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스토리 줌인] 카스트라토, 고음을 노래하기 위해 거세당한 이탈리아 소년들
[히스토리 줌인] 카스트라토, 고음을 노래하기 위해 거세당한 이탈리아 소년들
  • 최석진 기자
  • 승인 2023.06.11 07:00
  • 수정 2023.06.11 07: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898년의 시스티나 예배당 합창단원들. 붉은 숫자로 표시된 단원들이 카스트라토들이다. [사진 = public domain]
1898년의 시스티나 예배당 합창단원들. 붉은 숫자로 표시된 단원들이 카스트라토들이다. [사진 = public domain]

카스트라토(castrato)는 16세기부터 주로 유럽 합창단에서 여성을 대신해 고음 영역을 노래하기 위해 등장했다. 일부 카스트라토는 부와 명성을 누리기도 했지만, 대다수는 가난과 무명의 삶에 시달렸다.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흥미로운 소식을 발굴해 소개하는 ‘올댓츠인터레스팅닷컴(allthatsinteresting)’은 10일(현지시간) 이 카스트라토들의 영욕의 역사를 소개했다. 다음은 그 내용의 전문이다.

가수를 시키기 위해 아들을 거세한다는 상상을 해본 적이 있는가? 오늘날에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19세기까지 많은 이탈리아 부모들은 이런 선택을 했다. 그들은 거세된 아들이 성인이 되어서도 고음을 낼 수 있는, 인기 남성 가수인 카스트라토가 되기를 바라고 그런 짓을 저질렀다.

실제로 많은 카스트라토들이 명성과 재산을 얻기도 했다. 가장 유명한 카스트라토 중 한 명인 파리넬리(Farinelli)는 10년간이나 스페인 왕을 위한 가수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의 목소리는 왕의 우울증 치료에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보다 훨씬 더 많은 카스트라토들은 거세로 인한 부작용은 말할 것도 없고 빈곤과 무명의 서러움으로 고통을 겪었다. 그들은 나이가 들면서 뼈의 비정상적인 성장과 골다공증 및 우울증 때문에 고통을 받았다.

다음은 소년 시절에 거세당한 이탈리아의 가수 카스트라토들의 이야기이다.

카스트라토의 기원

거세의 역사는 길지만 카스트라토가 처음 등장한 것은 16세기경이다. 당시 <뉴욕타임스>는 바티칸 당국이 교회 합창단에 여성의 참여를 금지했기 때문에 여성 대신 고음을 낼 수 있는 가수가 필요했다고 보도했다.

그런 뒤 얼마 있지 않아 ‘카스트라토’라고 불리는 거세된 남성 가수들이 여성 단원들을 대체하면서 인기를 끌게 되었다. ‘클래식FM닷컴(classicfm)’에 따르면 1589년 교황 식스토 5세가 칙령을 내려 성 베드로 합창단의 소년과 가성 단원(falsetto)을 카스트라토로 대체하라고 명령한 다음부터 이 관행은 바티칸의 암묵적인 승인까지 받았다.

18세기의 여명이 밝아올 무렵이 되면 매년 약 4,000명의 이탈리아 소년들이 가수가 되기 위해 거세를 당했다. 그러나 거세는 엄밀히 말해 불법이었기 때문에 가족들은 아들을 뒷골목 이발소나 외과의사에게 데려가 수술을 받아야 했다. 그곳에서 소년들은 마취 없이 고통스러운 수술을 받았고, 그중 약 20%가 사망했다.

바로 그 무렵부터 카스트라토의 가족은 처벌을 피하기 위해 자신들이 저지른 일에 대해 거짓말을 하곤 했다. ‘클래식FM닷컴’에 따르면, 가족들은 아들이 말에서 떨어지거나 멧돼지에게 공격을 당했다는 등의 핑계를 댔다고 한다.

거세된 소년들은 카스트라토를 전문적으로 양성하는 학교에 입학했다. 그리고 소년들의 부모는 소년기에 얼어붙은 아들의 목소리가 더욱 빛나게 다듬어져 가족에게 명성과 부를 가져다주기를 바랐다.

당대 최고 인기를 누렸던 카스트라토 중의 한 명인 세네시노 [사진 = public domain]
당대 최고 인기를 누렸던 카스트라토 중의 한 명인 세네시노 [사진 = public domain]

인기 정상의 카스트라토들

카스트라토들은 유럽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오페라포올(operaforall)’에 따르면 거세한 젊은 남성 가수 관행은 이탈리아로 제한되었다고 한다. 그들은 유럽 대륙을 가로질러 종횡무진했으며, 오페라에 출연해 큰돈을 벌기도 했다. 그리고 프랑스인들은 카스트라토를 “장애인”으로 치부했지만, 그들의 성적 능력에 대한 무용담이 꼬리를 물었다.

이를 두고 이탈리아 작가 카사노바는 “유혹에 저항하거나 성적 느낌을 갖지 않으려면 독일인처럼 차갑거나 현실적이어야 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당시 가장 유명한 카스트라토 두 명을 꼽으라면 1686년에 프란체스코 베르나르디란 이름을 갖고 태어난 세네시노(Senesino)와 1705년에 카를로 마리아 미켈란젤로 니콜라 브로스키라는 아명으로 불렸던 파리넬리(Farinelli)가 있다.

작곡가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과의 협연으로 유명한 세네시노는 연간 최대 3,000파운드까지 벌어들였다. 세네시노는 헨델이 이끄는 ‘왕립 음악원(Royal Academy of Music)’에서 ‘primo uomo(리드 싱어)’를 맡아 런던에서 상연된 17개의 주요 오페라에서 활약했다.

하지만 세네시노의 인기는 파리넬리에게는 비할 바가 못 되었다. 파리넬리는 유럽 전역에서 공연하면서 연간 5,000파운드를 벌었고, 스페인의 이사벨 디 파르네시오 여왕에게 고용되어 그녀 남편의 우울증 치료에 가담하기도 했다. 이와 별도로 그는 1년에 1,500기니를 받고 스페인 왕 필리페 5세에게 개인 공연을 베풀기도 했다. 온라인 잡지 ‘슬레이트닷컴(slate)’은 파리넬리는 필리페 5세의 휘하에 10년은 머물렀을 것으로 추정한다.

작곡가 요한 요하임 크반츠는 유명한 카스트라토인 파리넬리에 대해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극찬했다.

“그는 뛰어난 방식으로 노래하고, 발성법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 그는 거대한 화염처럼 알레그로를 노래하고, 분명하고 경쾌한 방식으로 가슴으로부터 노래한다.”

세네시노나 파리넬리 같은 일부 카스트라토는 노래를 통해 돈을 많이 벌었다. 온라인 잡지 ‘슬레이트닷컴’에 따르면 관객들은 “evviva il coltellino!(long live the little knife)”라 외치며 그들을 응원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다수 카스트라토는 세네시노와 파리넬리의 부와 명성에 한참 미치지 못했다.

한편, 유명하든 그렇지 않든, 카스트라토는 어린 나이에 거세를 당한 데서 비롯된 여러 가지 질환으로 말년에 고통을 겪는 일이 흔했다.

파리넬리는 그의 시대 최고 카스트라토였다. 그는 한창 때에는 일년에 5,000파운드를 벌었다. [사진 = public domain]
파리넬리는 그의 시대 최고 카스트라토였다. 그는 한창 때에는 일년에 5,000파운드를 벌었다. [사진 = public domain]

카스트라토의 그늘

어린 나이의 거세는 카스트라토에게 아름다운 목소리만 주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거세로 인해 평생 많은 건강 문제를 안고 살아야 했다.

테크놀로지와 과학 소식을 주로 다루는 ‘기즈모도닷컴(gizmodo)’은 카스트라토의 경우 호르몬 부족으로 ‘성장판’이 닫히지 않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눈에 띄게 키가 컸다고 한다. 이로 인해 뼈가 비정상적으로 길어지고 장기(臟器)에 스트레스가 가해져 나이 먹어서 골다공증과 같은 질환이 발생했다.

또, 카스트라토의 가슴, 턱 및 코를 포함해 신체의 다른 부분도 정상보다 비대해질 수 있었다. 그런데 남보다 큰 흉곽은 호흡 능력 향상으로 이어져 실제로 가수에게 유용하게 작용하기도 했다.

상당수 카스트라토들은 편하게 늙지 않았다. ‘슬레이트닷컴’에 따르면, 한 관찰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고 한다.

“대부분의 카스트라토는 엉덩이, 팔, 목이 둥글게 변하면서 식용 수탁처럼 거대하고 뚱뚱해졌다.”

2006년, 파리넬리의 시신이 발굴되었을 때 연구원들은 그의 뼈가 길고, 이마에 뼈가 뭉쳐있는 현상을 발견했다. 이는 일반적으로 여성에게 발생해서 두통, 우울증 및 기타 정신 건강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내전두골증(hyperostosis interna)의 전형적 징표였다. 그리고 실제로 많은 카스트라토들은 나이가 들면서 우울증에 시달렸다.

그러나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사람들은 더 이상 카스트라토를 찾지 않았다.

카스트라토의 쇠락

카스트라토는 여러 가지 이유로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우선, 18세기에는 여성이 무대에 오르는 것이 다시 허용되었다. 다른 하나는 거세를 바라보는 시각이 바뀌었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1779년, 장 자크 루소는 글을 써서 아들을 거세하도록 강요한 부모를 “자식을 버린 비인간적인 아버지”라고 부르며 이 관행에 비난을 퍼부었다.

점차 카스트라토는 이탈리아에서 골칫거리가 되기 시작했고, 교황 비오 10세는 1903년에 시스티나 예배당에서 카스트라토의 공연 참여를 금지했다. 그때 쯤이 되면 지롤라미 크레센티니와 조반니 바티스타 벨루티 등의 저명한 카스트라토 중 일부는 이미 은퇴한 지 오래되었다.

하지만 마지막 시스티나 예배당 카스트라토 가수였던 알레산드로 모레스키는 1913년까지 완전히 은퇴하지 않았다. ‘로마의 천사’로 알려졌던 모레스키는 1921년에 사망했지만, 그의 목소리는 다행히 녹음되어 전해진다.

녹음으로 남아있는 모레스키의 노래는 전성기의 목소리는 아니지만, 카스트라토 전통을 엿볼 수 있는 단초가 되고 있다.

[위키리크스한국 = 최석진 기자]

dtpchoi@wikileaks-kr.org


  • 서울특별시 마포구 마포대로 127, 1001호 (공덕동, 풍림빌딩)
  • 대표전화 : 02-702-2677
  • 팩스 : 02-702-1677
  • 청소년보호책임자 : 소정원
  • 법인명 : 위키리크스한국 주식회사
  • 제호 : 위키리크스한국
  • 등록번호 : 서울 아 04701
  • 등록일 : 2013-07-18
  • 발행일 : 2013-07-18
  • 발행인 : 박정규
  • 편집인 : 박찬흥
  • 위키리크스한국은 자체 기사윤리 심의 전문위원제를 운영합니다.
  • 기사윤리 심의 : 박지훈 변호사
  • 위키리크스한국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위키리크스한국. All rights reserved.
  • [위키리크스한국 보도원칙] 본 매체는 독자와 취재원 등 뉴스 이용자의 권리 보장을 위해 반론이나 정정보도, 추후보도를 요청할 수 있는 창구를 열어두고 있음을 알립니다.
    고충처리 : 02-702-2677 | 메일 : laputa813@wikileaks-kr.org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