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백악관 X파일(73) 민주화추진협의회 탄생... 김영삼을 주목하기 시작한 주한미대사관
청와대-백악관 X파일(73) 민주화추진협의회 탄생... 김영삼을 주목하기 시작한 주한미대사관
  • 특별취재팀
  • 기사승인 2020-06-26 07:02:47
  • 최종수정 2020.06.19 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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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백악관 x파일
청와대 백악관 x파일

전두환 정권은 김영삼의 건강상태가 악화된 시점인 1983년 5월 30일 김씨의 연금을 해제한다고 발표했다.

김영삼은 김덕룡 비서실장을 통해 "연금의 해제는 지극히 당연하고 마땅한 조처이나 단식을 시작한 이유가 아니고 요구사항도 아니다"면서 <국민에게 드리는 글>에서 명시한 5개항의 민주화 요구를 정부당국이 받아들일 것을 거듭 촉구했다.

6월 1일. 전 신민당 및 통일당 소속 의원 32명과 원외인사 7명 등 39명은 회합을 갖고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국선언문 및 결의문’을 채택하고 민주화를 위한 범국민적 연합전선을 구축키로 하는 한편, 15일째가 되는 김영삼의 단식 중단을 종용키로 합의했다.
 
이들은 결의문에서 ① 김씨가 제시한 5개항의 민주화요구 지지 ② 민주화를 위한 범국민적 연합전선 구축 ③ 당국의 성의있는 결단과 대화촉구 ④ 단식중단 호소 등을 결의했다.

이들 중 일부는 6월 2일 서울대병원에서 다시 모임을 갖고 민주화추진을 위해 구성키로 한 범국민적 조직의 명칭을 '민주국민협의회'로 정하고 의장에 이민우, 대변인에 김덕룡을 지명했다.
 
단식이 20일을 넘기게 되자 의료진의 혈액검사 결과 건강상태가 위험수위라고 경고했다.

측근들의 설득으로 김영삼은 23일 만에 단식을 중단하고, 그 후 20여일의 회복치료를 받은 뒤 6월 30일 퇴원했다. 

1983년 6월 9일 김영삼은 23일간의 단식 중단을 선언했다. ⓒ김영삼 자서전
23일간 단식투쟁을 감행한 김영삼. 정권의 조치와 의료진의 강력한 경고로 1983년 6월 9일 단식을 중단했다. ⓒ김영삼 자서전

18일부터 6월 9일까지 23일간 전개된 김영삼 전 신민당 총재의 목숨을 건 단식투쟁은  새로운 정치결사체인 민주화추진협의회를 잉태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가택연금이 풀린 김영삼은 상도동계 친목모임인 민주산악회를 구성하는 한편, 미국에 망명중인 김대중의 동교동계 측과 제휴를 모색했다.

단식투쟁 2개월 후인 1983년 8월. 서울과 워싱턴에서 <김영삼-김대중 8.15공동선언>이 발표됐다.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두 정치적 경쟁자가 힘을 합치기로 한 것이다. '80년 서울의 봄' 이래 갈라섰던 야권의 양대진영은 공동 반독재투쟁을 벌여나가기로 했다.

이듬해인 1984년 2월 25일 전두환 정권은 정치활동 금지자 명단에서 700여명의 이름을 삭제했다. 그러나 정치인 중 99명은 그대로 남겨두었다. YS는 이 블랙리스트에 포함돼 있었다.

1984년 5월 17일 김영삼의 상도동계와 김대중의 동교동계는 광주민주항쟁 4주년에 즈음해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를 결성했다.
 
민추협은 84년 5월 18일 김영삼-김대중 공동의장 이름으로 발표한 결성선언문 <민주화 투쟁선언>을 발표했다.

이들은 선언문에서 "우리는 군인의 정치개입이 민주헌정을 후퇴시키고 민족사의 불행과 안보상의 불안을 초래한다는 역사적 경험을 토대로 군인이 본연의 사명인 신성한 국방의무로 복귀할 것을 주장하고 시민민주주의를 실현시키기 위해서 투쟁한다"는 등 9개항을 제시했다.

이 때까지만 해도 아무런 힘이 없던 민추협이 총칼로 무장한 전두환 정권을 압박하는 강력한 세력으로 커질 것이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1984년 12월 11일, 김영삼 민추협 공동의장이 민추협 사무실에서 이듬해 2.12총선에 대한 방침을 발표하고 있는 모습. 당시 김대중 공동의장은 국내에 들어올 수 없는 상황이어서 김영삼 왼쪽에 앉아 있는 김상현 씨가 공동의장 대행을 맡고 있었다. ⓒ 민청련동지회
1984년 12월 11일, 김영삼 민추협 공동의장이 민추협 사무실에서 이듬해 2.12총선에 대한 방침을 발표하고 있는 모습. 당시 김대중 공동의장은 국내에 들어올 수 없는 상황이어서 김영삼 왼쪽에 앉아 있는 김상현 씨가 공동의장 대행을 맡고 있었다. ⓒ 민청련동지회

김대중 문제에 집중하던 주한미대사관, 김영삼을 주목하기 시작하다

주한미대사관은 김영삼 단식투쟁 과정을 수시로 상세하게 백악관에 타전했다.

그동안 야당 지도자로서 김대중의 일거수 일투족을 살피면서 보호했던 미 정부는 이 때부터 김영삼을 본격적으로 함께 주목하기 시작했다.

1979년 10월 박정희 저격사건에 이은 신군부의 12.12 쿠데타,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과 유혈진압, 1981년 2월 전두환 신군부 정권의 출범 등 대한민국의 최대 격변의 시기에 주한미대사를 맡아 한-미 정권의 막후 조정 역할을 했던 윌리엄 글라이스틴 대사는 1981년 10월 ‘광주사태 미국 지원 논란’ 수수께끼를 남긴 채 한국을 떠났다.

1981년 1월 부임한 리처드 워커 대사는 아스팔트처럼 단단한 군사정권의 토대 위에서 민주화의 싹이 트고, 아스팔트를 쪼개면서 줄기가 굵어져 결국 거대한 나무로 자라는 과정을 지켜보게 된다.

글라이스틴 대사와 마찬가지로 워커 대사 역시 전두환 정권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민주 인사들에 대해 비밀리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막후에서 정보를 수집하고, 백악관, 국무부를 통해 전두환 정권에 직-간접의 압력을 가하도록 했다.  

워커 대사는 주한미대사관 측근들에게 김영삼과 관련, “김영삼은 조직력과 비폭력적인 방법을 통해 승리한다는 접근 방식을 택하고 있는데, 야권 지도자가 할 수 있는 가장 현명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며 인권 차원에서 지원할 것을 강조했다.

워커 대사는 YS 캠프와 긴밀한 접촉을 유지했다. 정치과 직원이었던 스펜스 리처드슨은 YS와 그의 가족, 지지자들을 수시로 만나 정보를 수집해 워커 대사에게 전달했고, 워커는 정보들을 정리해 수시로 국무부와 백악관에 타전했다. 

[특별취재팀= 최정미, 유진, 박예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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