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인사이드] 영화 흥행으로 조명받는, 원자폭탄의 아버지 오펜하이머의 잘 알려지지 않은 5가지 사실들
[WIKI 인사이드] 영화 흥행으로 조명받는, 원자폭탄의 아버지 오펜하이머의 잘 알려지지 않은 5가지 사실들
  • 유 진 기자
  • 승인 2023.07.29 06:51
  • 수정 2023.07.29 0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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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신장 영화 '오펜하이머'의 포스터 [사진 = ATI]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신장 영화 '오펜하이머'의 포스터 [사진 = ATI]

1959년 처음 출시된 바비인형을 소재로 한 영화 ‘바비’와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 원자폭탄 제조 프로젝트의 주역 J. 로버트 오펜하이머를 다룬 전기영화 ‘오펜하이머’가 미국 개봉 첫 주말 ‘쌍끌이 흥행’ 역사를 새로 쓰고 있다.

워싱턴포스트에 따르면 ‘바비’는 개봉일인 21일부터 사흘간 1억5500만 달러(약 1987억원)를, 오펜하이머는 8050만 달러(1032억원)를 벌어들였다. 개봉 첫 주말 한 영화가 1억 달러 이상, 다른 영화가 5000만 달러 이상 티켓 판매고를 올린 것은 사상 최초라고 미 연예매체 ‘할리우드리포터’는 전했다.

북미에서는 지난 21일 동시에 개봉한 ‘바비’와 ‘오펜하이머’를 묶어 ‘바벤하이머’로 부를 정도인데, 개봉 첫 주 성적은 ‘바비’가 월등히 앞섰지만, 평가에서는 ‘오펜하이머’가 타 영화 부럽지 않은 점수를 획득하고 있다.

실제로 ‘오펜하이머’는 해외 비평 사이트 ‘로튼토마토’에서 영화 전문가와 관객 평가 모두에서 94%를 기록한 데 이어 실관람객들의 반응 선호도를 확인하는 ‘시네마스코어’에서도 A등급을 기록했다. 이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이전 작품인 ‘인셉션’, ‘인터스텔라’, ‘덩케르크’, ‘테넷’을 모두 뛰어넘는 수치이자 영화사에 길이 남을 역대급 작품 ‘다크 나이트’와 같은 기록이다. 국내에는 내달 15일 개봉할 예정이다.

그렇다면 ‘원자폭탄의 아버지’라고도 불리는 J. 로버트 오펜하이머(J. Robert Oppenheimer)의 실제 삶은 어땠는지를 히스토리채널의 웹사이트(히스토리닷컴)를 통해 알아보았다.

이론물리학자였던 오펜하이머는 산스크리트어를 해독하고, 뉴멕시코주에서 승마를 즐겼으며, 미국에서 ‘빨갱이 사냥(Red Scare)’이 기승을 부릴 때 우파들의 표적이 되기도 했다.

오펜하이머는 제2차 세계대전 중 사상 최초로 핵무기 제조를 위해 설립된 ‘맨해튼 프로젝트’의 산실 ‘로스 알라모스 국립연구소(Los Alamos Laboratory)’의 책임자였다. 그가 주도해서 탄생한 원자폭탄은 1945년 8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약 100,000~200,000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1904년 뉴욕에서 태어난 오펜하이머는 23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물리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 후 그는 ‘캘리포니아 공대’와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에서 물리학을 가르쳤다.

1942년, 오펜하이머는 관리자로서의 경험 부족과 노벨상을 수상하지 못했다는 약점에도 불구하고, 레슬리 그로브스(Leslie Groves Jr.) 장군으로부터 ‘맨해튼 프로젝트’를 이끌어달라는 부름을 받았다. 전쟁이 끝난 뒤에는 그는 ‘미국 원자력 에너지 위원회(U.S. Atomic Energy Commission)’의 일원으로 활동하면서 핵무기 사용에 대한 감독 강화와 수소폭탄 제조 계획에 반대했다.

다음은 저명한 물리학자 오펜하이머에 대해 잘 알려지지 않은 몇 가지 사실들이다.

산스크리트어를 공부해 힌두교 경전을 읽을 수 있었던 오펜하이머

오펜하이머가 남긴 가장 유명한 말은 1965년 제작된 다큐멘터리 ‘원자폭탄 투하 결정(The Decision to Drop the Bomb)’에 등장한다. 여기에서 그는 1945년 7월 16일 최초로 실시된 핵폭탄 실험을 목격한 감회를 다음과 같이 털어놓는다.

“앞으로의 세상은 이전과 같지 않을 것이다. 몇몇은 웃었고, 몇몇은 울었고, 대부분은 침묵했다. 나는 힌두교 경전 ‘바가바드 기타’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비슈누(힌두교 최고의 신 중 하나)는 왕자에게 자신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고 설득하면서 깊은 인상을 남기기 위해 여러 팔을 가진 모습으로 변신한 뒤 ‘이제 나는 세계의 파괴자인 죽음이 되었다.’라고 말한다. 나는 우리 모두가 어떤 식으로든 비슷한 느낌을 가졌다고 생각한다.”

오펜하이머는 힌두교 경전의 신성한 언어인 산스크리트어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에서 가르치는 동안 산스크리트어를 공부하고, ‘바가바드 기타’를 읽었다. 1965년의 다큐멘터리에서 그는 ‘바가바드 기타’의 일부를 자신이 영어식으로 이해한 대로 인용했지만, 사실 이 부분은 달리 해석될 수도 있으며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도 훨씬 복잡하다.

‘원자폭탄의 아버지’ 로버트 오펜하이머 박사 [사진 = 연합뉴스]
‘원자폭탄의 아버지’ 로버트 오펜하이머 박사 [사진 = 연합뉴스]

10대 때 요양 차 들른 뉴멕시코와 사랑에 빠진 오펜하이머

1942년, ‘맨해튼 프로젝트’의 비밀 실험실 부지로 오펜하이머가 선정한 뉴멕시코주의 ‘로스 알라모스 목장 학교(Los Alamos Ranch School)’는 그가 10대 때 사랑에 빠진 시골 마을이기도 했다. 이 곳은 상대적으로 고립되어 있으면서도 철로가 인접해 있는 등 원자탄 프로젝트로서는 최적의 입지였다.

오펜하이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이질을 심하게 앓는 바람에 하버드대학에 진학할 수 없었다. 그의 부모는 여름 동안 요양을 위해 그를 뉴멕시코주에 있는 친구 목장으로 보냈고, 그곳에서 그는 사막의 아름다움과 승마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그는 이후 수십 년 동안 여러 번 뉴멕시코를 찾았고, 결국 ‘맨해튼 프로젝트’의 비밀 실험실 부지로 사막에 위치한 ‘로스 알라모스 목장’을 선택하게까지 되었다.

대공황기에 공산주의에 관심을 갖게 된 오펜하이머

미국에 불어닥친 대공황은 미국 노동자의 권리와 공산주의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켰다. 1930년대 후반에 오펜하이머는 좌파 행사에 참석하고, ‘스페인 내전’의 반파시스트 공화파에 기부했으며, 좌파 신문인 <People’s World>를 구독했다. 그는 공식적으로 미국 공산당에 가입한 적은 없지만, 그의 형제 프랭크 오펜하이머를 포함해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공산당 운동에 직접 가담했다. 그의 여자 친구 장 태틀록이나 그의 아내 캐서린 ‘키티’ 오펜하이머도 마찬가지였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을 때 소련과 같은 편에서 싸웠지만, 보수적인 미국 관리들은 여전히 ​​공산주의자들을 의심했다. 1917년부터 1920년까지의 제1차 적색 공포(Red Scare) 기간 동안 미국 관리들은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 그리고 노동운동가들을 박해했다. 그러나 오펜하이머를 ‘맨해튼 프로젝트’로 이끈 장본인인 레슬리 그로브스 장군은 오펜하이머가 공산주의와 연루된 사실을 알았지만, 큰 문제로 여기지 않았다.

전쟁이 끝난 뒤 오펜하이머의 반대자들은 이러한 이력을 문제 삼아 오펜하이머가 국가 안보에 위협이 되는 인물이라고 비난했다.

'맨해튼 프로젝트'로 탄생한 원자폭탄 실험 장면 [사진 = ATI]
'맨해튼 프로젝트'로 탄생한 원자폭탄 실험 장면 [사진 = ATI]

1950년대 ‘적색 공포(Red Scare)’ 당시 블랙리스트에 올라 ‘보안 허가’를 상실한 오펜하이머

1946년 미국은 국가의 핵무기 프로그램을 관리하기 위해 ‘미국 원자력 에너지 위원회(U.S. Atomic Energy Commission)’를 구성했다. 오펜하이머는 이 위원회의 일원으로 활동하며 핵무기 통제 강화를 역설하고, 미국이 1952년에 처음으로 실험한 수소폭탄 개발에 반대했다.

“그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폭탄보다 1,000배 더 강력한 수소폭탄인 ‘초강력 폭탄( superbomb)’ 개발에 반대했습니다.”

‘원자력 해리티지 재단(Atomic Heritage Foundation)’의 설립자이자 회장인 신시아 켈리는 이렇게 말했다. 오펜하이머는 더 강력한 폭탄 제조를 위한 군비 경쟁으로 벌어질 대량 파괴를 걱정했던 것이다.

1953년 ‘원자력 에너지 위원회’의 의장이 된 사업가 루이스 스트라우스는 수소폭탄 개발을 반대하는 오펜하이머를 의심하며 그의 애국심을 조사하기 위해 ‘안보 청문회’를 열었다. 이 때는 조셉 메카시 상원 의원이 연방정부 내 공산주의자를 색출하기 위한 청문회를 열며 두 번째 ‘적색 공포’의 광풍이 절정에 달하던 시기였다.

‘원자력 에너지 위원회’는 오펜하이머의 전화를 불법 도청한 FBI의 도움으로 청문회에서 오펜하이머가 공산주의자들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국가 안보에 위협이 되는 인물이라고 주장했다. 1954년 정부는 그의 ‘보안 허가(security clearance)’를 취소했고, 그로 인해 그는 당대에 블랙리스트에 오랐던 많은 사람들 중 한 명이 되었다.

오펜하이머가 사망한 지 50년이 넘어서야 ‘보안 허가’ 취소를 취소한 미국

‘보안 허가’가 취소되면서 오펜하이머는 더 이상 ‘원자력 에너지 위원회’에서 일할 수 없게 되었다.

“1954년 그의 ‘보안 허가’가 거부되자 오펜하이머의 미국 정부 자문으로서의 경력은 끝이 났습니다.”

UC 버클리의 역사학 명예 교수이자 『오펜하이머 재평가 : 100주년 연구 및 성찰(Reappraising Oppenheimer: Centennial Studies and Reflections)』 의 공동저자인 데이비드 홀링거는 이렇게 평가했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1963년 오펜하이머의 과학적 업적과 리더십을 기리며 ‘엔리코 페르미 상(Enrico Fermi Award)’을 수여했지만, 그는 ‘보안 허가’를 다시 취득하지는 못했다. 그는 1967년 62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물리학과 핵 기술에 대해 계속 말하고 저술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2022년 12월이 되어서야 미국 에너지부가 오펜하이머의 ‘보안 허가’를 취소하기로 한 결정을 취소하고, 그의 청문회가 불공정했음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이는 미국 정부를 상대로 오펜하이머의 명예회복을 주장한 과학자들과 역사가들의 오랜 노력 덕택이었지만, 그해 여름 영화 ‘오펜하이머’가 상영될 예정이라는 사실 때문에 속도가 더 빨라졌을 수도 있다.

[위키리크스한국 = 유 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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