해석이라는 점이 밝혀졌다는 주장이다.

카르낙 위대한 신전 벽면에는 애굽 왕 시삭의 비문이 새겨져있다. 시삭은 B.C. 926년 이스라엘과 유대를 침공한 후 자신이 정복한 지역의 이름들을 기록해놓았다.(사진 출처 : Wikimedia Commons)
카르낙 위대한 신전 벽면에는 애굽 왕 시삭의 비문이 새겨져있다. 시삭은 B.C. 926년 이스라엘과 유대를 침공한 후 자신이 정복한 지역의 이름들을 기록해놓았다.(사진 출처 : Wikimedia Commons)

애굽왕 시삭의 전적비(Battle Relief of Pharoah Shishak – “Highlands of David”)

이집트 학자인 케네스 키친은 이집트에서 다윗 왕의 흔적을 입증할 근거를 세 번째로 찾아냈다.

파라오 쇼생크 1세(성경에서는 ‘시삭’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는 B.C. 926년에 팔레스타인을 침공했다. 그리고 그는 이집트로 귀환할 때 이집트 카르낙의 아문 신전 벽에 자신의 전공을 자랑하는 비문을 새기도록 명령했다. 이때 그가 정복했다고 주장하는 곳 중 하나가 ‘h(y)dbt dwt’ 즉, ‘Heights 또는 Highlands of Davit’이다.

케네스 키친은 AD 6세기 경 에티오피아의 비문에서 다윗 왕을 분명히 지칭하는 문구(그의 시편 중 하나에서)를 찾아냈다. 이 비문 안에서 다윗 왕은 ‘Davit’으로 표기되어있다. 그는 나아가 시삭 리스트에 있는 지명에서 기원한 이름들이 지리적으로 정리되어있으며, ‘Heights of Davit’이라는 지명이, 다윗이 사울의 박해를 피해 도망다녔던 지역인, 유대 땅과 네게브 사막을 지칭하는 같은 명칭의 지역에 일렬로 등장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케네스 키친은, 분명하지는 않지만, 애굽왕 시삭이 B.C. 10세기 경 유대를 침공했을 때 ‘다윗의 고지대(Heights of David)’라고 불리던 지역을 정복했다고 주장할만한 충분한 근거가 있다고 밝혔다.

고고학자 에일랏 마자르는 이 ‘거석 구조물’을 발굴한 후 이 건축물이 다윗 왕의 왕국이라고 주장했다.(사진 출처 : Wikimedia Commons)
고고학자 에일랏 마자르는 이 ‘거석 구조물’을 발굴한 후 이 건축물이 다윗 왕의 왕국이라고 주장했다.(사진 출처 : Wikimedia Commons)

다윗왕의 왕궁(King David’s Palace)

2005년 이스라엘 고고학자 에일랏 마자르 박사는 다윗 왕 궁전의 잔해를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마자르는 성경에 나오는 ‘다윗이 이 말을 듣고서 (자신의 거처에서) 요새로 내려갔다(삼하, 5:17)’는 구절에 주목했다. 그녀는 다윗이 자신의 왕궁을 요새의 북쪽, 도시의 북쪽 성벽 바깥에 건설했을 것으로 추론했다. 다윗이 예루살렘을 확장할 계획을 세웠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 추론이었다.

마자르 박사는 이 지역에서 발굴 작업을 벌이다가 그녀의 표현을 빌면 ‘거석 구조물(Large Stone Structure)’을 찾아냈다. 이 복합 건축물인 ‘거석 구조물’을 그녀는 ‘영감과 상상력 및 어마어마한 자금이 투여된 건축물’이라고 부른다.

마자르 박사는 캐틀린 케년이 이미 돌 장식품을 발굴해낸 장소 주변을 발굴하고 있었다. 케년이 오래 전에 찾아냈던 돌 장식품은 이스라엘 고고학 발굴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기둥 꼭대기 장식품이었다.

마자르는 ‘거석 구조물’ 밑에서 발견된 도자기들을 근거로 이 구조물의 연대를 B.C. 10세기 중반경인 철기시대의 초기로 추정했다. 이 시기는 성경에서 다윗 왕이 이스라엘 통일왕국을 통치하던 때와 정확히 일치한다.

구시가지 북부에서 다윗 왕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가장 커다랗고 아름다운 건축물을 발견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은 마자르가 다윗 왕 왕궁의 잔해를 발굴했다고 믿게 되었다.

물론, 성경 속의 다윗에 관한 기록들이 전설이라고 믿는 많은 비평가들은 마자르의 성취와 그녀가 믿을만한 고대 문서로 성경을 거론한 사실을 재빠르게 비판하고 나섰다.

다윗의 정부(David’s Government – Judahite Cities)

성경에 묘사된 대로 B.C. 10세기경에 왕국이 존재했다면 사람들은 그 왕국의 일반적인 정치 · 행정과 관련된 증거도 나올 것이라고 기대하게 된다. 일부 고고학자들은 몇몇 고고학 발굴지에서 바로 이러한 증거들이 나왔다고 주장한다.

히브리 대학의 요세프 가핑켈과 이스라엘 고대유물 관리청의 사르 가너는 2007년부터 2013년까지 다윗 왕 시대의 요새인 키르벳 케이야파에 대한 발굴 작업을 실시했다. 이 지역은 예루살렘에서 남서쪽으로 30Km 떨어진, 유대 왕국의 전략적 요충지 언덕 꼭대기와 팔레스타인에서 예루살렘으로 들어오는 도로 상에 위치해있다.

발굴자들은 문이 두 개가 있기 때문에 이 곳이 성경에 등장하는 ‘사아라임’(삼상, 17:52)이라고 확신하고, 도시 계획과 같은 분명한 증거들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 외에도 여러 발굴 유물들이 키르벳 케이야파가 팔레스타인의 전초기지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요새임을 나타내고 있다.

결국, 두 개의 거대 구조물이 왕궁 건축물로 확인되었다. 하나는 궁전이었으며, 나머지 하나는 창고였다. 이 도시를 건설하는 데는 약 100,000톤의 돌들이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측되며, 이러한 거대한 공사를 감독하기 위해서는 중앙집권적인 정부가 반드시 존재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일개 부족 단위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공사 규모였다.

히스기야 왕의 이 봉인인장은 원래 파피루스 문서를 봉인하는 데 사용되었다. 이 봉인인장 뒤에 문서를 묶은 끈의 흔적이 보인다.(사진 출처 : Wikimedia Commons)
히스기야 왕의 이 봉인인장은 원래 파피루스 문서를 봉인하는 데 사용되었다. 이 봉인인장 뒤에 문서를 묶은 끈의 흔적이 보인다.(사진 출처 : Wikimedia Commons)

다윗 왕가(Davidic Kings)

다윗 왕 사후, 통일 왕국의 솔로몬 왕부터 남왕국 유대의 왕들에 이르기까지 다윗 가문에서 20명의 왕들이 그를 이어받아 통치했다. 이러한 다윗 가문의 왕들과 관련된 수많은 유적들이 발굴되었다.

많은 학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솔로몬의 건축 치적으로 하솔, 므깃도, 그리고 게셀에 있는 성문(城門)을 지적하고 있다. 봉인 문양에 새겨진 비문은 웃시야, 아하스, 그리고 히스기야 등의 왕들이 실존했음을 나타내고 있다. 그런가 하면 므낫세, 여호야긴 같은 왕들은 아시리아와 바빌론의 문서에 등장한다.

이러한 발견들은 자체적으로 성경 속의 내용들을 입증할 뿐 아니라 다윗 왕가의 가계와 관련된 성경 속의 묘사와도 일치된다. 다윗이라는 이름을 지닌 왕가가 대를 이어 이스라엘과 유대를 다스렸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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