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히스토리]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인구조사와 성경 속 예수 탄생 기록
[WIKI 히스토리]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인구조사와 성경 속 예수 탄생 기록
  • 최석진 기자
  • 승인 2020.07.20 07:17
  • 수정 2020.07.20 07: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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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티칸 박물관에 있는 아우구스투스의 동상(Wikimedia Commons / Public Domain)
바티칸 박물관에 있는 아우구스투스의 동상(Wikimedia Commons / Public Domain)

성서고고학을 전문으로 다루는 웹사이트 ‘바이블아키알러지리포트(biblearchaeologyreport.com)’는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실시했던 인구조사가 예수 탄생 시의 호적조사를 언급한 신약성서 속의 기록과 일치한다는 글을 게재하고 있다. 다음은 이 글의 내용이다.

“그 때에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칙령을 내려 온 세계가 호적 등록을 하게 되었는데, 이 첫 번째 호적 등록은 구레뇨(퀴리니우스)가 시리아의 총독으로 있을 때에 시행한 것이다. 모든 사람이 호적 등록을 하러 저마다 자기 고향으로 갔다.”(누가복음 2:1-3/새번역)

성경에는 비록 단 한 번밖에 언급되지 않지만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나사렛 예수 탄생의 기록을 전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고 있다.

아우구스투스 자신은 몰랐지만, 그가 호적등록(인구조사) 칙령을 내렸을 때 그는 그보다 600년 전에 행해졌던 예언의 실행을 돕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베들레헴에서 메시아가 태어날 것이라는 ‘미가서’ 5장 2절의 예언을 말한다.

태어나서 처음 가진 이름이 가이우스 옥타비우스(Gaius Octavius)였던 아우구스투스는 줄리어스 시저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시저는 아우구스투스의 큰할아버지뻘이었다.

그리고 아우구스투스는 당시 로마의 관습대로 양부(養父)인 시저의 이름을 따서 가이우스 줄리어스 옥타비아누스가 되었다.

이후 BC 44년 시저가 사망하자 옥타비아누스와 마크 안토니(마르쿠스 안토니우스), 그리고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가 제정(帝政)으로 복귀한 로마 제2차 삼두정치의 권자에 올랐다.

옥타비아누스는 음모와 혼란으로 점철된 제2차 삼두정치 과정에서 마크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를 악티움 해전에서 제압하고 마침내 승리를 쟁취하였다.

마크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가 이집트로 탈출해 동반자살한 후 옥타비아누스는 명실상부하게 권력을 거머쥐고 황제에 등극하게 되었다.

BC27년 로마의 원로원은 ‘존경받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지닌 이름 ‘아우구스투스’를 옥타비아누스에게 부여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원수(元首) 정치’라고 알려진 독재적 공화정치를 도입해 로마를 슬기롭게 통치해서, 로마제국을 통틀어 가장 평화로운 시기였던 ‘팍스 로마나(Pax Romana)’를 구가하도록 했다.

터키 얄박 인근 비시디아 안디옥의 라틴어 비문 일부. 아우구스투스의 업적을 새긴 업적비(Res Gestae of Augustus)이다
터키 얄박 인근 비시디아 안디옥의 라틴어 비문 일부. 아우구스투스의 업적을 새긴 업적비(Res Gestae of Augustus)이다

아우구스투스의 인구조사(호적등록)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권력을 쟁취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정치적 음모와 혼란은 잘 알려져 있지만, 그의 통치 기간 중에 로마제국 전체를 통해 이뤄진 여러 차례의 인구조사와 관련해서는 알려진 바가 별로 없다.

로마 시대의 가장 뛰어난 비문(碑文) 중의 하나는 ‘아우구스투스의 업적비(Res Gestae of Augustus)’이다. 이는 아우구스투스의 업적을 기록한 비석이다. 아우구스투스는 죽으면서 자신의 묘 앞에 있는 두 개의 청동 기둥에 업적을 새기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리고 원래의 청동 비문은 남아있지 않지만 이를 본뜬 다음 4개의 복사판이 전해오고 있다.

▶ 앙카라 신전에서 발견된, 헬라어 번역이 함께 새겨진, 거의 완벽에 가까운 라틴어 비문
▶ 터키 얄박 인근 비시디아 안디옥의 라틴어 비문 일부. 이 비문은 아우구스투스에게 바쳐진 3중 홍예문의 중앙 통로 옆에 새겨져있다.
▶ 그리스 아폴로니아 아크로폴리스에서 발견된 헬라어 번역문 파편
▶ 터키 이즈미르에 있는, 아우구스투스에게 헌정된 것으로 짐작되는 신전의 벽에서 발견된 헬라어로 번역된 비문

아우구스투스는 이 비문들에 기록된 자신의 전기(傳記)를 통해 로마제국 전체에 걸쳐 몇 차례 인구조사를 실시한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5번째 집정관으로[BC29] 로마 민중들과 원로원의 명에 의해 나는 귀족들의 숫자를 늘렸다. 원로원의 명부는 세 번을 수정했다. 6번째로 집정관역을 맡았을 때[BC28]는 동료인 마르쿠스 아그리빠와 함께 인구조사를 실시했다. 이 인구조사는 41년 만에 실시되는 것이다. 이 인구조사에서는 4,063,000명의 로마 시민들이 등록되었다. 가이우스 센소리누스와 가이우스 아시니우스가 집정관일 때 나는 다시 한 번 인구조사를 실시했다.[8 BCE] 이 조사에서는 4,233,000명의 로마 시민이 등록되었다. 세 번째의 조사에서는[BC14], 이번에도 역시 집정관의 권한으로, 그리고 내 아들 티베리우스와 함께 실시했으며, 4,937,000명이 등록되었다.

앙카라 신전에서 발견된, 헬라어 번역이 함께 새겨진, 거의 완벽에 가까운 라틴어 비문(Wikimedia Commons / Public Domain)
앙카라 신전에서 발견된, 헬라어 번역이 함께 새겨진, 거의 완벽에 가까운 라틴어 비문(Wikimedia Commons / Public Domain)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또 다른 흥미로운 사건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내가 13번째 집정관을 맡고 있을 때 원로원과 기사원(equestrian order), 그리고 전 로마 시민들이 내게 ‘조국의 아버지(Father of my Country)’라는 칭호를 붙여주었다……”

유대의 역사가 요세푸스가 쓴 「유대인 고대사」에는 이 사건을 언급한 듯한 내용이 나온다.

“모든 유대인들이 (아우구스투스) 황제와 유대 왕 정부에 충성을 표시할 때 이 사람들(바리세인들)만은 그렇지 않았다. 이들 바리세인들의 숫자는 6천명이 넘었다.”

일부 학자들은 인구조사는 로마제국 전 영토에 걸쳐 실시됐을 것으로 짐작한다. 인구조사, 또는 호적등록이 있었기 때문에 황제에게 충성을 거부한 바리세인들의 숫자가 6천명이 넘는다는 요세푸스의 기록이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면 이 같은 역사적 사실들로부터 무엇을 추론할 수 있을까?

일부 학자들은 누가가 예수 탄생을 기록했을 때 실시되었던 인구조사의 정확한 날짜를 끄집어내려 노력한다. 하지만 전체적인 그림이 불완전하기 때문에 모든 주장은 추측에 불과하다.

로마 제국 전체에 걸친 인구조사를 완료하는 데는 몇 년이 걸렸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가 기원전 6년경에 태어났다면 누가는 기원전 8년에 실시된 인구조사를 염두에 두었는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들은 로마 제국에 살던 사람들이 황제를 ‘조국의 아버지(Father of my Country)’라 부르며 충성을 맹세했을 때 (성경 속의) 호적등록이 이루어졌을 가능성을 지적한다. 이는 4세기의 역사학자 오로시우스의, ‘누가가 언급한 인구조사는 제국 영토 내의 모든 국가들이 황제에 충성을 맹세하고 하나의 동일체의 일부가 된 그 사건을 말한다’는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로마제국 영토 내의 전 민중둘이 황제에 충성을 맹세한 사건이 기원전 2년경에 일어났다고 본다면 예수 탄생 시간 설정과 잘 들어맞는다.

어느 쪽이든지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명으로 실시된 성경 속의 인구조사 기록은 황제의 칙령에 의한 인구조사라는 역사적 사실과 부합된다. 또, 누가가 언급한 호적등록이 적어도 두 번은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과도 들어맞는다.

이집트에서 발견된, 로마 시대의 인구조사 칙령 문서(British Museum Library)
이집트에서 발견된, 로마 시대의 인구조사 칙령 문서(British Museum Library)

비평가들의 반박

비평가들은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예수가 탄생했을 무렵의 유대와 같은 속주들에 인구조사를 실시하거나 세금을 부과했을 가능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대신, 헤롯대왕이 자신의 권한으로 화폐를 주조하고 세금을 거뒀을 가능성을 펼치기도 한다.

하지만 ‘에이밀리우스 세쿤두스 비문’은 퀴리니우스(구레뇨) 치하에서 로마 관료들이 아파미아(Apamea)에서 실시한 인구조사를 묘사하고 있다. 도시국가 아파미아(현재의 시리아 지역)는 독자적으로 화폐를 주조했다.

서기 36년에 티베리우스 황제는 카파도키아 아르켈라우스 속주에 인구조사를 명했다. 게다가 유대 역사학자 요세푸스는 헤롯대왕의 왕국이 세 아들들로 분할되었을 때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사마리아는 아르켈라우스에 공물을 바쳤지만, 이제는 황제의 명으로 그 공물의 1/4만큼을 덜 내도 되었다. 황제는 사마리아 사람들이 반란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칙령을 내려 세금을 깎아주었던 것이다.”

이 점으로 미루어 로마 황제들은 때때로 인구조사를 실시하고, 제국 내 속주들에 부과하는 세금을 마음대로 조정했음을 알 수 있다.

다른 반박은, 로마가 성경에 묘사된 것처럼 호적등록을 실시하면서 사람들에게 고향 땅으로 돌아갈 것을 강요하지 않았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당시 로마의 속국이었던 이집트에 남아있는 인구조사 자료에 따르면 이는 일반적인 규례였던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대영박물관의 파피루스 904(서기 104년경)에는 총독 가이우스 비비우스 막시무스의 칙령이 들어있다. 이 칙령에는 ‘어떤 이유에서든지 자기 고장 밖에 사는 사람들은 인구조사를 위해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적혀있다.

마지막으로 제기되는 반박은 누가복음에는 오류가 있다는 주장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퀴리니우스(구레뇨)가 시리아에 당도해서 실시한 인구조사를 언급한 요세푸스의 기록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퀴리니우스는 아르켈라우스에 할당된 돈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시리아에 도착했는데(서기 6년경) 이로 인해 유다라는 사람이 이끄는 조세 저항 운동이 벌어지게 되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주조한 로마 시대의 은화(denarius)/Wikimedia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주조한 로마 시대의 은화(denarius)/Wikimedia

많은 비평가들은 누가가 이 두 가지 사건들을 혼동했다고 믿는다. 서기 6년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퀴리니우스(구레뇨)를 시리아로 보내면서 시작된 인구조사가 예수의 탄생보다 몇 년 먼저 시행됐다고 착각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반박들에는 두 가지 설명이 이루어지고 있다.

첫째, 누가는 서기 6년에 실시된 인구조사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사도행전 5장 37절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는 주장이다.

“그 뒤에 인구조사를 할 때에, 갈릴리 사람 유다가 일어나 백성들을 꾀어서, 자기를 뒤따라 반란을 일으키게 한 일이 있소. 그도 죽으니, 그를 따르던 사람들은 다 흩어지고 말았고.”

이 대목에 근거해서 누가가 분명히 ‘이는 퀴리니우스(구레뇨)가 시리아의 총독일 때 실시된 첫 번째 인구조사’라고 한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고도 비평가들은 퀴리니우스(구레뇨)가 실시한 더 이전의 인구조사에 대한 명확한 증거가 없다는 점을 내세운다. 하지만 이는 ‘침묵논법(argument from silence)’에 해당한다. 고고학을 함에 있어서 우리는 케네스 키친 (Kenneth Kitchen)의 격언을 잊지 말아야 한다. 바로 증거의 부재가 부재의 증명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비평에 대한 더욱 최근의 반박은 이 사건들에 대한 요세푸스의 기록에 일관성이 없다는 데 주목한 학자들에게서 나오고 있다. 요세푸스의 두 작품 「유대인 고대사」와 「유대 전쟁사」에 등장하는 이 사건들에 대한 기록은 일관성이 결여되어 있다. 학자들은 날짜를 착각한 사람은 누가가 아니라 요세푸스라고 주장한다. 아무튼 어떤 비평이든지 그에 대해서는 충분히 해명할 근거는 있다.

결론

우리가 과거로 돌아가서 역사적 증거들을 분석해보면 우리는 성경의 묘사가 아우구스투스의 명으로 실시된 인구조사와 일치함을 알 수 있다.

예수 탄생 시점을 둘러싼 로마제국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정보가 불완전하고, 누가가 언급한 호적등록을 정확하게 짚어낼 수는 없지만 성경 속의 기록은 다른 역사적 자료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인구조사를 명한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기록과 일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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