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 인사이드] 구소련 연방 소속이었던 나라들의 어제와 오늘
[월드 인사이드] 구소련 연방 소속이었던 나라들의 어제와 오늘
  • 최석진 기자
  • 승인 2022.03.12 07:03
  • 수정 2022.03.12 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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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소련 해체 당시 의사당에서 최후 저항을 벌이던 공산주의자들을 진압하는 장갑차들과 피폭당하고 있는 의사당 건물 [사진 = ATI]
구소련 해체 당시 의사당에서 최후 저항을 벌이던 공산주의자들을 진압하는 장갑차들과 피폭당하고 있는 의사당 건물 [사진 = ATI]

1922년 러시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그리고 트랜스코카시아(코카서스 산맥 남쪽의 코카시아 국가들인 조지아, 아제르바이젠, 아르메니아) 연합으로 출범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USSR)’은 15개국으로 늘어나 초강대국이 되었다. 거의 130개 민족으로 구성된 구소련은 11개의 시간대를 지녔을 정도로 광대한 영토를 차지했다.

브루클린 대학 역사학과의 브리지드 오키프 교수에 따르면, 소비에트공화국연방 초창기 광대한 영토에 걸쳐있던 비러시아 민족주의자들의 반란을 두려워한 볼셰비키들이 하나의 영토와 언어, 그리고 문화적 수단들을 활용해 인민들에게 사회주의적 가치와 실행력을 주입시키려 노력했다.

“여러 측면에서 볼셰비키들의 국가 정책은 의도한 대로 들어맞았습니다. 비러시아 인민들을 진보하는 소비에트 국가, 사회, 경제, 문화로 통합하는 데 성공한 것이지요.”

오키프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이 정책은 소비에트 연방 산하 인민들의 생각을 국가라는 조건에 복속시키도록 했으며, 민족성보다는 소비에트의 정치를 중히 여기도록 강요했습니다.”

오키프 교수는 구소련이 1991년 민족주의 노선에 따라 해체되었을 때 “유라시아 전역의 정치인들과 인민들은 공히 소비에트 시절의 기억을 고유하면서 각기 스스로 독립적인 민족국가를 구성할 충분한 준비가 되어있던 상태였다”고 말한다. 일부 나라들은 시장경제를 근거로 하는 친서방 민주체제로 변화되었는가 하면 일부 나라들은 러시아와 보조를 함께한 상태로 남게 되었다.

다음은 구소련 해체 이후 수십년 동안 이들 15개 나라들이 겪어온 변화와 현주소이다.

러시아

구소련 해체 후 위대한(?) 공화국 러시아는 정치가 붕괴되고 중앙집권 경제체제가 민영화되는 혼란을 겪었다. 과두정치의 소수 권력자들이 어마어마한 부를 축적한 반면에 대부분의 러시아 국민은 고물가와 물품 부족에 시달렸다.

러시아연방의 대통령 보리스 옐친은 군대를 동원해 의사당 건물을 포격하면서 1993년의 헌법적 위기를 종식시키고 1년 뒤 연방에서 탈퇴한 체첸공화국을 상대로 참혹한 전쟁을 벌였다.

옐친 정부는 1997년 체첸공화국과 일단 휴전을 체결했다가, 1999년 모스크바와 기타 도시들에서 벌어진 폭탄 테러 행위가 체첸 전사들과 연관이 있다고 주장한 후 1999년 체첸을 재침공했다. 당시 총리였던 블라디미르 푸틴이 체첸을 상대로 하는 군사 대응을 이끌었다.

1999년 12월 31일 옐친은 사임을 발표하면서 푸틴을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임명했다. 그때부터 대통령과 총리직을 번갈아 수행하던 현재의 푸틴 대통령은 정적들을 투옥, 독살, 살해하는 한편 미디어를 장악하고 권력을 강화하면서 대통령의 임기 제한을 없애버렸다. 푸틴은 글로벌 파워로서 러시아를 재정립하고, 이전 소비에트연방 소속 국가들에 미치는 서방의 영향을 약화시키려는 의도 하에 체첸에서 전쟁을 계속하고, 2014년에는 크림반도를 합병하고, 드디어 2022년에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게 되었다.

지난 2010년 유혈 소요사태가 발생한 키르기스스탄 수도 비슈케크의 모습 [AFP=연합뉴스]
지난 2010년 유혈 소요사태가 발생한 키르기스스탄 수도 비슈케크의 모습 [AFP=연합뉴스]

우크라이나

풍부한 밀 생산으로 한때는 유럽의 곡창지대라고까지 알려졌던 우크라이나는 구소련 농업 생산의 1/4일 차지했었다. 우크라이나의 정치는 독립 이후 친러시아와 친서방 사이를 왔다갔다 했다. 1994년 우크라이나는 선거를 통해 권력을 평화적으로 교체한 구소련 소속 공화국 최초의 나라가 되었고, 이후 10년 사이에 자본주의 국가로 변화했다.

2004년 부정선거를 통해 친러시아 후보인 빅토르 야누코비치가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를 선언한 이후 평화적인 오렌지 혁명(Orange Revolution)이 일어나 선거를 새롭게 치른 결과 친서방 후보인 빅토르 유시첸코가 권력을 잡았다. 빅토르 유시첸코 대통령은 이후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가입을 추진했다.

2010년에는 빅토르 야누코비치가 권력에 복귀해 유럽연합(EU) 가입 협정에 서명을 거부하자 마이단에서 시위가 벌어져 친서방 세력이 다시 권력을 잡자 야누코비치는 러시아로 피신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몇 주 뒤 우크라이나 동부에서 친러시아 반군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사이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점령했다. 2019년에는 전직 배우이자 코미디언인 볼로디미르 젤렌스키가 새로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2022년 2월 21일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은 텔레비전 연설을 통해 우크라이나가 한 번도 정상적인 국가였던 적이 없다고 부당한 주장을 하면서,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역사와 문화, 정서를 공유하는 영토”라고 말했다. 그로부터 몇 일 뒤 러시아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의 군사작전을 펼치면서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

“오렌지 혁명부터 마이단 시위, 그리고 러시아의 침략에 대항해 국가를 수호하겠다는 우크라이나 국민의 단호한 의지까지 우리는 소비에트의 유산에 맞서 자신들의 길을 개척해나가려는 주권국가 국민의 결기를 목격하고 있습니다.”

오키프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이것은 푸틴이 러시아가 자신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독립된 민족국가로서 현대 우크라이나에 그토록 집착하고, 저항에 놀라고, 전투에서 쉽게 승리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벨라루스와 몰도바

KGB와 고도로 중앙집권화된 경제체제 같은 소비에트의 자취들은 독립한 벨라루스에서도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독립 후의 유일한 대통령 알렉산더 루카센코는 부정선거, 정적 탄압, 언론 탄압 등의 폭압적 수단을 활용해 절대 권력을 강화하고 있다. 구소련 설립 시 함께했던 벨라루스는 민영화를 거부하고 러시아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몰도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Moldavian SSR)은 1939년 구소련이 나치 독일과 비밀 불가침 협정을 맺은 뒤 1940년 소련에 병합되었다. 독립 후에는 친러시아 세력과 친유럽연합 세력 사이에 권력투쟁이 벌어졌다. 정치 격변과 부패가 유럽 최대 빈국인 몰도바에 몰아치는 사이 이 나라는 시장자본주의로 조심스럽게 변화하면서 유럽연합의 완전한 정회원이 되었다.

카자흐스탄

니키타 흐루쇼프 통치 하인 1936년 구소련에 병합된 카자흐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Kazakh SSR)은 초원에서 밀을 경작하던 슬라브 정착민들과 함께 식민지에 복속되어 소련 우주 프로그램의 진앙지가 되었다.

독립 뒤 카자흐스탄은 경제의 민영화를 추진해서, 이전 소비에트공화국연방 소속 국가들 중 러시아를 제외하고 가장 많은 원유를 보유하고 있다는 장점을 활용해 20년 만에 10배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했다.

현재 카자흐스탄은 ‘국가의 아버지(father of the nation)’를 자처하는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이 거의 30년 동안 권력을 유지하고 있다. 그는 정적을 탄압하는 독재를 뛰어넘어 카자흐족의 문화를 되살리고, 자신의 이름을 딴 새로운 수도 건립을 추진했다.

카자흐스탄은 서방과 러시아 모두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데, 2022년 액화가스 가격 폭등과 만연한 불평등 때문에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을 때 러시아와 서방 모두의 도움으로 이를 물리칠 수 있었다.

발트해 연안 국가들...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소비에트연방은 1939년 나치 독일과 비밀리에 불가침협약을 맺고, 발트해 연안 독립국가들인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를 위협해서 1940년 연방 산하의 새로운 공화국들로 흡수했다. 이들 나라들에서는 나치 치하 3년 동안 수십만 명이 목숨을 잃었는데, 희생자 대부분이 유대인이었다. 하지만 1944년 구소련의 지배 체제 하에서도 고통을 줄어들지 않았다. 

구소련은 대규모 강제이주 정책의 일환으로 발트해 연안에서 수십만 명을 강제수용소나 시베리아의 집단농장, 그리고 중앙아시아로 추방했다.

동유럽 공산정권의 몰락 뒤 리투아니아는 1990년 3월 구소련 소속 국가들 중 최초로 독립을 선언했다. 당시 소련 최고 지도자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1991년 1월 경제 봉쇄 정책과 붉은군대를 파병했지만 독립 열기를 잠재우지는 못했다. 1991년 8월 모스크바에서 강경 공산주의자들의 쿠데타가 실패한 뒤 구소련은 발트해 연안 국가들의 독립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발트해 연안 국가들은 안정적인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채택하면서 서방 쪽으로 기울어졌다. 이들 세 나라들은 2004년 유럽연합과 나토의 정식 회원이 되었고, 에스토니아가 2011년 유로를 공식 통화로 채택한 뒤 2014년에는 라트비아가, 2015년에는 리투아니아가 그 뒤를 이었다.

지난 2019년 조지아 수도 트빌리시의 의사당 앞에서 시민들이 사흘째 반(反) 러시아 집회를 열고 있다. 이들은 시위 때 강경진압으로 시위대 수백 명이 다친 것에 대해 책임을 지고 내무장관은 사퇴하라고 이날 촉구했다. [트빌리시 EPA=연합뉴스]
지난 2019년 조지아 수도 트빌리시의 의사당 앞에서 시민들이 사흘째 반(反) 러시아 집회를 열고 있다. 이들은 시위 때 강경진압으로 시위대 수백 명이 다친 것에 대해 책임을 지고 내무장관은 사퇴하라고 이날 촉구했다. [트빌리시 EPA=연합뉴스]

중앙아시아 국가들...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멘과 우즈베크 사회주의 공화국은 1925년 소비에트연방에 가입했으며, 1929년에는 타지크 사회주의 공화국이, 1936년에는 키르기스 사회주의 공화국이 그 뒤를 이었다. 구소련의 통치자들은 집단농장을 강제로 추진해 대다수가 무슬림들이었던 이 지역들을 변모시키는 과정에서 1930년대 기근을 유발했으며, 강제이주 정책도 동반했다.

독립 뒤 철권 통치자들이 에너지가 풍부하고 산악지대로 구성된 이 국가들의 권력을 장악했다. 이전 구소련 소속이었던 이들 나라들은 경제적으로는 러시아에 의존하고 있지만 2001년 9/11 테러 공격 뒤 아프가니스탄 전쟁 동안 미군과 나토군이 자신들의 영공과 군사 시설들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가했다.

키르기스스탄은 처음에는 1991년 자유주의를 신봉하는 아스카르 아카예프가 대통령이 된 뒤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민주적인 국가 중 하나로 우뚝 섰다. 하지만 이 나라는 극심한 경제난을 겪은 뒤 아카예프 대통령이 점점 권위주의 노선을 걸으면서 반부패, 친민주주의 시위가 벌어져 2005년 튤립혁명을 통해 아카예프 대통령이 권좌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아카예프의 뒤를 이은 통치자도 2010년 비슷한 과정을 거쳐 자리에서 물러났다.

독립 뒤 1992년 타지키스탄에서는 공산주의자들과 친서방 민주 개혁진형과 이슬람주의자들 사이에 5년 동안 내전이 발발했다. 러시아 군대를 등에 업은 에모말리 라흐몬 현 대통령이 1992년 11월 권력을 차지하고 정적과 언론을 탄압하는 철권통치를 실시 중이다. 만연한 부패로 얼룩진 현재의 권위주의 정권은 러시아의 경제원조에 전적으로 메달리고 있다.

막대한 천연가스 매장량 덕택으로 해외 투자자들을 끌어들이고 있는 투르크메니스탄은 구소련 공화국 중 가장 권위주의적인 국가로 손꼽히고 있다. 공산당 소속의 사파르무라트 니야조프 대통령이 구소련 해체 후부터 권좌를 유지한 채 개인숭배를 강화하면서 그의 동상들이 세워지고, 그 자신과 그의 가족들의 이름을 딴 기념일들이 생기고 있다. 니야조프 대통령이 2006년 사망한 뒤 그의 후계자인 구르반굴리 베르디무함메도프 대통령이 권위주의 정권을 이어받아 통치하고 있다.

우즈베키스탄에서는 공산당 지도자인 이슬람 카리모프가 초대 대통령 자리를 손쉽게 거머쥐고, 2016년 사망할 때까지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이 나라를 통치해왔다. 현재는 카리모프의 후계자인 샤브카트 미르지요예프가 대통령에 올라 권력을 강화하며 정적을 탄압하는 한편으로 러시아와의 관계를 더욱 공고히 하고 있다.

코카서스 산맥 남쪽의 트랜스코카시아 국가들...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젠, 조지아

트랜스코카시아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구소련 체제에 합류했던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젠, 조지아는 1936년 각기 별도의 공화국으로 독립했다. 소비에트의 통치는 농업국가였던 이들 나라들에 도시화와 산업화를 추진했다.

아르메니아 군인들이 아르메니아 타부시 지역 최전방 진지에 배치되고 있는 모습.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사이에 국경 분쟁이 그치지 않고 있다. [=AP/뉴시스]
아르메니아 군인들이 아르메니아 타부시 지역 최전방 진지에 배치되고 있는 모습.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사이에 국경 분쟁이 그치지 않고 있다. [AP= 연합뉴스]

1980년대 소비에트 체제가 비틀거리자 나고르노 카라바흐(Nagorno-Karabakh) 지역을 놓고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젠 사이에 긴장이 격화되었다. 그러다가 1991년 나고르노 카라바흐가 독립을 선언하자 두 나라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다. 1994년 불안한 휴전이 조인되었지만 2020년 가을 6주간 벌어졌던 전쟁처럼 간헐적으로 폭력적인 충돌이 발발하고 있다.

아제르바이젠은 독립 후 원유 생산으로 소득이 급증하고, 서방 석유기업들과의 계약 덕택으로 번영과 함께 부패가 끊이지를 않고 있다. 전직 공산당 지도자 헤이다르 알리예프와 그의 아들 일함 알리예프가 1993년부터 아제르바이젠의 유일한 통치자로 군림하는 동안 아르메니아는 1999년 총리가 의회 내에서 암살당하는 등 정치적 격변을 겪는 중이다.

조지아는 구소련의 반체제 인사였던 즈비아드 감사후르디아가 대통령 자리에 오르면서 구소련 산하 국가들 중 민주적 선거를 통해 독립 과정을 쟁취한 최초의 사례가 되었다. 하지만 그의 임기는 길지 않았다. 구소련 외무장관 출신인 예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가 군사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만연한 부패와 경제 불안은 2003년 평화적인 장미혁명(Rose Revolution)으로 이어졌고, 셰바르드나제는 권자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러시아 인종으로 구성된 아브하즈 자치공화국과 유주나야오세티야 주에서 벌어진 분리주의 운동은 러시아와 긴장 관계를 형성하도록 했다. 2008년 8월 러시아군이 유주나야오세티야 주의 분리주의 전사들을 돕기 위해 짧은 전쟁을 벌이며 국경을 넘자 조지아는 점점 친서방 노선을 채택하게 되면서 2014년에는 유럽연합 가입에 서명했다.

[위키리크스한국 = 최석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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