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백악관 X파일(148) 김대중 ‘아시아의 큰 별이 지다’... 후세 정권들의 대북정책 '희비' 안고 역사 속으로
청와대-백악관 X파일(148) 김대중 ‘아시아의 큰 별이 지다’... 후세 정권들의 대북정책 '희비' 안고 역사 속으로
  • 유 진 기자
  • 승인 2023.07.22 07:12
  • 수정 2023.07.22 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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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비밀문서로 본 김대중 타계에 대한 평가(상)
김대중 전 대통령 타계. /오마이뉴스TV
2009년 8월, 김대중 전 대통령 타계하다.  /연합뉴스

캐슬린 스티븐슨 주한미국대사의 예방을 받은 지 10개월만인 2009년 8월 18일 김대중 전 대통령이 지병으로 타계했다.

그의 정권을 이어받은 노무현 전 대통령만 해도 ‘햇볕정책’을 승계했지만, 이명박 대통령은 북한에 대한 압박작전을 이어갔기 때문에 김 전 대통령의 말년은 건강도, 마음도 편치 않았다.

그가 타계하자 스티븐슨 대사는 장문에 걸쳐 그에 대한 부고를 국무부로 전송했다. 

다음은 스티븐슨 대사의 비밀전문 내용이다.

한국의 전임 대통령인 김대중이 8월 18일 서울에서 폐렴에 의한 합병증으로 83세의 생을 마감했다. 장례식은 8월 25일로 잠정적인 계획이 잡혔다. 

김대중의 보좌관들은 김대중의 유가족은 바이든 부대통령이나 클린턴 국무장관이 장례식 조문사절단 대표로 방한하길 희망한다고 대사관 정무 직원에게 말했다. 

김대중은 1998년에서 2003년까지 대통령을 역임했으며 2000년에는 남한의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한 그의 투쟁과 북한과의 화해 노력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김대중은 미국과는 가까운 친구이며 한국 민주화 과정에 역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의 대북 ‘햇볕정책’은 한국민의 대북 감정에 지대한 변화를 가져왔으며 남북 관계를 탈바꿈시켰다. 

김대중은 1925년 12월 3일 하이도에서 태어났다. 전라도 지방의 가난한 섬이며 한국 호남 지방에 자리하고 있다. 그는 목표 상업고등학교를 1943년에 졸업했고 1945년 정치에 입문하기 전까지 자신 소유의 운송 회사를 운영했다.

김대중은 1961년 국회 의석을 확보하기까지 몇 차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실패를 맛보았다. 그의 첫 번째 임기는 짧게 끝나고 말았는데 박정희 소장이 이끈 군사 쿠데타 세력이 총선 이후 3일 만에 국회를 해산했기 때문이다. 김대중은 이에 굴하지 않고 1963년에 다시 출마해서 당선됐고 이후 3선 국회의원이 됐다. 

역동적인 연설가이며 카리스마 넘치는 인물 김대중은 1960년대말 박정희가 헌법에 위배되는 3선 개헌으로 대통령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한 국회의 노력에 선봉에 서면서 전국적인 유명 인사로 부상했다. 

그 노력은 실패했지만, 김대중은 1971년에 박정희를 상대로 신민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기에 충분한 정치적인 추동력을 확보했다. 김대중은 강력한 캠페인을 펼쳤지만, 선거 방해 전술과 불법 선거 관행을 이용한 박정희에게 결국 패배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1주년을 맞아 2010년 8월 전남 무안군 전남도청 앞 중앙공원에 김대중 전 대통령 동상이 제막돼 이희호 여사가 주변을 둘러보고 있다. 연합뉴스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1주년을 맞아 2010년 8월 전남 무안군 전남도청 앞 중앙공원에 김대중 전 대통령 동상이 제막돼 이희호 여사가 주변을 둘러보고 있다. 연합뉴스

1971년 대선 이후 김대중은 극심한 정치적 탄압의 대상이 됐다. 여러 차례 체포 및 투옥된 것을 제외하더라도 김대중은 최소한 다섯 차례의 암살 기도에 살아남았다. 한국 중앙정보부에 의해 납치된던 그는 이후 1980년 광주항쟁을 선동한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미국 정부가 개입한 후에 한국 당국은 김대중의 사형 선고를 감형했고, 김대중은 미국으로 망명길에 올랐다. 1983~84년 동안 그는 하버드 대학에서 연구원 자격으로 머물렀다. 

1985년 서울로 귀국하면서 김대중은 전국적으로 성장하던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영향력 있는 역할을 재개했다. 

1987년. 김대중은 대선에 출마해 김영삼과 전두환이 손수 고른 후계자인 노태우 준장에 맞서 3자 대결을 펼쳤다. 양 김 모두 후보 사퇴를 하지 않으면서 민주주의 세력의 표가 둘로 갈렸고 노태우에게 승리를 헌납했다. 1992년에 김대중은 대통령 후보로 재차 출마했고 지역적 대결 구도에 따라 분할된 박빙의 3자 대결에서 김영삼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1997년 아시안 금융위기 소용돌이 속에서 김대중은 경제 개혁과 남북 화해를 공약으로 한국의 대통령으로 당선했다. 

그의 승리로 좌파 진영에 첫 대통령이 탄생했고 여야 파벌 사이 처음으로 평화적 정권 교체를 일궈냈다. 전형적인 정치 보복과 함께 부임하는 대통령들이 자신의 임기를 시작하는 것과는 달리 김대중은 전직 대통령을 사면하고 정치범을 풀어줬다.

김대중이 1998년 2월 취임할 당시는 아세안 금융위기로 남한은 파산 직전으로 내몰려 있었고 김대중은 한국 경제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과감한 조치가 필요했다. 

국제통화기금으로부터 미화 580억 달러 구제금융과 일전을 벌여; 첨단기술 산업 개발을 강력히 추진했다. 은행과 기업, 노동 관행에 대해 구조 조정을 단행했으며, 기업과 정부 사이 결탁을 단절하고 더 나아가 투명성을 담보하기 위해 선거자금법을 재개정하기까지 했다. 1년 만에 김대중은 구제금융을 갚았으며, 한국 경제가 아시아 국가 중 가장 강한 경제 국가 중의 하나로 발돋움시키도록 기반을 조성했다. 

김대중은 외교관계 측면에도 적극적인 모습이었다. 1998년 10월에 김대중은 일본 총리 오부치 게이조 수상을 만나 양국 사이 역사적인 적대감을 완화하고 새로운 동반자 시대를 선언했다. 김대중은 북한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으면서 동시에 미국과 중국, 러시아와의 연대 역시 강화하였다. 또한, 한국이 하나의 역내 지도자로 커다란 역할을 맡았다.

김대중의 대북 포용 정책인 “햇볕 정책”으로 경제 원조를 정치를 분리하고 금기를 깼으며 남한 사람들의 대북 감정에 지대한 변화를 이뤄냈다. 

2000년 6월 15일 김대중은 북한의 지도자 김정일과의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을 위해 평양을 방문했다. 이는 남북 정상 간의 첫 번째 만남이었다. 

결과물인 남북 공동 선언문에 따라 이산가족 상봉이 성사됐었고 한반도 횡단 철도 건설, 남북 합작 금강산 관광지 건설이 허용되었다.

남북화해 증진에 더해 남한의 민주화 과정에서 보여준 김대중의 노력과 지도력은 노벨 평화상을 비롯해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았다. 

불행하게도 김대중의 성공은 남한 정부가 북한 정부에 남북 정상회담 합의에 따른 대가로 현금 수억 달러와 그 밖의 경제 협력을 제공한 일이 2003년 폭로되면서 훼손됐다. 

또한 2002년에 김대중의 두 아들과 보좌관 중의 일부가 부패 협의로 체포됐다. 그렇지만, 김대중의 노벨평화상 수상과 압도적인 개인사는 국제적인 인물에 걸맞는 위상과 한국의 진보 정치의 창도자로서 입지를 공고히 했다.

퇴임 이후. 김대중은 지방 선거와 대통령 선거에서 공히 정권 창출의 산파 역할을 종종 수행했으며, 모든 진보 후보들이 상담해야 할 원로 정치인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2009년 들어 그의 민주당 내 영향력이 약해지기 시작했다. 그의 고향 전라도 지방에 출마한 민주당 국회의원 후보 김근식과 이광철이 김대중의 공개적인 지지 선언에도 무소속 후보인 정동영(72.3% 득표율), 신건(50.4%)에 의해 어이없이 패배했다. 게다가 김대중의 진보 대통령 후계자인 노무현의 2009년 자살은 민주당 내부에 친노 의원의 재부상을 촉진하면서 김대중에 충직한 이들이 더욱 뒷전으로 밀리게 되었다.

김대중은 남북화해를 앞당기기 위해 그가 설립한 싱크탱크인 아태평화재단과 연세대학교에 김대중도서관을 유산으로 남겼다.

김대중의 유족은 그의 부인 이희호 여사와 세 명의 아들이 있다. 그 중 김홍업은 그 자신이 유명한 정치인이다.

한-미 정치 40년 비사를 엮는 청와대-백악관 X파일. [위키리크스한국]
한-미 정치 40년 비사를 엮는 청와대-백악관 X파일. [위키리크스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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