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 투데이] 그리스 유적 반환을 단칼에 거절한 영국 총리와 역풍
[월드 투데이] 그리스 유적 반환을 단칼에 거절한 영국 총리와 역풍
  • 최석진 기자
  • 승인 2023.12.05 05:41
  • 수정 2023.12.05 05: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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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런던 대영박물관에 전시된 파르테논 신전 외벽의 조각들로 '엘긴 마블스'라고 불린다. [사진 = 연합뉴스]
영국 런던 대영박물관에 전시된 파르테논 신전 외벽의 조각들로 '엘긴 마블스'라고 불린다. [사진 = 연합뉴스]

그리스 아테네 파르테논 신전에서 떼어진 뒤 19세기 영국의 손에 넘어간 대리석 조각상들인 ‘파르테논 마블스(Parthenon sculptures)’ 반환 문제가 최근 양국의 갈등으로 비화했다.

지난 1일 정상회담을 코앞에 두고 키리아코스 미초타키스 그리스 총리가 이 조각상 반환을 촉구하자 리시 수낵 영국 총리는 돌연 회담을 취소해버렸다.

이와 관련, 수낵 영국 총리의 과격한 반응이 해당 유물에 대한 관심을 부각시키면서 그리스 뿐만 아니라 영국에서도 역풍 조짐이 보인다고, 4일 <가디언>이 보도했다.

논란이 불거진 이후 아크로폴리스박물관에는 낙관적인 분위기가 흘러넘치고 있다. 영국에서 불어온 미풍이 동굴 같은 박물관 로비, 복도, 갤러리를 가득 채우고 있다. 찬란했던 시대의 영광을 대리석으로 구현한 파르테논 조각상이 있는 바로 그곳이다.

기원전 5세기 고대 유물 반환 문제가 다시 활기를 띠며 표면으로 분출된 지난 일주일 동안 논란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움직였다. 고고학자이자 아크로폴리스박물관 관장인 니코스 스탬폴리디스가 최근 기분이 좋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정말 기분 좋은 한 주였습니다.”

그는 <옵저버>지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저는 이 논란들이 우리에게 유익한 방향으로 전개되어야 한다고 확신하면서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습니다.”

지난 2년 동안, 그리스는 1816년 파산한 엘긴 경(Lord Elgin)으로부터 대영 박물관이 사들인 그리스 보물을 제 위치로 돌려달라고 꾸준히 요구해왔다. 당시 스코틀랜드 출신 엘긴 경이 이 유물을 구입한 경로는 아무리 좋게 보아도 논란을 피할 수 없는 수상한 과정이었다.  

현재 해당 유물들의 반환 논란은 스탬폴리디스 관장이 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먼저 이탈리아는 ‘페이건 조각(Fagan fragment)’을 반환했는데, 이는 한때 여전사이자 여신 아테나를 기리기 위해 축조된, 아크로폴리스의 주요 신전인 파르테논 신전(Parthenon)을 장식했던 기념비적인 프리즈(벽면의 돋을새김)의 일부가 반환된 최초의 사례가 되었다.

그런 다음 바티칸에서 세 개의 유물이 더 제자리로 돌아왔다. 이는 해당 유물들을 원래의 장소로 복원하자는 캠페인의 한 획을 긋는 사건이었다. 

“하지만 영국에 있는 유물 반환은 또 다른 문제입니다.”

현재 런던에 있는 ‘망명’ 대리석 대신에 파르테논 신전이 보이는 장소에 석고 모형을 안치하면서 스탬폴리디스 관장은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영국의 기류에 상당한 변화가 감지되고 있습니다.”

앞서 아테네에서는 리시 수낵 영국 총리가 키리아코스 미초타키스 그리스 총리와의 회담을 갑작스럽게 취소하면서 그리스 총리가 유물 문제를 부각시키려 한다고 비난한 뒤 논란이 일자, 그리스에서는 이를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로 여기고 있다. 영국 총리의 강경 반응에 따른 외교적 “실수”가 역풍을 불러일으키고, 하룻밤 사이에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세계적 관심을 끌게 된 점을 그리스 관리들은 호재로 여기고 있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영국의 보수 언론들(anti-woke)조차 방침을 바꾸고 있다고, 관계자들은 지적한다. 오랫동안 해당 유물 반환을 반대해 온 직설적인 TV 진행자 피어스 모건은 지난주 “이 위대한 예술품이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야 할” 때가 왔다고 주장했다.

그는 미초타키스 총리가 수낵 총리와의 회담을 이틀 앞두고 “유물을 쪼개서 보관하는 것은 모나리자를 반으로 자르는 것과 같다”고 주장한 것이 “설득력 있는 말”이라고 거들었다.

그리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 꼭대기에 있는 파르테논 신전을 방문한 관람객들이 줄 지어 이동하는 모습 [사진 = 연합뉴스]
그리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 꼭대기에 있는 파르테논 신전을 방문한 관람객들이 줄 지어 이동하는 모습 [사진 = 연합뉴스]

그러나 무엇보다 문제를 생생하게 부각한 장면은 영국 왕으로부터 나왔다. 영국의 찰스 왕은 지난주 금요일 Cop28(UN 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 정상회담의 개막 연설에서 그리스 국기가 달린 넥타이와 앞가슴 손수건을 착용하고 나와 이번 유물 반환 논란이 그리스에 도움이 되느냐 마느냐에 대한 논란을 일거에 불식시켰다.

문화외교의 지형이 극적으로 변화하는 시기에, 전 세계적으로 약탈 유물 반환 요구가 불거지고 있는 상황에서, 영국 군주의 의복 선택은 ‘명확한 메시지’를 전달한 것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이와 관련, 찰스 왕은 과거 그의 아버지가 태어난 나라인 그리스를 마지막으로 방문했을 때 헬레니즘과의 “깊은 연관성”을 고백하면서 자신의 “그리스 혈통”을 두고 농담을 하기도 했었다.

니코시아대학의 문화유산법 교수인 아이린 스타마토우디는 “그리스 정부가 아무리 돈을 많이 쏟아부어도 찰스 왕만큼 도움이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1980년대 초, 그리스의 전 문화부 장관 멜리나 메르쿠리가 처음으로 이 대리석 유물 반환 문제를 거론 이후로 지금처럼 논란이 활발하게 타오른 적은 없었다.

“처음에는 영국처럼 토론의 전통을 가진 국가의 지도자가 왜 그리스 총리와의 토론을 거칠게 피하는지 이해가 안 됐습니다.”

스타마토우디 교수는 지난 30년 동안 정부에 자문을 해왔지만 이번처럼 그리스 정체성에 매우 중요한 방향으로 논란이 확대된 적은 없었다고 덧붙였다. 

“일단 논쟁에 불이 붙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이 대리석 유물 반환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요구에 해당합니다. 현재 많은 영국인들이 ‘왜, 안 돼?’라며 지지를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스의 입장은 매우 명확하다고 그녀는 덧붙였다. 그리스는 현재 더도 말고 페리클레스 시대의 걸작인 파르테논 신전을 장식했던 조각들만을 원하고 있다. 

“우리는 에레크테이온(사원)을 장식했다는 이유만을 내세워 카리아티드(여신주 조각)를 돌려달라고 주장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녀는 엘긴 경이 떼어낸 뒤 영국으로 가져가 현재 대영박물관에 전시 중인 여신주 조각을 거론하며 파르테논 신전 부조 대리석 반환은 별도의 문제라는 점을 부각하려 애썼다.

파르테논 신전은 다른 신전들과는 다른 상징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이 대리석 유물 반환 문제가 가장 중요한 것이다. 이 때문에 그리스가 독립한 지 7년 후인 1837년, 아직 제대로 국가도 수립하지 못하던 때 그리스 고고학청은 파르테논 신전 폐허 속에서 첫 문화재 회의를 열었다. 때는 그리스가 오스만제국 통치 하에 있을 시절 스코틀랜드 외교관인 엘긴 경이 해당 유물을 떼어 간 지 거의 30년이 지난 뒤였다. 

영국-그리스 긴장은 시간이 지나면 완화될 것이다. 미초타키스 총리는 수낵 총리의 반발을 길게 문제삼고 싶지 않다고 말하면서 대영박물관 관장인 조지 오스본의 힘을 빌리려는 것처럼 보였다.

논란이 계속되자 영국 재무부장관을 지내기도 했던 오스본 관장은 해당 유물 반환과 관련해 그리스 정부와 “비밀” 회담을 갖을 필요가 있음을 피력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팟캐스트 ‘Political Money’를 통해 수낵 총리를 은근히 비꼬면서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보수당 정부로부터 어떤 특별한 지원도 받지 못할 것이라는 점을 너무 잘 알고 있다”라고 주장했다.

대영박물관 관장이 이처럼 유물 반환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다는 것은 과거라면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지난주 아크로폴리스박물관에서 문화 갈등이 해결될 것이라는 희망을 불러일으킨 것은 역설적이게도 대영박물관의 오스본 관장이었다.

[위키리크스한국 = 최석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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