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는 상고 신화 下] "윤종규·함영주·진옥동"... 고졸출신 행원, 이제 볼수 없나
[사라지는 상고 신화 下] "윤종규·함영주·진옥동"... 고졸출신 행원, 이제 볼수 없나
  • 최종원 기자
  • 기사승인 2020-11-19 09:06:12
  • 최종수정 2020.11.17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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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나도 야간 상업고등학교 출신이다. 우리 사회가 독일 등 선진국처럼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어떤 일도 할 수 있도록 많은 일자리가 생겼으면 좋겠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지난 2011년 7월 20일 서울 중구에 위치한 IBK기업은행 본사를 방문해 특성화고 출신 신입 행원들과 만나 이같이 말했다. 은행권은 바로 다음날에 향후 3년간 신입 행원의 12%인 2700여명을 고졸 출신으로 뽑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현재 주경야독으로 대표되는 은행권 '상고(商高) 신화'는 상당 부분 사라지고 있다. 은행들이 고졸 채용 전형을 폐지하거나 채용 인원을 대거 줄이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3일 경기도 고양시 일산 킨텍스 제2전시장에서 열린 '2020 대한민국 고졸인재 일자리 콘서트'에서 참가 학생들이 채용공고 게시판을 꼼꼼하게 살펴보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경기도 고양시 일산 킨텍스 제2전시장에서 열린 '2020 대한민국 고졸인재 일자리 콘서트'에서 참가 학생들이 채용공고 게시판을 꼼꼼하게 살펴보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얼마전 3연임에 성공한 윤종규 KB금융지주 회장은 상고 신화의 대표적인 인물로 평가받는다. 광주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외환은행에 입사해 야간대학을 다닌 뒤 은행장과 금융지주 회장에 올랐기 때문이다. 윤 회장은 2008년 KB금융이 출범한 이래 처음 내부 승진한 인사이기도 하다. 정권이 변할 때마다 정치권 압력에 시달려야 했던 KB금융의 비탈진 역사에서 탈비했다는 점도 높게 평가받는다.

하나금융지주 차기 회장 후보로 거론되는 함영주 하나금융 부회장도 신화의 주인공이다. 상고를 나와 서울은행에 입사했는데 주경야독으로 직장생활과 학업을 병행했다. 고졸 행원 출신으로 하나은행장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로 통한다. 진옥동 신한은행장 역시 덕수상고를 졸업한 뒤 기업은행에서 은행원 생활을 시작해 지난 2017년 신한금융 부사장 자리까지 올랐다.  

이들은 학벌 경쟁이 심한 금융권에서 능력과 실력으로 기업 수장 자리까지 오르는 등 성공신화를 써내려가고 있다. 금융권에서 상고 출신 인사들이 여전히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는 것을 방증한다. 

하지만 국내 은행권에서 ‘상고 신화’가 서서히 사라질 것으로 보인다. 시중은행들이 고졸 채용 전형을 잇달아 없애거나 채용 인원을 줄이고 있기 때문이다.

19일 은행권에 따르면 KB국민, 신한, 하나, 우리, NH농협은행 등 주요 시중은행은 사실상 특성화고 채용 전형 폐지 수순에 들어갔다. 시중은행 대부분이 지난 2017년 이후 별도의 고졸 채용 전형을 실시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당시 은행권의 고졸 채용 규모는 해가 갈수록 줄어들었다. KB국민, 신한, KEB하나, 우리 등 4대 시중은행의 고졸 전형 채용 인원은 2014년 339명에서 2017년 129명으로 절반 이하로 급감했다. 

은행들은 학력 연령 전공 등의 스펙을 보지 않는 ‘블라인드 채용’ 방식에 따라 고졸자와 대졸자를 구분하지 않고 하나의 전형으로 선발한다는 입장이다. 은행권이 최근 공동으로 마련한 ‘은행권 채용 절차 모범규준’은 학력에 대한 차별을 전면 금지하고 있다. 하지만 고졸자 대상의 별도 전형이 없어지면 자연스럽게 고졸 채용이 줄어들 것이라는 관측이 많다. 고졸자가 대졸자와 똑같이 경쟁하면 상대적으로 불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 디지털·전문직 위주 채용... 상고 신화 없어진다

이런 추세는 고졸 채용을 강조하는 정부의 독려가 없어진 탓도 있지만 금융산업의 구조적인 변화에 따른 정보기술(IT) 인력 수요가 늘어났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많다. 은행들이 코로나19 여파 등으로 공개채용 규모를 줄이는 한편 핀테크와 디지털인력의 수시 채용은 늘렸기 때문이다. 

올 상반기 신한, 국민, 우리, 농협은행은 모두 디지털 ICT(정보통신기술) 인력을 따로 채용했다. 농협은행은 처음으로 △디지털(블록체인,인공지능,빅데이터,콜인프라) △카드 디지털(웹모바일,간편결제,빅데이터) 등의 분야에서 채용형 인턴을 뽑기도 했다. 이들 은행 대부분은 하반기에도 디지털 인력을 모두 채용중이다. 디지털 인력 채용에 대한 수요가 많다는 의미다.

본사 전문직 채용도 늘리고 있다. 국민은행은 올해 상반기에 IT·데이터 부문 선발과 동시에 국제 투자은행(IB) 부문 경력직도 채용했다. 우리은행도 디지털·IT 채용과 함께 IB·자금 분야를 선발했다. 하나은행은 본부에서 근무할 △펀드 PM(경력) △PB 마케팅·데이터 분석(신입·경력) △온라인 교육운영(경력) △기술평가(경력) △대금 지급(신입·경력) 등 5개 직무에서 수시채용을 진행했다.

채용 과정도 보다 엄격하게 변했다. 국민은행은 필기시험 합격자를 대상으로 '사전 디지털 과제'와 '디지털 온라인 강의'를 청취토록 했다. 하나은행은 지원분야와 전공이 일치해야 지원이 가능토록 제한하고 있다. 글로벌 분야는 제2외국어 전공자나 가능자, 디지털·자금신탁 분야는 이공·자연계열, 기업금융IB 분야는 이공·자연·상경계열이 지원할 수 있도록 했다.

이처럼 수시채용을 늘리고 전문직·디지털 인재 중심으로 채용을 진행하면서 고졸 출신들이 설 자리는 더욱 줄어들고 있다. 모바일뱅킹 등 비대면 금융거래 확산과 지점 축소 여파로 고졸 직원들이 주로 일하는 텔러(창구 직원) 수요가 줄고 있기 때문이다. 은행연합회 은행통계정보시스템에 따르면, 국내 은행의 영업점포수는 2014년말 7401곳에서 지난해 9월말 기준 6735곳으로 666개가 감소했다. 4대 시중은행이 지난해 말부터 올해 초까지 통폐합을 결정한 지점은 80여 곳에 달한다.

은행권은 고졸 신화가 가장 많이 탄생한 화이트칼라 직업군으로, 텔러에서 출발해 고위직까지 오른 사례가 심심찮게 나왔다. 김지완 BNK금융지주 회장과 김태영 은행연합회장, 정원재 우리카드 사장 등도 대표적인 상고 출신 금융권 인사다. 하지만 고졸 출신이 소화할 수 있는 텔러와 같은 영업직이나 행정직은 로봇 프로세스 자동화(RPA) 등으로 대체되고 있어 명맥을 잇기 힘들 것으로 보인다. 

은행권에서는 이명박 정부 이후 채용된 고졸자를 고졸 행원 2.0세대로 부르고 있다. 고졸 행원 1.0세대는 과거 상업 고교 출신자들로 가정형편 때문에 정규직에 입사해 임원까지 올라간 세대를 말한다. 2.0세대는 정부 정책에 따라 지난해 은행권에 취업한 고졸 행원들로서 대부분 정규직이 아닌 비정규직으로 출발했다. 1.0세대와 달리 2.0세대는 고졸 졸업생의 85% 이상이 대학을 진할 정도로 고학력화로 은행에서 예전과 같은 대우를 받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한 시중은행의 인사 관계자는 "회사에서도 능력이 뛰어난 고졸인재들을 채용하려고 노력하고 있다"라면서도 "디지털 전환에 따라 채용규모를 줄이고 있어 고졸 출신을 따로 채용할 상황이 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또 "고졸인재들이 디지털 기술에 대한 공부를 많이 했으면 좋겠다"라고 권고했다. 

[위키리크스한국=최종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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