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백악관 X파일(146) 미대사관 “김대중 납치사건, 박정희 묵시적 승인 있었다” 국무부에 보고 
청와대-백악관 X파일(146) 미대사관 “김대중 납치사건, 박정희 묵시적 승인 있었다” 국무부에 보고 
  • 유 진 기자
  • 승인 2023.06.20 10:16
  • 수정 2023.06.20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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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희생자에서 승리자로
1973년 8월8일 일본에서 발생한 김대중 납치사건 직후 일본 정부는 납치사건의 범인으로 당시 주일 한국대사관의 김동운 1등 서기관 등을 지목했다. 사진은 김대중씨가 동교동자택에서 납치와 관련한 회견을 하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DB

‘김대중 납치사건의 전모가 밝혀지면서 권위주의시대가 일단락됐다.’

알렉산더 버시바우 주한미국대사는 2007년 11월 국무부에 ‘김대중 납치사건 베일을 벗다’ 테마로 전후 상황에 대한 비밀문서를 보냈다. 
 
버시바우 대사는 “아시아의 넬슨 만델라로 일컬어지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삶은 전후 격동의 한국 정치사의 축소판”이라며 “국정원 진실위는 당시 대통령 박정희가 최소한 납치사건을 ‘묵시적으로 승인’했고, 납치 사건 전모에 간접적으로 개입했다는 오랜 의구심을 확인해 줬다고 보고했다. 

“불확실성의 장막에 덮여 있던 김대중 납치 사건과 기타 사건들에 관한 국정원 진실위의 결론은 중요한 파급력을 갖고 있다”고 전제한 대사관은 “특히 현재가 대선 기간 중이라는 미묘한 시기에 권위주의 시대를 뒤로 하고 민주주의 미래를 내다보고 상황에서 한 시대를 마감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덧붙였다.

다음은 주한미대사관이 국무부에 전송한 비밀문서 내용이다.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는(이하 진실위) 박정희 전 대통령이 당시 야당 지도자인 김대중을 1973년 도쿄에서 납치할 것을 묵시적으로 승인했다고 지난달 24일 자체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그러나 진실위는 김대중 납치의 궁극적 목적이, 김대중과 다른 인사들이 견지하듯이, 김대중을 살해하기 위함이었다고 확정적으로 결론짓는 데 실패했다. 진실위의 보고는 “정부가 생명을 위협하고, 인권을 침해한 점에 대해 피해자인 김대중에게 공식으로 사과해야 하며 그의 명예를 회복시켜야 한다”고 역시 언명했다.

진실위의 조사는 2004년 11월에 수립되어 국정원의 전신인 중앙정보부가 개입한 것으로 협의를 두는 7대 주요 사건을 조사하도록 했다. 진실위는 많은 정보부 요원의 과거 악행을 폭로했는데, 8명을 공산주의 음모 혐의자들이 부당하게 사형당한 인혁당 사건을 포함한다. 

진실위는 대한항공(KAL) 858기가 1987년에 버마 상공에서 폭파된 사건은 중앙정보부의 개입 없이, 북한 요원의 단독 범행이라고 또한 결론 냈다. 당시에 국가의 정보부 요원들이 독재 정권을 위한 폭정의 흉기로 기능했고, 정치 라이벌이나 반정부 모임을 겨냥하여 공격을 실행하곤 했다.

11월 23일 강원택 숭실대학교 교수는 대사관 정무 직원을 상대로 한 발표에서 2007년 대선을 한국 정치가 정상화 한다는 의미로 설명했다. 

강 교수에 의하면,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은 30년이 넘게 권력을 움켜줬던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권위주의 정권의 권력남용을 바로잡고, 평등한 민주주의 토대를 쌓는 데 집중했다. 

지난 세 번의 행정부는 박정희 정권의 ‘성역’과 그 잔재를 청산하는 일을 했다. 말하자면 지역 차별, 군사 당국, 정부와 재벌기업과 빈번한 불법 유착관계 등이다. 

지난 15년간 전두환과 노태우가 횡령 혐의로 구속됐고, 1961년 쿠데타 이후 나라를 운영하던 비밀스러운 군사 도당이 척결됐으며, 전라도 지역 출신들이 정부 내 곳곳으로 등용됐다.  

최소한 부분적으로나마, 1973년 김대중 납치 사건 배후에 감춰진 역사적 사실들을 드러낸 일은 한국이 과거 권위주의 역사를 파악하게 해주는 마지막 장일 듯하다.

지난 71년 신민당 대통령 후보였으며 국회의원인 김대중씨가 일본 동경시내 그랜드 팔레스 호텔 엘리베이터에서 납치된지 만 5일 9시간 만에 풀려나 서울 마포구 동교동 178의 1 자택으로 돌아와 기자들에게 피랍과 풀려난 경위를 설명 중 전화를 받고 있다. 연합뉴스

반독재 친 민주주의와 공약으로 출마했던 김대중은 1971년 대선에서 현직 박정희에게 97만 표차로 패했다. 

많은 한국민은 만일 그 대선이 공정하고, 자유롭고, 투명한 선거였더라면, 김대중이 승리했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 뒤 얼마 되지 않아 김대중은 자동차 사고로 위장된 암살시도의 피해자가 됐는데, 그 사고로 영구적인 옆구리 부상을 당했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김대중은 일본으로 도망쳤고 국외에서 그의 정치활동을 계속했다. 

1973년 8월 8일, 도쿄의 재외 한국인으로 구성된 반(反) 박정희 조직을 발족하기 닷새 전에,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그를 납치했다. 

그러나 미국 정부 등 외국 정부의 배후 노력으로 김대중은 5일간의 감금을 거쳐 서울로 돌려보내졌고, 그의 자택 근처에서 풀려났으며, 그 이후에 가택연금에 처했다.

수년간의 구속 상태와 무산된 암살 기도, 대선 도전 실패 이후 김대중은 1997년 대통령에 당선됐는데, 한국이 사상 처음으로 평화적인 정권교체라는 위업을 세웠다. 

아시아 경제 위기의 여파로, 김대중은 박정희 유산의 상당수를 제자리로 되돌려 놓았다. 

김대중 대통령 임기 동안에, 예전에 소외당하던 전라도 출신들이 공공부문과 민간부문 모두에서 각광을 받게 되었고, 경제 개혁의 닻을 올렸다. ‘햇볕 정책’으로 냉전 시대 남북관계가 해빙되었고, 종국에는 김대중에게 노벨평화상을 안겨지게 됐다.

김대중은 그의 대변인을 통해 진실위 보고서의 내용이 박정희의 직접 개입 또는 납치공작 배후에 있는 암살 동기에 대해 인정하지 않은 점을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납치 후 며칠 만에 납치범들은 그를 작은 보트에 태워 바다로 데려갔고, 그의 다리에 콘크리트 추를 달아서 배 밖으로 던지려 했다고 수년에 걸쳐 주장해 왔다. 

김대중에 의하면 머리 위 미국 중앙정보부 헬리콥터의 직접적인 개입이 있었기에, 운명의 날에 물에 빠져 죽지 않고 살아날 수 있었다. 

김대중의 비서 박준희는 미 대사관 정무직원의 질의에 “김대중 씨는 진실위 조사결과의 불확정성으로 말미암아 실망했으며, 정치를 떠나 개인적인 이유로도 그는 “모든 진실이 밝혀지길 원한다”고 말했다”고 답변했다.

그는 “김 전 대통령은 이 진실이 공개적으로 밝혀지길 34년을 기다려 왔으며, 그날이 올 때까지 계속 기다릴 것이라고 했다”고 덧붙였다. 

공식적인 조사가 없었음에도, 한국과 일본 정부 모두 김대중 납치 사건을 놓고 수년 동안 진실공방을 펼쳤다.

1973년 김대중 납치 직후 박정희 정권은 공식적으로 개입 여부를 부인했으며, 일본 정부를 달래기 위해 김종필 총리를 도쿄로 보냈다. 비록 중앙정보부의 개입이 널리 의심되고 있었지만, 일본 정부는 1973년과 1975년, 양국 정부 간에 외교적인 해결 이후에 동 납치 문제에 대한 공식적인 조사를 마감했다. 

김대중 대통령 측의 하태연 선임 참모는 “납치 문제를 파헤치기 위해 일본 정부가 ‘합당한 조사’를 실행하지 않는 점에 대해 김대중 씨가 격분했으며, 일본으로부터 공식적인 사과를 원했다”고 대사관 직원에게 말했다. 

냉전 시대 우려 사안과 경제적 상호 이해관계, 일본의 한국 점령 역사에서 기인한 어색한 양국 관계 등이 일본의 정치적인 타협을 촉발한 듯하다.

김대중 납치 사건에 가담한 중앙정보부의 역할을 공개적으로 인정함으로써, 한국 정부는 범죄의 현장이 되었던 일본의 주권 침해 부분을 역시 인정한 것이다. 

국정원의 발표 직후, 일본 외무성은 한국의 공식적인 사과를 요구했다. 그러나 한국 정부가 이 납치 사건에 대해 완전한 사과가 아닌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는 표현에 일본 정부는 경악했다. 

한 일본 언론은 “노무현 정부가 야당 한나라당 대선 후보 이명박에 상처를 입히도록 진실위 발표 시기를 맞췄다”며 음모설을 제기했다.
그러나 국정원 진실위의 보고는 단지 뻔한 결론만을 드러냈을 뿐이다. 사람들 대부분은 이미 중앙정보부와 박정희가 김대중 납치의 배후라고 당연시해왔다. 

궁극적으로 이번 발표가 한국의 유권자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치지 않을 공산이 크며, 유권자들은 과거를 캐내는 것보다 경제 활성화에 대해 더욱 관심이 있다고 버시바우 대사는 덧붙였다.

[X파일 취재팀= 최석진, 유 진 기자]

한-미 정치 40년 비사를 엮는 청와대-백악관 X파일. [위키리크스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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