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 프리즘] 베오그라드의 '反 푸틴' 러시아 망명객들과 벽화 전쟁
[월드 프리즘] 베오그라드의 '反 푸틴' 러시아 망명객들과 벽화 전쟁
  • 최석진 기자
  • 승인 2023.11.01 05:35
  • 수정 2023.11.01 0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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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2월 24일 세르비아 베오그라드에서 시위대가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사진과 함께 "푸틴의 전쟁범죄를 멈춰라"는 문구의 플래카드를 들고 우크라이나 전쟁을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사진 = 연합뉴스]
세르비아 베오그라드에서 시위대가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사진과 함께 "푸틴의 전쟁범죄를 멈춰라"는 문구의 플래카드를 들고 우크라이나 전쟁을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사진 = 연합뉴스]

세르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에는 우크라이나 전쟁을 피해 도피한 약 20만 명의 러시아인들이 살고 있다. 이 러시아 망명객들은 베오그라드에서 세르비아 우파 민족주의의 위협과 폭력에 직면해 있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베오그라드 러시아 망명객들의 反 푸틴 활동과 이를 저지하는 베오그라드 우파 민족주의 정권에 대해 보도했다. 다음은 이 보도의 전문이다.

러시아 출신의 반전 운동가 일리야 제르노프(19)는 붓과 회색 페인트 통을 들고 베오그라드 시내를 관통해 “우크라이나에 죽음을”이라고 적힌 대형 벽화가 그려진 한 아파트 촌에 도달했다.

제르노프가 벽화 위에 그림을 덧칠하려 하자 세르비아 남자 세 명이 몰려와서 당장 멈추라고 위협했다고 한다. 

“칼을 꺼내 저를 위협하던 그들 중 한 명이 제 오른쪽 귀를 가격했습니다.”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직후 고향인 카잔(Kazan)에서 도망친 제르노프는 이렇게 당시 상황을 들려주었다.  

제르노프는 그때 맞아서 고막이 터졌지만, 푸틴을 찬양하는 벽화를 부분적으로라도 덮을 수 있어서 만족한다고 말했다. 

“러시아인으로서 저는 뭔가를 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꼈습니다. 그 낙서는 러시아의 폭력을 미화했기 때문입니다.”

제르노프는 모스크바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시작된 이후 세르비아로 탈출한 약 20만 명의 러시아인 중 한 명이다. 발칸반도의 국가인 세르비아는 우크라이나 전쟁 때문에 러시아를 탈출한 사람들의 주요 망명지 중 하나가 되고 있다.

유럽의 다른 나라들과 달리 러시아인들은 세르비아에 입국하기 위해 비자가 필요하지 않으며, 러시아와 세르비아가 정교회(Orthodox Christian) 국가라는 역사적 유대 관계 덕으로 러시아인들은 베오그라드에서 대체로 환영을 받는다.

새로 유입된 러시아 출신 이민자들은 베오그라드에서 카페와 갤러리 등 2,000개 이상의 사업체를 운명하면서 부동산 시장에 활력을 불어넣기까지 하고 있다.

그러나 알렉산다르 부치치 총리가 이끄는 세르비아 정부의 점점 강도가 높아지는 민족주의 정서 아래 푸틴 정권이 상당한 지지를 받고 있는 이 나라에서 제르노프와 같은 활동가들은 폭력과 추방의 위협에 직면해 있다.

세르비아는 EU 가입의 열망과 러시아와의 수백 년 된 민족적, 종교적 유대 관계 사이에서 오랫동안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해왔다.

그런데 최근 부치치 정부는 우크라이나 침공과 관련한 對 러시아 국제 제재를 거부했으며, 모스크바는 이전 코소보 지방의 독립에 반대하는 세르비아의 주요 동맹국 역할을 계속하고 있다.

결국 베오그라드에서 위협을 느낀 제르노프는 이후 베를린으로 거처를 바꿨다. 베오그라드를 떠나기 전 그는 같은 생각을 가진 러시아인들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작년에 설립된 반전 단체인 ‘러시아 민주협회(RDS)’에 정식으로 가입했다.

RDS의 설립자인 표트르 니키틴은 “베오그라드 거리에서 낙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고 말하며, 우크라이나 주둔 러시아군과 악명 높은 바그너 용병단을 찬양하는 도시의 다른 벽화들을 예로 들었다.

“우리가 전쟁을 지지하는 벽화 위에 다른 그림을 그려 벽화를 없애면 곧바로 다른 전쟁 지지 벽화들이 생겨납니다.”

니키틴은 최근 문을 연 러시아 레스토랑 ‘TT Bistro’에서 점심을 먹으며 이렇게 말했다.

그는 우크라이나 전쟁이 시작된 직후 많은 러시아 동포들이 전쟁 반대 목소리를 낼 방법을 찾고 있는 것을 보고 RDS를 설립했다고 주장했다. 이후 이 단체는 베오그라드에서 일련의 행진을 이끌었다.

그러다가 2022년 9월 러시아에 동원령이 내려진 이후 수천 명의 러시아인이 징집을 피하기 위해 세르비아로 도피한 뒤부터 RDS의 회원 수가 급증하면서 이 단체는 세르비아 당국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니키틴은 이 단체가 친 부치치 성향의 언론에 부정적으로 묘사된 것을 언급하면서 “우리를 반대하는 캠페인이 미디어를 통해 조직적으로 이루어지는 현상을 보았습니다.”라고 말했다.

세르비아 몇몇 극우 정치인들도 반전 러시아인들이 국가를 해친다고 주장하면서 그들의 유입에 반대하고 나섰다.

극우 민족주의 친크렘린 성향의 세르비아 우파 정당 지도자인 미샤 바치치는 지난 3월 폴리티코(Politico) 잡지에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이것은 자유주의자들의 진정한 혁명입니다. 우리는 전통적인 세르비아 민족주의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지난해 5월 28일 세르비아 수도 베오그라드에서 한 남성이 “푸틴을 멈춰라”라고 쓴 팻말을 들고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비판 시위를 벌이고 있다. [사진 = 연합뉴스]
세르비아 수도 베오그라드에서 한 남성이 “푸틴을 멈춰라”라고 쓴 팻말을 들고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비판 시위를 벌이고 있다. [사진 = 연합뉴스]

니키틴은, ‘러시아 민주협회(RDS)’는 세르비아 정치에 영향을 미칠 생각이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번 여름에 이르러서는 상황이 훨씬 더 악화되었다고 말했다.

그는 RDS 모임이 수시로 중단되었으며, 세르비아 은행들은 반전 자선기금 마련을 위한 계좌 개설에 협조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지난 7월 세르비아 경찰은 국가 안보를 이유로 니키틴의 입국을 금지했었다.

장기 거주 허가증을 갖고 있는 니키틴은 세르비아 여성과 결혼해 세르비아에서 태어난 두 자녀를 두고 있다. 그는 결국 공항에서 하룻밤을 보낸 뒤 입국이 허락됐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베오그라드에서 RDS를 공동 창립한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신의 러시아 반체제 인사인 블라디미르 볼로혼스키가 비슷한 이유로, 즉 국가 안보에 위협이 된다는 이유로 세르비아 거주 허가를 취소당했다.

니키틴과 다른 러시아 운동가들은 자신들에 대한 공격이 러시아 보안 기관과 가까운 것으로 널리 알려진 세르비아 정보국장 알렉산다르 불린의 감독 하에 이루어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세르비아 언론은 불린의 ‘보안정보국(BIA)’이 2021년 베오그라드에서 열린 러시아 반체제 인사들의 회의를 도청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불린은 도청 내용을 모스크바로 가져가 ‘러시아 연방 안전보장회의’ 의장인 니콜라이 파트루셰프에게 넘긴 것으로 알려졌다.

니키틴은 “세르비아 당국은 베오그라드의 반전 운동 지도자들을 탄압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의 입막음을 위한 본보기로 활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국가가 위협하면 사기가 꺾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함께 모여 의견을 표명하려고 노력합니다.”

베오그라드의 콘서트장과 강의실은 러시아인들에게 활기 넘치는 모임 장소로 각광받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시작된 이래로 수십 명의 저명한 러시아 예술가들이 러시아를 떠났다.

베오그라드에서 반전 밴드 콘서트와 예술 행사를 조직한 러시아 시민 예브게니 이르잔스키는 “이 전쟁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하나로 묶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는 이곳에서 끈끈한 커뮤니티를 조성하하고자 합니다.”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이르잔스키 또한 세르비아 당국과 마찰을 빚고 있다.

지난 6월, 그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자신의 견해에 대해 현지 경찰로부터 심문을 받았다.

두 달 후, 그는 세르비아 이민국 관리로부터 소환을 받은 뒤 거주 허가가 취소되었으며, 7일 이내에 떠나라는 통보를 받았다. 

“그들은 내 신념과 공연 기획자로서의 역할 때문에 나를 쫓아내기로 결정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는 이렇게 주장했다.

이후 이웃 몬테네그로로 이주한 이르잔스키는 “초대받은 러시아 음악가와 연사 대부분은 러시아에서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으며, 대부분은 러시아에서 체포될 수 있기 때문에 러시아에 들어가지 못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러한 압력에도 불구하고 베오그라드의 많은 러시아인들은 여전히 ​​저항하고 있다. 최근 일요일, 약 5,000명의 사람들이 ‘MTS 드보라나’ 경기장에 모여 벨로루시-러시아 출신으로 구성된 인기 록 밴드 ‘Bi-2’의 공연을 보았다. 이 밴드는 리드 싱어가 우크라이나 전쟁을 비판한 후 고국 공연이 금지되었다.

콘서트가 끝나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밖에 모였다.

“이런 콘서트에 와서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너무 좋습니다”

전쟁이 시작된 직후 모스크바를 떠난 안톤은 이렇게 말했다. 

“많은 러시아인들이 전쟁에 반대한다는 사실을 세계가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위키리크스한국 = 최석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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