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 전쟁] 헬싱키로 가는 상트페테르부르크발 마지막 열차에서 내린 러시아 승객들
[우크라 전쟁] 헬싱키로 가는 상트페테르부르크발 마지막 열차에서 내린 러시아 승객들
  • 최석진 기자
  • 승인 2022.04.01 05:50
  • 수정 2022.04.01 0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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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객들이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헬싱키로 향하는 마지막 기차에 탑승하고 있다. [출처= 폴리티코]
승객들이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헬싱키로 향하는 마지막 기차에 탑승하고 있다. [출처= 폴리티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핀란드 헬싱키를 연결하던 열차가 우크라이나 전쟁과 관련해 운행을 중지하게 되었다.

정치 전문 매체 <폴리티코>는 지난달 말 마지막 운행 열차에서 내리는 러시아 사람들을 인터뷰한 칼럼을 게재했다. 칼럼을 기고한 윌리엄 도일(WILLIAM DOYLE)은 작가이자 프로듀서로 헬싱키를 왕래하며 생활하고 있다. 다음은 이 칼럼의 전문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 발 마지막 알레그로 열차(Allegro train)가 헬싱키 중앙역 9번 플랫폼에 도착할 때 하늘에서는 부드러운 눈송이들이 쏟아지고 있었다.

러시아를 출발해 헬싱키를 경유하는 마지막 열차였다. 러시아가 부당하게 우크라이나를 침공해 전쟁이 벌어진 지난 30여일 동안 이 노선은 자국에 실망한 러시아 사람들이 서방으로 탈출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탈출로 구실을 했다.

필자는 헬싱키 중앙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거주하며 하루에 두 번 운행하는 알레그로 열차에서 평소와는 다른 숫자의 승객들이 내린다는 소문을 들었다. 승객들은 모두 무거운 짐가방을 들고 있었다. 이들 승객들의 고국인 러시아에서는 어떤 이야기들이 오가는지가 궁금했다. 그래서 지난 3월 중순부터 녹음기를 들고 이들과 인터뷰를 시도했다.

러시아와 협약을 맺고 고속열차를 운행하던 핀란드 열차 회사는 알레그로 노선이 일요일을 기해 운행을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유럽을 연결하던 러시아의 마지막 노선이 단절된 것이다.

필자는 마지막 알레그로 열차가 약 340명의 승객을 싣고 헬싱키 역에 도착할 때 그 자리에 있었다. 승객들 중에는 여행용 케이지에 실린 4마리의 애완동물도 포함되어 있었다.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전쟁 반대 시위에 참여한 사람들 모습. [사진=AP연합뉴스]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전쟁 반대 시위에 참여한 사람들 모습. [사진=AP연합뉴스]

열차가 역에 도착하기 전에 근엄한 표정의 핀란드 국경수비대원들이 국경에서부터 열차에 올라타 러시아 승객들을 꼼꼼히 조사했다.

일부 승객들은 인터뷰를 거절했다. 하루 전에는 중년의 러시아 승객이 “내가 무슨 말을 하면, 그들이 나를 잡으러 올 겁니다”라는 알 듯 모를듯한 말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난 몇주 간 만난 많은 러시아 승객들은 플랫폼에 도착하는 순간 속내를 털어놓고 싶어했다.

많은 사람들이, 점점 폭압적으로 변해가는 러시아에서 지구상 가장 자유로운 국가 중 하나인 핀란드로 넘어서는 역사의 관문 앞에서 인터뷰에 응하며 익명을 요구했다. 승객들 중 일부는 너무 무거운 짐가방을 겨우 끌다시피 했다. 그들 대부분은 영어를 상당한 수준으로 구사할 줄 알았다.

중상류층 이상으로 보이는 승객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모두 그렇지는 않았다. 필자는 한 젊은 남자 승객으로부터는 열차표 살 돈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가치가 폭락한 루블화를 유로로 환전하기 위해 가재도구 모두와 자동차를 팔아야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거의 무일푼 상태로 핀란드에 도착했다고 했다. 그는 잠자리를 구하기 위해 헬싱키 구석구석을 찾아다녔다. 또 어떤 젊은 여성은 눈물을 훔치며 열차에서 내렸는데, 그녀에게 편의를 제공해준 여성은 러시아 내 친푸틴 성향의 그녀 가족이 그녀와 의절을 선언했다고 들려주기도 했다.

상당수 승객들은 유럽과 캐나다에 일자리나 배우자가 있었으며, 일반 러시아 국민과는 다르게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는 서류들을 지니고 있었다. 승객들 모두는 유럽연합(EU)이 인정하는 코로나 백신을 맞아야 했는데, 러시아 사람들이 주로 접종하는 스푸트니크(Sputnik) 백신은 이에 포함되지 않았다.

한 무리의 승객들은 러시아 내에서는 대부분의 상점들이 문을 열고, 은행 카드들도 국내 거래에서는 정상적으로 통용되는 등 모든 일상이 정상적으로 돌아간다고 들려주었다. 하지만 다른 많은 사람들은 제재가 시작되면서 일상이 흔들리며 충격과 불신에 휩싸인 국가의 모습을 묘사하기도 했다.

러시아와 EU의 복수 시민권을 소지한 한 러시아 여성은 1990년대 이후로 러시아에서는 구소련 시절 흔히 볼 수 있었던 길게 늘어선 소비자들의 줄은 사라졌다고 말했다.

그녀는 우크라이나 침공 이전까지 러시아의 대도시들은 번영을 누리고 있었으며, 모스크바 시민인 자신의 친구들은 한밤중에 쓸만한 식당을 찾을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프랑스 파리를 뒤떨어진 도시로 치부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러나 "침공 이후 국제 제재가 발효되면서 모든 것이 바뀌었다"고 그녀는 말했다. 그녀는 또 의약품 등의 생필품 구매를 위한 긴 줄이 점점 더 늘어나고, 맥도널드와 이케아 같은 서방 체인점들이 문을 닫자 도시에 거주하는 러시아 사람들이 충격에 휩싸였다고 들려주었다.

물론 열차를 이용해 탈출한 이들 승객들의 고단한 처지는 러시아 군대의 공격 하에서 공포를 체험하고 있는 우크라이나 국민에 비할 바는 못 된다. 그러나 이들도 푸틴 정권을 피해 탈출한 난민이 분명하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신의 IT 전문가 마리아(32)는 말했다.

“저는 많은 젊은 동료 IT 종사자들과 함께 푸틴으로부터 벗어나는 탈출을 선택했습니다. 모두가 떠나고자 합니다. 지하철, 길거리, 공항에서는 경찰들이 사람들을 검문하며 휴대폰 메시지를 들여다봅니다. 어떤 사람들은 제가 애국심이 부족하고 조국을 증오한다고 비난합니다. 그러나 저는 제 나라를 정말 사랑합니다. 다만 정부가 싫을 뿐이지요. 애국자는 정부를 비판하는 말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자녀가 나아지기를 바라며 잘못을 지적하는 어머니의 심정으로 제 조국을 비판하는 겁니다. 저는 러시아가 북한과 같이 될까봐 두렵습니다. 어제 제 어머니께서 제가 러시아로 다시 돌아올 경우를 대비해 자신의 묘비명을 알려주었습니다.”

또, 예술 감독 카리나(50)는 다음과 같이 털어놓았다.

“저는 구소련 공화국 시절에 태어났습니다. 모든 것이 그때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모스크바 곳곳에 군인들이 상주합니다. 만일 이상한 소리라도 할라치면 군인들이 제지하고 잡아갑니다. 모든 곳에서 공포와 마주하게 됩니다. 문제는 우리의 실수를 인정하지 못하며 우리가 악몽에 사로잡혀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러시아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입니다. 러시아 사람들은 비판에 민감합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비판할 수는 있어도 그 비판이 외부에서 가해지면 그것을 매우 감정적으로 받아들입니다. 실수를 인정하기 싫어하는 것이지요. 그냥 TV나 보면서 정부의 선전을 쉽게 받아들입니다. 생각하지 않는 것이 편하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구소련의 70년을 그렇게 살았는데 이제 그 심리가 다시 작동하는 것입니다. 푸틴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소수일 겁니다. 러시아 사람들은 대부분 가난하고 해외여행 경험이 없습니다. 그들은 TV 외에는 소통이 단절된 채 고립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하루 종일 일하고 지쳐 집에 돌아와 TV 앞에 앉는 것이 유일한 낙입니다. 하지만 세계인들은 모든 러시아 사람들이 푸틴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주기 바랍니다. 저는 제 나라를 사랑합니다. 러시아는 위대한 나라입니다. 저는 러시아 말을 하고 러시아 사람인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제 제 나라를 떠날 수밖에 없고 돌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81세인 불쌍한 저의 노모는 일생을 자유로운 조국을 꿈꾸며 살았습니다. 오늘 아침 역에 배웅나온 제 어머니는 제가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말로 작별을 고하며 울먹였습니다.”

지난 6일(현지시간) 러시아 모스크바 중심가에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비판하는 시위가 벌어져 경찰이 진압에 나선 가운데 한 참가자가 팔다리가 붙들린 채 연행되고 있다. [모스크바=EPA연합뉴스]
러시아 모스크바 중심가에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비판하는 시위가 벌어져 경찰이 진압에 나선 가운데 한 참가자가 팔다리가 붙들린 채 연행되고 있다. [모스크바=EPA연합뉴스]

그녀의 어머니는 “나는 이 장벽 하에서 태어났고, 이 장벽 하에서 죽을 것 같다”고 말했다고 한다.

사업가인 아나톨리(30)는 “오늘날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침공을 지지하는 여론과 그 반대의 여론으로 분열되어 있다”고 말했다.

“침공을 지지하는 여론이 다수인 것처럼 보이지만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정부의 선전으로 다수가 침공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확한 내막을 알 수는 없습니다. 제 친구들이나 제가 아는 사람들 모두는 침공을 지지하지 않습니다. 저는 국제적인 압박과 제재가 더 심화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생명공학 전문가 마리아는 친구들간의 여론을 전하며 “모두가 다 우크라이나 침공을 지지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현 정권을 지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번 침공에 모두가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런 일들이 다시 발생할 거라고는 아무도 믿지 않았지요”라고 덧붙였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정보를 차단하려는 러시아 정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해외뉴스를 듣고자 하는 사람들은 휴대폰 상의 가상사설망(VPN : virtual private network)을 통해 이를 접할 수 있다고 마리아는 들려주었다.

자신을 중산층이라고 소개한 모스크바 출신의 한 여성은 자신이 아는 모든 사람들은 우크라이나 침공 소식에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침공에 대해 아무도 우리의 의견을 묻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언급했다.

“만일 물었다면 아무도 찬성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리고 일요일 밤 9번 플랫폼에서 모든 승객들이 떠난 다음 필자의 눈에 뒤칸에서 내리는 한 키 큰 남성이 눈에 띄었다. 그는 잠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지 물었을 때 처음에는 거절했다가 이내 마음을 바꿨다.

“역사가 완전히 퇴보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털어놓았다.

“철의 장막 시절보다 더 참혹합니다. 구소련 시절보다 상황이 더 나쁩니다. 어디에다 비유를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러시아어를 조금이라도 이해한다면 바실리 로자노프(Vasili Rozanov)라는 사람에 대해 들어봤을 겁니다. 그는 구소련에 대해 ‘철의 장막’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한 사람입니다.”

그는 바실리 로자노프에 대해 거의 완벽하게언급하했다.

“100년 전인 1918년 로자노프는 러시아 역사에 철의 장막이 드리워졌다고 아픈 비명을 울렸습니다. 장내 아나운서가 공연이 끝났으니 관객들은 모피코트를 입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선언했었지요.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모피코트와 집은 모두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습니다.”

모든 것은 거짓말이었고 환상이었다. 로자노프는 러시아혁명의 뒤 끝에 『러시아혁명의 묵시록과 다른 글들』이라는 작품을 내놓으며 위와 같이 묘사했었다. 그는 그 후 얼마 있지 않아 질병과 굶주림으로 사망했다.

9번 플랫폼의 이 남성은 강력한 국제 제재가 몇 주간 더 이어진다면 “거짓말을 믿고 그 거짓말이 전국적으로 퍼진 결과 아마 일부 러시아 사람들은 이제 서방에서 들어오는 안락하고 훌륭한 물건들을 더 이상 접할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것입니고이라고 예견했다.

그는 이렇게 이어갔다.

"어쩌면, 러시아 국민은 TV에서 들려오는 정부 선전에 대한 자신들의 태도를 다시 생각해볼 날이 올 겁니다.”

이 남성은 필자가 이름과 출신지를 묻자 대답을 정중히 거절했다.

“그냥 열차의 한 남성으로 기록해주세요.”

그는 발틱해의 저녁 노을 속으로 사라지며 이렇게 말했다.

“마지막 열차의 마지막 승객”

[위키리크스한국 = 최석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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