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백악관 X파일(77) 김영삼의 ‘종로 민주화작전’ 김대중 가택연금 ‘쌍끌이 효과’
청와대-백악관 X파일(77) 김영삼의 ‘종로 민주화작전’ 김대중 가택연금 ‘쌍끌이 효과’
  • 특별취재팀
  • 승인 2020.08.24 06:57
  • 수정 2020.08.24 0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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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백악관 x파일
청와대 백악관 x파일

전두환 정권은 12대 총선 날짜를 불과 한 달도 채 남지 않았을 때 기습적으로 공표했다.

그동안 총선은 3~4월께 치러졌었던 점을 감안해볼 때, 추울 때 선거를 하게 되면 여당에 유리하다는 계산이 깔려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설득력을 갖는 대목이다.

더욱이 신당은 창당한 지 불과 한 달도 못 되는 기간에 선거를 치러야 했다.

김영삼은 야당에겐 불리한 형국을 바꾸기 위해 한 가지 전략을 짜냈다.

‘정치 1번지’인 서울 종로·중구에 중량감 있는 고위급 인사를 출마시켜 ‘신민당 바람’을 불러일으키자는 구상이었다.

신민당 초대 당수인 이민우가 이 역할에 적격이라고 판단한 김영삼은 곧장 비밀리에 비행기에 몸을 싣고 부산으로 가 이민우를 만났다.

내심 전국구 비례1번을 염두에 두고 있던 이민우는 제안을 듣자마자 “고희(古稀)를 넘긴 나를 사지(死地)로 보내려는 것이냐”며 목소리를 높여 반발했다. 그러나 김영삼은 ‘정치 1번지 종로에 당의 존립(存立)이 달려 있다’는 말로 그를 설득했다.

이민우의 뒤늦은 결심으로 총선 주 전에야 합동 유세에 돌입할 수 있게 된다.

한두 석을 더 얻어내는 ‘작은 승리’에 집착하지 않고, ‘신민당 돌풍’이 전국을 강타하도록 만들어 거국적 승리를 이뤄내겠다는 ‘큰 그림’을 그려낸 것이다.

1985년 2월 1일 종로·중구 12대 총선 첫 합동연설회장인 창신초등학교에 몰린 인파(위). 2월 6일 종로·중구 12대 총선 마지막 합동연설회장인 신문로 구 서울고 교정에 들어가려는 사람들(아래). ⓒ 민청련동지회
1985년 2월 1일 종로·중구 12대 총선 첫 합동연설회장인 창신초등학교에 몰린 인파(위). 2월 6일 종로·중구 12대 총선 마지막 합동연설회장인 신문로 구 서울고 교정에 들어가려는 사람들(아래). ⓒ 민청련동지회

김영삼은 2‧12총선의 승부처를 종로‧중구로 잡았다. 종로‧중구는 유권자의 정치의식이 높을 뿐 아니라 서울의 한복판이라는 위치로 인해 매번 선거에서 관심이 집중되는 곳이었다.

2월 6일. 옛 서울고등학교 자리에서 열린 이민우의 서울 종로·중구 합동연설회는 약 10만 명의 인파가 모여 이민우와 신민당을 연호하기 시작했다.

사람이 너무 많아 자리를 잡지 못한 사람들이 고목나무에 올라가 연설을 듣는 모습까지 연출됐을 정도였다.

종로 중구의 선거열기를 더 한층 높인 것은 유세장에 몰려든 젊은 직장인들이었다.

사실 그 때만 해도 이민우 총재의 지명도는 그리 높은 편이 아니었다. 그러나 전두환정권 하에서의 정치적 억압에 짓눌려 있던 넥타이를 맨 젊은 직장인들은 전례없이 높은 관심을 보였다.

그들은 이 총재와 연사들의 강도 높은 군사 정권 비판에 박수를 치며 “이민우, 이민우!”를 연호했다.

김대중의 귀국에 이은 가택연금은 김영삼의 종로 민주화작전에 더해 ‘쌍끌이 효과’를 냈다.

한달의 유세기간으로 치러진 총선은 예측 불허의 격전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귀국 이후 김대중에 대한 가택 연금은 신당 후보들에게는 현장 유세 이상의 위력이 있었다.

신당 돌풍을 일으킨 이민우 후보와 김대중, 김영삼. [연합뉴스]
신당 돌풍을 일으킨 이민우 후보와 김대중, 김영삼. [연합뉴스]

강제로 망명의 길을 떠났지만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 목숨을 걸고 다시 귀국했다는 김대중에 대한 이야기는 호유권자들에게 많은 울림을 주었다.

신당 후보들의 연단에서는 예외 없이 김대중 이야기가 나왔다. 충청도에서도, 경상도에서도 김대중 이름을 외쳤다. 어떤 후보는 김대중을 단독으로 만나 시국을 논의했다고 과장해서 말하기도 했다.

당시 김영삼 역시 정권의 감시 때문에 운신(運身)의 폭이 넓지 못한 상황이었다.

김영삼이 선거에 끼칠 영향을 염려했던 전두환 정권은 선거가 끝날 때까지 한 달가량 그를 상도동 자택에 연금시켰다. 김대중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집회 참여를 막은 것이다.

김영삼이 이민우와 비밀리에 회동하고 부산에서 귀가한 지 얼마 안 돼 기동경찰 수백명이 집 앞으로 몰려들었다. 그는 선거가 끝날 때까지 한 달 가까이 상도동에 연금되어 버렸다.

전두환 정권은 김영삼이 전국을 누비는 것을 두려워한 것이다. 연금은 선거가 끝나고도 한 열흘쯤 뒤에나 풀렸다.

비록 연금을 당해 전국을 다니거나 대중 집회에 참석하지는 못했으나, 김영삼은 이민우의 당선을 위해 막후에서 조직관리를 비롯해 선거의 모든 것을 지휘했던 것이다.

[위키리크스한국= 특별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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