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 패권경쟁] "서로 공격하던 적국에서 혈맹으로"... 2차대전 앙숙이던 미국과 일본은 어떤 과정을 거쳐 동맹이 됐나
[동북아 패권경쟁] "서로 공격하던 적국에서 혈맹으로"... 2차대전 앙숙이던 미국과 일본은 어떤 과정을 거쳐 동맹이 됐나
  • 최석진 기자
  • 승인 2022.12.11 06:50
  • 수정 2022.12.11 09:5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미-일 연합훈련. /연합뉴스
미-일 연합훈련. /연합뉴스

최근 아시아태평양 권역에서 중국이 정치경제적으로 팽창하는 것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이 가장 중요한 카드로 활용하는 나라가 '일본'으로 평가받고 있다. 오늘날 일본은 미국에게 혈맹과도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동북아시아에서는 한국이 존재하지만, 미국에게 한국은 북한의 도발을 억제하는 동맹으로서 존재감이 강하다. 중국의 팽창을 경제하는 차원에서는 일본이 1순위, 한국이 2순위인 셈이다.

오늘날 밀월관계와 달리, 미국과 일본은 2차세계대전 당시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원자폭탄까지 투하했던 적국이었다. 그러나 승전국 미국의 맥아더 장군은 점령군 사령관으로서 일본의 비무장화, 민주화를 이끌면서 이 태평양 국가의 재건을 도왔다.

냉전과 그 이후 시기를 거치면서 일본은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서 미국의 둘도 없는 동맹국이 되었다.

하지만, 일본 내에서 제기되고 있는 '평화헌법' 개정 문제는 양국의 새로운 갈등을 유발할 잠재적 시한폭탄으로 지적되는 상황이다.

최근 꿈틀대는 동북아 정세 변화에 발맞춰 ‘히스토리 채널’이 미국과 일본이 어떻게 적에서 동맹으로 성공적으로 변모할 수 있었는지 진단했다.  

일본의 육상 자위대. /연합뉴스
일본의 육상 자위대. /연합뉴스

국제 관계에서 미국과 일본처럼 급격한 반전을 기대하기란 쉽지 않다.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기습 폭격은 미국을 충격에 빠뜨리면서 미국이 공식적으로 이 전쟁에 참여하는 분수령 역할을 했다. 

이로부터 거의 4년 뒤, 미국은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가공할 원자폭탄을 투하하면서 사실상 전쟁을 종식시켰다. 그 후 미국은 패전국 일본의 군대를 해산하고, 정치 구조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도록 했고, 일본은 7년에 걸친 미국의 점령 정책을 따를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전후 미국의 목표는 단순히 평화를 구축하고 일본을 재건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았다. 새롭게 형성되던 세계 질서에 직면하여 급성장하는 초강대국 미국은 영토는 크지 않아도 강력한 역사를 지닌 이 태평양 섬나라를 공산주의 확산을 저지하는 아시아의 교두보로 삼고자 했다. 

이를 위해 미 점령군 당국은 제1차 세계대전의 여파를 타산지석으로 삼았다. 그들은 일본의 절박한 경제 상태와 정부와 군대에 대한 국민의 환멸을 이용하여 민주주의의 씨앗을 뿌리고 헌법 개정에 착수했다. 미국은 이 모든 과정에서 미군 정보부 내 수천 명의 일본계 미국인들로 구성된 언어 전문가들을 활용했으며, 이들은 전쟁 중의 은밀한 첩보 활동에서처럼 전후 일본의 전환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일본 천황에 면죄부를 준 미국

일본의 전후 전환을 통할하던 연합국 최고사령관인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제1차 세계대전 후 조약에서 배운 교훈을 타산지석으로 삼았다. 패전국을 모욕하고, 독일 경제의 몰락으로 이어진 막대한 배상금 요구 대신 미국은 패전국 일본, 특히 천황에 대한 대우를 통해 보다 긍정적 관계 모색에 나섰다.

패전으로 피폐해진 나라의 대규모 기근을 두려워한 미국은 인도주의적 위기와 그에 따른 사회 불안을 피하기 위해 일본에 식량을 제공했다. 미국은 매파적인 히로히토 일왕을 전범으로 재판에 회부하는 대신 왕이 전쟁 중에 군국주의자들에 농락당했다는 전략을 확립하면서 왕좌를 지킬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해리 트루먼 행정부는 국가 지도자의 체면을 지켜줌으로써 일본 국민이 점령과 앞으로의 어려운 과제, 즉 초국가적 제국주의에서 민주 국가로의 전환에 더 효과적으로 협력하도록 장려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맥아더 장군과 히로이토 천황 [사진 = 연합뉴스]
맥아더 장군과 히로히토 천황 [사진 = 연합뉴스]

『떠오르는 태양 : 일본 제국주의의 쇠락(The Rising Sun : The Decline and Fall of the Japanese Empire)』의 저자인 존 톨랜드에 따르면 ‘미군 정보국 연합통역국(ATIS)’의 시드니 마시비르 대령은 맥아더에게 미리 작성된 대본을 읽도록 권고함으로써 천황을 당황하게 하지 않도록 배려했다. 

당시 일반 일본 국민은 천황의 목소리를 직접 들은 적이 없었는데, 패배를 인정하는 천황의 목소리는 톤이 높고 격식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1945년 8월 15일에 방송되도록 사전에 녹음된 천황의 진중한 항복 메시지에는 정작 ‘항복’이라는 단어는 들어있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일본이 자국 말살과 인간의 “멸절”로 이어질 수 있는 원자폭탄급 전쟁을 계속하기보다 평화를 선택했음을 암시했다.

수십 년 동안 일본 국민에게 제국주의와 패권 확장의 미덕을 선동하던 천황은 이 연설에서는 겸양과 절제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지금부터 우리 국가가 이겨내야 할 시련과 고통은 분명 어마어마할 것”이라고 말하면서 일본 국민이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디고, 참을 수 없는 것을 참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공식적인 항복은 1945년 9월 2일 맥아더 장군 휘하의 도쿄만 내의 ‘미주리 함(USS Missouri)’에서 이루어졌다.

한편, 미국은 일본이 민주주의 사회로 이행하기 위해서는 국민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점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일본에 대한 미국의 점령 정책을 설명하는 문서는 “미국은 일본 정부가 가능한 한 민주적 자치 원칙에 충실하기를 원하지만......연합국은 일본 국민의 자유로운 의사에 반하는 정부 형태를 강요할 어떤 책무도 없다”고 강조했다.

확실히 맥아더 휘하의 점령군 정권은 일본의 경제, 사회, 정치, 문화적 변화를 통할할 광범위한 권력과 통제력을 지니고는 있었다. 그러나 맥아더 장군의 공식 참모 보고서에 따르면 점령 당국은 일본인이 “자존심과 자신감의 상실”을 겪지 않도록 기존 시민 사회에 발판 역할만을 하면서 지방 관리와 시민이 최대한 주도권을 갖도록 장려하고, 정해진 개혁을 이행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미군은 계속해서 모든 과정을 감독했다. 그래도 미국에 대한 적대감이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일본 국민에 대한 점령 당국의 대체로 예의 바르고 겸손한 태도는 상호 신뢰 구축이라는 장기적인 목표에 기여하였다.

전쟁과 그 이후 시기에 돋보인 니세이들의 활약

2차 세계대전 중 미국은 일본을 상대로 비밀 무기를 배치했다. 바로 태평양 전역에서 군사 정보국의 언어 전문가로 일했던 1세대 일본계 미국인(니세이/Nisei)들이 그들이었다. 일본 이민자 부모에게서 태어난 일부 니세이들은 일본어를 할 줄 알았다. 특히 부모가 전쟁 전에 교육을 위해 일본으로 귀국시킨 ‘키베이(Kibei)’들은 일본어에 더욱 능통했다. 

일본과의 충돌 가능성을 예상한 미국은 진주만 폭격 이전부터 정보 수집을 위해 니세이들을 모집·훈련시켰다. 그러나 진주만 공습과 이어지는 일본계 미국인의 투옥 이후, 니세이들은 고조된 차별과 의심의 눈초리를 받아가면서 미국을 위해 봉사했다.

전쟁 중에 니세이 출신 언어 전문가들은 통신을 감청하고, 지도와 문서를 번역하고, 적 포로를 심문하는 것을 도왔다. 1944년 맥아더의 정보부장인 찰스 윌로비 장군은 “ATIS 언어 전문가 한 명이 보병 대대 하나의 가치가 있다”고 추켜세운 적도 있다. 그는 이들 니세이들이 전쟁을 2년 단축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추정했다.

히로히토 일본천황과 제너럴 포드 미 대통령이 사열하고 있는 모습 [사진 연합뉴스]
히로히토 일본 천황과 제너럴 포드 미 대통령이 사열하고 있는 모습 [사진 연합뉴스]

니세이는 또한 연합군 점령과 일본 재건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5,000명 이상의 니세이들이 점령 기간 동안 복무했으며, 대부분은 각 현에 할당된 군사 정부 조직의 일원으로 일을 했다. 

특히 키베이들은 일본의 역사, 사회, 정치, 문화, 종교, 경제, 교육 분야의 실질적 규범을 더 깊이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특히 큰 몫을 했다.

특별히 중요했던 점령 초기 몇 달 동안 니세이와 키베이들은 수많은 복잡한 목표 달성을 위해 막후에서 노력했다. 그들은 미군과 연합군 포로를 송환하고, 해외에 거주하는 일본군과 민간인들을 일본으로 귀국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들은 또 정치범 석방을 도왔고, 전범 수색과 기소를 위한 증거 수집에도 참여했다. 그들은 나아가 일본이 민주주의로 나아가는 데 방해가 될 수 있는 저항의 징후가 있는지 대중을 감시하는 일에 동원되기도 했다. 경제적 측면에서는 그들은 일본의 전쟁 관련 산업을 해체하는 데 도움을 주었고 금융 대기업, 암시장 및 조직범죄를 근절하기 위해 노력했다.

헌법 개정

니세이와 키베이의 가장 큰 공은 일본 헌법 개정 과정에서 찾아야 할지도 모른다. 약 103개 조항으로 이뤄진 새 헌법은 1947년 5월 3일에 발효되었다. 전멱적으로 수정된 새 헌법 조항에는 농지 개혁, 여성 참정권, 언론의 자유, 집회 및 종교의 자유 보장, 노동조합 제도 및 미국식 교육 제도의 수립이 포함되어 있었다.

새 헌법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일본이 전쟁을 포기한 제9조였다. 

“일본 국민은 정의와 질서를 기조로 하는 국제평화를 성실히 바라고 추구하며, 국제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으로써 국권이 발동되는 전쟁과 무력에 의한 위협 또는 무력 행사를 영구히 포기한다. 전항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육·해·공군, 그 밖의 전력을 보유하지 않는다. 국가 교전권은 인정하지 않는다.”

이후 수십 년이 지나면서 태평양과 기타 지역의 지정학이 변화함에 따라 이 조항은 일본 내에서 뿐만 다른 나라들에서도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러나 이 평화헌법은 개정된 적이 없다.

[위키리크스한국 = 최석진 기자]

 

dtpchoi@wikileaks-kr.org


  • 서울특별시 마포구 마포대로 127, 1001호 (공덕동, 풍림빌딩)
  • 대표전화 : 02-702-2677
  • 팩스 : 02-702-1677
  • 청소년보호책임자 : 소정원
  • 법인명 : 위키리크스한국 주식회사
  • 제호 : 위키리크스한국
  • 등록번호 : 서울 아 04701
  • 등록일 : 2013-07-18
  • 발행일 : 2013-07-18
  • 발행인 : 박정규
  • 편집인 : 박찬흥
  • 위키리크스한국은 자체 기사윤리 심의 전문위원제를 운영합니다.
  • 기사윤리 심의 : 박지훈 변호사
  • 위키리크스한국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위키리크스한국. All rights reserved.
  • [위키리크스한국 보도원칙] 본 매체는 독자와 취재원 등 뉴스 이용자의 권리 보장을 위해 반론이나 정정보도, 추후보도를 요청할 수 있는 창구를 열어두고 있음을 알립니다.
    고충처리 : 02-702-2677 | 메일 : laputa813@wikileaks-kr.org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