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의 멘토 로이 콘의 모든 것
도널드 트럼프의 멘토 로이 콘의 모든 것
  • 최석진 기자
  • 기사승인 2020-03-09 18:12:02
  • 최종수정 2020.03.09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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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도널드 트럼프를 마피아 스타일로 훈육하기 전에 로이 콘은 이미 20세기 미국 정치사에서 가장 사악한 권력의 상징으로 악명을 떨치고 있었다
로이 콘이 1963년 메디슨 에비뉴에 있는 자신의 사무실 앞에서 자신의 승용차 1961년 식 시보레 임팔라 컨버터블 안에서 고객과 통화를 하고 있다
로이 콘이 1963년 메디슨 에비뉴에 있는 자신의 사무실 앞에서 자신의 승용차 1961년 식 시보레 임팔라 컨버터블 안에서 고객과 통화를 하고 있다

 

문명이나 정치가 중요한 전환점을 맞이할 때마다 역사적으로 걸출한 인물이 탄생한다. 로이 콘도 이러한 역사의 배후 조종자 중 한 명이었다. 그는 마치 영화 속의 포레스트 검프처럼 중요한 시기마다 모습을 드러냈었다.

로이 콘의 궤적이 2010년대까지 이어지기는 해도 그의 인생의 결정적 계기는 1950년대에 찾아왔다. 밝은 모습으로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그는 1951년의 로젠버그 간첩 재판에서 검사로서 스스로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였다.

조셉 메카시 상원의원의 법률자문 책임을 맡으면서 메카시가 레드 콤플렉스를 이용해서 공포와 협박 정치의 광란을 펼칠 때 그 도구 역할을 자임했다. 미국 민주당은 로이 콘이 공화당과 밀접하게 연관되어있는 기회주의자라고 전략적으로 몰아붙였다.

로이 콘은 동성애자임을 숨기고 살다가 1986년 에이즈로 희생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공포 마케팅을 활용해서 종교재판 식으로 정부 내의 동성애자들을 숙청하는 데 앞장섰다.

메카시즘부터 조직폭력과의 연관성, 그리고 도널드 트럼프의 지도교사 역할까지 로이 콘의 드러난 면모는 아무리 뜯어봐도 파렴치한 인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가 얼마나 교묘하게 수십 년 동안 미국 정치를 좌지우지했는지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내부 깊숙이 들여다보아야만 알 수 있다.

로이 콘의 유년시절

로이 마커스 콘은 1927년 2월 20일 뉴욕에서 태어나, 파크 에비뉴에 있는 아파트에서 자랐다. 아버지인 알버트 콘은 주 대법원의 상소법원 판사로 권력을 휘두른 인물이었다.

로이 콘의 어머니 도라 마커스는 또래들보다 뛰어난 지능을 나타낸 어린 아들에게 맹목적인 사랑을 퍼부었다. 그는 브롱크스에 있는 부자 동네 리버데일의 필드스톤 스쿨을 다녔고, 콜롬비아 대학과 20살이 되어 콜롬비아 로스쿨을 졸업했다.

“그는 조숙하고 총명하며 자신만만한 젊은이였습니다.”

그의 동료 중 한 명은 나중에 이렇게 회상했다.

“하지만 그는 윌리엄 레밍턴 위증 재판이나 로젠버그 간첩 재판, 그리고 공산당 최고지도자들에 대한 뉴욕 재판 같은 굵직한 사건들을 유능하고 정열적으로 이끌었지요.”

로이 콘은 21살에 변호사협회 회원이 된 즉시 가족의 힘을 동원해서 맨해튼에 있는 미국 연방지방검찰청의 스태프로 등극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이후 재빠르게 검사보에 올라 자신의 트레이드마크가 되는 공격적이고 날 선 활약을 펼쳐보였다.

로이 콘은 소련 간첩 혐의와 원자폭탄을 비밀리에 거래했다는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두 미국인, 줄리어스 로젠버그와 에델 로젠버그 재판을 통해 자신이 무시무시한 괴력의 소유자라는 사실을 만천하에 드러냈다.

로젠버그 부부가 유죄를 선고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데에는 로이 콘이 에델의 남동생 데이비드 그린글래스를 직접 심문한 것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로젠버그 부부의 간첩 재판

미국이 소련과 전쟁 중이 아니었으므로 로젠버그 부부는 반역 혐의로 기소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간첩 혐의와 원자폭탄 제조 비법을 팔아넘겼다는 혐의로 기소되었다. 그리고 처벌은 가혹했다.

1951년의 재판은 뉴욕 주 남부 연방법원에서 시작되었다. 로젠버그 부부와 또 다른 피고인인 모톤 소벨은 끝까지 혐의를 부인했다. 엠마뉴엘 블로크와 알렉산더 블로크가 변호를 맡았고, 로이 콘이 검사였다.

이 재판은 레드 콤플렉스 광풍의 도화선 역할을 했다. 1951년 미국의 권력 내부에 침투하려는 공산분자에 대한 히스테리는 극에 달해있었다.

로젠버그 부부가 유죄라는 결정적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이때 에델 로젠버그의 남동생 데이비드 그린글래스로부터 자백을 이끌어낸 인물이 로이 콘이었다. 이로써 부부는 극형을 언도받게 된다.

그린글래스는 로스 알라모스 국립연구소에서 기계 제작자로 일하면서 미국의 폭탄 개발과 관련된 사람들과 자료들에 접근할 수 있었다. 그의 매부인 줄리어스 로젠버그는 미국공산당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이미 해고된 상태였다.

그린글래스는 매부인 로젠버그가 원자폭탄 제조기법이 든 기밀문서를 소련에 넘겨주라고 부탁했다는 증언을 했다. 이 문서들은 그린글래스의 지인인 해리 골드에 의해 러시아인에게 넘어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린글래스는 누나가 문서를 타이핑하고 그것을 소련인과 공유한 것을 목격했다는 말도 했다.

구소련이 1949년 9월 최초로 원자폭탄 발사에 성공한 데에는 스파이들을 통해 획득한 정보들이 큰 공헌을 했다는 의심이 팽배한 가운데 나온 이 증언으로 인해 로젠버그 부부의 삶은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이 모든 진실이 밝혀진 것은 2003년이 되어서였다.

TV 프로그램 ‘60 미니츠(60 Minutes)’와의 회견을 통해 그린글래스는 자신이 서약을 하고 거짓말을 했음을 고백했다. 그는 자신의 누이가 타이핑을 하거나 문서를 누군가와 공유하는 사실을 본 적이 없었다. 그는 또 자신의 누이를 죄인으로 몰도록 압박을 가한 이도 로이 콘이었음을 털어놓았다. 그의 거짓말이 누나를 죽인 것이다.

당시 로젠버그 부부는 협상 제안을 받았었다. 유죄를 인정하면 사형은 면해준다는 제안이었다. 하지만 부부는 이를 거절하고, 1951년 4월 6일 사형을 언도받았다. 소벨은 30년 형을, 그린글래스는 15년 형을 언도받았다.

로이 콘은 이 재판을 통해 그의 저열한 술책을 세상에 최초로 선보였다. 그의 전술은 무고한 사람들일지라도 전기의자로 보낼 수 있는 자신의 탁월한 능력을 통해 정당함을 보장받는 것이었다.

1983년 10월 뉴욕시의 트럼프 타워 개막식에 함께 참석한 로이 콘과 도널드 트럼프
1983년 10월 뉴욕시의 트럼프 타워 개막식에 함께 참석한 로이 콘과 도널드 트럼프

 

메카시 청문회

로젠버그 재판으로 유능함을 인정받자마자 그는 FBI 국장인 에드거 후버 밑에서 일을 하다가, 곧 이어 메카시 상원의원에게 발탁되었다. 그의 진면목이 드러난 때는 바로 그때였다.

로이 콘은 메카시 진상조사 소위원회의 책임 법률고문 자리를 맡으면서, 대중의 호불호를 떠나, 유명인사가 되었다. 그는 자신이 노리던 바를 달성하게 되었던 것이다.

1954년의 육군-메카시 청문회 광풍은 ‘보라색 공포(Lavender Scare)’ 덕택에 가능했다. 로이 콘과 메카시는, 러시아 사람들이 미국 정부 관리들의 동성애 증거를 빌미로 그들을 간첩으로 만들었다고 주장하면서 반공산주의 정서를 부추겼다.

이러한 공포 마케팅은 매우 성공적으로 작동해서, 1953년 4월 29일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연방정부 내에 동성애자들이 발을 붙일 수 없도록 하는 법률안에 서명하기에 이르렀다.

로이 콘과 반공산주의 운동가 데이비드 샤인은 급속히 사이가 가까워졌다. 두 사람은 ‘(공산주의에 대한) 철저한 단속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선전하기 위해 18개월 동안 군부대를 돌아다니기도 했고, 해외에 거주 중인 미국인들이 공산주의 위험성을 올바르게 파악하고 있는지를 점검하기도 했다.

데이비드 샤인이 징집되자 로이 콘은 샤인이 특별대우를 받도록 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이 과정에서 만일 군이 그의 요구를 거부한다면 ‘군대를 날려버리겠다’는 협박도 서슴지 않았다.

1954년의 육군-메카시 청문회는, 공산주의자들이 국방성에 침투했다는 메카시 자신의 놀라운 주장뿐만 아니라 이런 식의 호전적이고 공격적인 분위기 때문에 열릴 수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에게 크나큰 성취를 안겨주었을지도 모를 계책이 오히려 재빠르게 그들의 발목을 잡았고, 로이 콘과 메카시는 반대로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육군은 두 사람을 샤인과 관련해서 부당한 압력을 행사한 혐의로 고발했다. 이에 대해 두 사람은, 육군이 메카시의 군 내 공산분자 색출 활동을 잠재우기 위해 샤인을 인질로 활용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최악의 순간은 육군의 특별조사관 조셉 웰치가 믿을만한 근거를 가지고 육군장관이었던 로버트 스티븐스와 샤인이 함께 찍은 사진을 조작한 혐의로 로이 콘을 고발하면서 벌어졌다.

물론, 가장 구역질나는 순간은 메카시가 웰치가 고용한 젊은 검사를 협박할 때였다. 이에 따라 육군 특별조사관은 방어를 위해 개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의원님, 저는 지금 이 순간까지 당신이 얼마나 잔인하고 무모한지 도무지 헤아릴 길이 없었습니다.”

웰치는 이렇게 말했었다.

당시 대략 2천만 명의 미국인들이 이 증언을 TV로 지켜보았는데,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그때까지도 메카시라는 인물이나 그의 전술에 대해 잘 알지 못했었다. 사람들은 그가 그저 공산주의 위험성을 알리기 위해 분투한다고 믿었을 뿐이었다.

로이 콘이 메카시를 향해 그만하라고 신호를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메카시의 공격적인 질문을 제지하지 못했다. 증언 중 끊임없이 공격을 받던 웰치는 마침내 저 유명한 질문을 던지면서 메카시를 궁지에 몰아넣었었다.

“의원님, 우리 이제 더 이상 저 젊은 친구를 저격하지 맙시다. 이 정도 하셨으면 됐습니다. 이렇게 긴 시간을 보내면서도 의원님에게는 품위라는 것이 있기나 한 겁니까? 예의가 조금이라도 남아있기나 한 겁니까?”

이 시점을 기화로 대중의 여론은 극적으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그러자 메카시 상원의원은 공포 마케팅에서 논리로 선회하였다. 그 해 말이 되자 메카시의 동료들도 그에게 비난을 퍼부었다. 하지만 메카시의 동료 의원들은 그가 사람들의 인생을 망쳤기 때문이 아니라 상원의 명성에 먹칠을 가하고 민주 절차를 위험에 빠뜨렸다는 이유로 그를 비난했다.

그러는 사이 로이 콘은 교묘하게 위기를 빠져나갔다. 그는 워싱턴 D.C.를 떠나 뉴욕시로 돌아와서 변호사 일을 계속했다. 그는 가톨릭교회 지도자나 프로 스포츠 업계의 조지 스타인브레너에서부터 스튜디오 54의 대표나 조직폭력배, 그리고 루퍼트 머독까지 모든 명사들의 변호를 떠맡았다. 그의 의뢰인 중에는 도널드 트럼프도 있었다.

로이 콘은 어떻게 트럼프의 멘토가 되었나

로이 콘은 변호사로 이력을 쌓았지만 그는 장기적으로 도움이 될 만한 사람들을 추려서 그들을 위한 해결사 노릇을 하는 데에서 탁월한 수완을 발휘했다. 그가 고객으로 관리하는 인맥은 어마어마했다.

메카시의 책임 법률고문 역할이 끝나자 로이 콘은 로저 스톤의 멘토 역할을 떠맡았다. 로저 스톤은 도널드 트럼프를 대통령 자리에 올리기 전에 리처드 닉슨을 위한 최고의 해결사로 등극하게 된다.

로저 스톤은 은혜를 잊지 않고 로이 콘을 로널드 레이건에게 소개하고, 로이 콘은 다시 로널드 레이건을 루퍼트 머독에게 소개했다.

도널드 트럼프와 관련해서는 로이 콘은 1973년 뉴욕시의 한 나이트클럽에서 공산주의자 사냥꾼을 만나게 된다. 그때 트럼프는 20대를 보내면서 인종주의에 기반한 부동산 사업 때문에 소송을 치르고 있었다.

“나는 성공해서 자리 잡은 로펌들과 이틀을 보냈는데, 그들 모두 우리보고 ‘포기해라. 이렇게 해라. 여기에 서명해라...이런 식이 다였지요.”

트럼프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 경력을 살펴봤더니 당신도 나처럼 약간 제 정신이 아니더군요. 그러고도 성공가도에 올랐어요. 우리 만날 수 있을까요?”

로이 콘의 대처 방식은 즉석에서 트럼프를 사로잡았다.

“내 방식은 상대방에게 지옥에나 떨어지라고 욕을 하는 겁니다.”

로이 콘은 이렇게 말했다.

“그러고 나서 법정에서 싸우는 거지요.”

로이 콘은 엘리트로서의 매력을 지녔고, 유명 인사들을 친구로 두고 그들을 고객으로 만들었다. 로이 콘의 친구들에게 거침없는 그의 저돌적 방식이야말로 바라던 바가 아닐 수 없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위해 싸워줄 투견이 필요했던 것이다.

“로이는 항상 공격적인 전략이 준비되어있었지요.”

로저 스톤은 이렇게 말했다.

“전쟁의 법칙이 그렇지 않습니까? 적지에서 싸울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논쟁의 주제는 우리가 결정해야하지요. 나는 트럼프가 로이로부터 그런 점을 배웠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로이로부터 그렇게 배웠으니까요.”

2019년 공개된 로이 콘의 FBI 파일들에는 법률 자문이 필요할 때 트럼프가 애처롭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등장한다.

“나의 로이 콘은 어디에 있는 거야?”

이 파일들을 들여다보면 로이 콘이 얼마나 부패한 인간인지가 여실히 드러난다. 그는 카민 갈란테나 ‘뚱뚱한 토니’라고 불린 살레르노 같은 조직폭력배를 변호하는 일에서부터 1986년 의뢰인을 갈취해서 변호사협회에서 자격이 박탈되기까지 꺼리는 일이 없었다. 아마도 그에게는 동성애 이력만이 유일한 수치거리였을 것이다.

“내 사촌 로이 마커스 콘은 메커시 상원의원의 법률고문이나 마피아 보스들의 법률자문에서부터 도널드 트럼프의 멘토까지 가리는 일이 없었습니다.”

데이비드 마커스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는 유대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그 흔적을 지워버렸습니다. 또, 그는 민주당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민주당원들에 오명을 뒤집어씌웠습니다. 그리고 그는 동성애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동성애자들을 탄압했습니다.”

로이 콘은 변호사 자격이 박탈되고 몇 주 후인 1986년 8월 2일 에이즈 관련 질병으로 사망할 때까지 동성애 사실을 숨겼다. 그는 극단의 기회주의자라는 유산을 남겼다. 1984년 그가 인터뷰를 통해 세상에 밝힌 도널드 트럼프에 대한 생각은 오싹할 정도로 선견지명을 드러내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는 오늘날 미국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 명일 겁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뉴욕에서 출발한 유성(遊星)은 계속 위로 날아가 미국을 접수하고 전 세계를 접수할 것입니다. 도널드는 그냥 최고가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아직 출시되지 않은 HBO의 다큐멘터리 ‘나의 로이 콘은 어디에 있는가?’는 두 사람의 관계를 추적하고 있다. 그리고 곧 모습을 드러낼 다큐멘터리 ‘왕따, 겁쟁이, 희생자 : 로이 콘 이야기’는 더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https://allthatsinteresting.com/roy-cohn

dtpchoi@wikileaks-kr.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