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 프리즘] 1달러도 안 되는 돈에 고철로 팔려 해체되는 미국의 퇴역 항공모함 키티호크
[월드 프리즘] 1달러도 안 되는 돈에 고철로 팔려 해체되는 미국의 퇴역 항공모함 키티호크
  • 최석진 기자
  • 승인 2022.03.17 06:08
  • 수정 2022.03.17 05: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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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해군의 마지막 재래식 항공모함 키티호크호의 위용 [사진 = ATI]
미해군의 마지막 재래식 항공모함 키티호크호의 위용 [사진 = ATI]

1960년 실전 배치되어 베트남전 걸프전 및 한국과의 팀스피리트 훈련 등에서 활약하던 미국 항공모함 키티호크호가 1달러도 안 되는 돈에 팔려 고철로 해체될 운명을 맞이하게 되었다고, 16일(현지시간) CNN 방송 등 미 언론들이 보도했다.

한때 미국 군사력의 최고 상징이었던 항공모함 키티호크(Kitty Hawk)는 인도-태평양을 누비며 베트남에서부터 페르시아만까지 전투에 참가했고, 구소련 잠수함과 충돌해서도 건재함을 과시했다.

하지만 미 해군 전함 키티호크호의 영광은 막을 내렸다. 이 퇴역 항공모함은 워싱턴에서 텍사스까지 1600마일의 마지막 여정을 끝으로 해체 수순을 밟고 고철로 팔리면서 생을 다하게 되었다.

텍사스주 브라운스빌에 위치한 ‘국제 선박해체 주식회사(International Shipbreaking Limited)’는 지난해 퇴역 전함 처리를 담당하는 ‘해군 해상 시스템 사령부(US Naval Sea Systems Command)’로부터 키티호크호를 1달러도 안 되는 가격에 사들였다.

길이 320미터에 폭이 77미터에 달하는 키티호크호는 파나마운하를 통과할 수 없어서 몇 달 뒤 남미 해안을 따라 이동한 후 최종 목적지인 멕시코만에 이르게 된다.

1960년 진수(進水)되어 라이트 형제가 최초로 비행기를 날린 노스캐롤라이나주의 지역 명칭을 딴 키티호크는 2009년 퇴역할 때까지 거의 50년 동안을 미 해군에서 복무했다.

키티호크는 석유로 가동된 미국의 마지막 항공모함으로, 핵연료로 가동되는 니미츠급 전함들의 시대가 도래하기 전의 영화를 전설로 남기게 되었다.

키티호크호는 특별히 미국 사회의 갈등과 변화뿐만 아니라 베트남전쟁에서부터 냉전 시기까지를 몸으로 겪으며 때로는 격동의 역사를 품은 여러 이야기들을 남기게 되었다.

선상에서의 인종 폭동과 베트남전쟁

키티호크호는 1960년대 초부터 10년 동안 베트남의 해안을 누비며 미군의 대들보 노릇을 했다.

키티호크의 전투기들은 이른바 ‘양키 스테이션(Yankee Station)’이라 불리던 기지에서 때로는 하루에 100회 이상씩 출격하기도 했다. ‘양키 스테이션’이란 북베트남과 베트콩을 공습하던 미해군 전함들이 정박하던 남중국해의 일정 해역을 가리켰다.

키티호크 항모와 에어윙(air wing)은 나중에 1967년 12월부터 1968년 6월까지 베트남전의 특별 무공을 기리는 대통령부대 표창(Presidential Unit Citation)을 받기도 했다.

키티호크호는 1972년 베트남전의 마지막 전투에 참가했지만, 마지막 임무에서 나중에 의회 조사단이 ‘해군 역사의 참담한 한 페이지’라고 부른 비극적 사건의 현장이 되기도 했다.

‘해군 역사·유산 사령부’ 웹사이트에 따르면 키티호크호에서는 필리핀 기항에 이어 베트남전 배치로 임무가 연장된 후 긴장이 고조되던 와중에 인종폭동이 발생했다.

사태의 촉발 원인은 다양하게 분석되고 있다. 일부는 임무 배치 전날 흑인 수병들이 필리핀 바에서 난투극을 벌였는데 이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사태가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그런가 하면 다른 사람들은 어지러운 상황 하에서 백인 수병들과는 다르게 흑인 수병들에게만 별도의 샌드위치가 지급되지 않자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고 말한다.

이유야 어떻든 사태는 심각하게 번졌다.

“싸움이 항모 전체로 순식간에 번지면서 갑판에서 흑백 간에 주먹과 체인 렌치, 파이프를 동원에 상대를 공격하는 난투극으로 변했다.”

현재는 노트르담 대학의 크록 연구소 책임자로 있는 데이비드 코트라이트는 1990년 ‘베트남전에 대한 흑인의 저항’이라는 기사를 통해 이렇게 회상했었다.

키티호크 상에서의 인종 문제와 폭동은 당시 미국 사회를 짓누르던 첨예한 인종문제를 그대로 반영한 사건이었다.

보도에 따르면 당시 흑인 사병들의 숫자는 키티호크 전체 승선 인원인 4,500명의 10%에 불과했다고 한다. 그리고 장교 348명 중 고작 5명만이 흑인이었다고, 해군 역사 사령부는 밝히고 있다.

1972년 10월 12일과 13일로 이어지는 밤에 벌어진 이 사건을 조사한 의회 보고서는 이 난투극으로 47병의 수병들이 상해를 입었는데, 6~7명을 제외한 부상자 전원이 백인들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의회 조사 결과는 인종차별에 저항하는 병사들의 투쟁으로 귀결되고 있지만, 소위원회 보고서 자체는 미국 내 인종차별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그대로 드러내듯이 편견적인 용어들로 가득 찼다.

의회보고서를 간추린 문서에는 “소위원회는 키티호크 상의 폭동이 대부분이 평균 이하의 지적 능력을 지닌 극히 일부 수병들의 근거 없는 공격으로 촉발되었다는 입장이다. 가담자 대부분은 승선한 지 1년 미만의 흑인들이었다. 이들은 대체로 애초에 미군으로서 복무할 자격이 의심스러운 ‘깡패(thugs)’나 다름없는 병사들이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이 사건을 포함해 다른 전함들에서 발생한 유사한 사건들은 당시 해군 작전사령관이었던 엠모 줌월트 제독을 포함한 군 지도부들을 각성시켜 전함에서의 인종 문제를 해결하는 데 앞장서도록 했다.

미해군 통계에 따르면 2020년 12월 31일 현재 현역으로 복무 중인 해군 수병 중 17.6%가 흑인이라고 한다.

키티호크호 수병들이 전투기에 폭탄을 탑재하던 모습 [사진 = ATI]
키티호크호 수병들이 전투기에 폭탄을 탑재하던 모습 [사진 = ATI]

전함 내의 성차별과 소련 잠수함과의 충돌

퇴역 해군 함장 제임스 파넬은 자신이 1990년대 키티호크호의 에어윙 정보장교로 복무했을 무렵에는 인종폭동은 오래전에 잊혀진 이야기가 되어 있었다고 말했다.

“대부분의 수병들은 역사가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그저 다음 기항지나 작전을 기다릴 뿐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90년대에는 또 다른 문제가 대두되었다. 전함에서의 성차별 문제가 그것이었다.

파넬은 자신이 1987년 다른 항공모함인 산호해(USS Coral Sea)를 타고 바다에 나섰을 때 선원 중 여성은 한 명도 없었다고 말했다.

“10년 뒤 키티호크에 임무 배치되었을 때에는 11명의 정보장교 중 8명이 여성이었다. 정말 극적인 변화였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여성은 현재 미해군 현역 복무자 중 2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선상 폭동과 전함 내 여성차별 철폐가 이루어지는 동안 키티호크호는 냉전 상황 하에서 구소련의 핵잠수함과 얽히게 된다. 소련 잠수함의 일부가 미국 항공모함 선체에 끼인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1984년 키티호크호가 이끄는 전투그룹 브라보는 한국과의 연례 군사훈련인 팀스피리트(Team Spirit) 훈련에서 해군 작전의 핵심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한국과 일본 사이 공해상의 중간 지역에서 키티호크 선단은 소련 잠수함과 쫓고 쫓기는(cat and mouse) 게임을 벌였다. 나중에 K-314로 밝혀지게 되는 이 잠수함에는 약 90명이 승선 중이었다.

‘해군 역사·유산 사령부’에 따르면 키티호크호는 소련 잠수함과 충돌이 발생하기 전에 15번이나 이 잠수함을 추적하고 잠수 능력을 테스트해보았다고 한다.

그런 다음 항모 선단은 소련 잠수함의 추적을 따돌리기 위해 기만 전술을 활용했다.

이 작전은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다.

1984년 3월 21일 오후 10시 직후 K-314는 미국 항공모함을 찾기 위해 부상했다.

그 이후 상황에 대해 러시아군의 웹사이트 ‘탑워(Top War)’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K-314 함장은 충돌을 피하기 위해 긴급 잠수 명령을 하달했다. 잠수 직후 잠수함은 뭔가 강한 물체에 충격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몇 초 뒤 두 번째 충격이 이어졌다. 안전하게 잠수할 시간을 확보하지 못한 잠수함이 미국 선단 중 어딘가와 충돌한 것이다. 나중에 밝혀졌지만 그것은 미국의 키티호크 항공모함이었다.”

5000톤급 소련 잠수함은 8만 톤의 미국 항공모함에 적수가 되지 못했다.

“그들은 분명히 공포에 질렸을 것이다.”

전직 미해군 정보장교 칼 슈스터는 이렇게 회상했다.

“키티호크 상의 모든 승선원은 소련 잠수함이 깊이 잠수했으므로 다른 쪽에서 추적할 수 있을 것으로 여겼다.”

그는 키티호크가 내는 프로펠러 소리와 그로 인한 해저 압력 때문에 소련 잠수함을 미쳐 발견하지 못했다고 덧붙이며 이렇게 말했다.

이어지는 여정

키티호크호는 소련 잠수함과의 충돌 이후에도 20년 이상 태평양함대의 중추 역할을 했다.

1990년대 초반 키티호크호는 미군의 소말리아 작전을 지원하고, 사담 후세인이 통치하던 이라크 공습 기지로서 역할을 했다.

1998년 여름 키티호크는 미해군 7함대가 주둔하고 있는 일본 요코스카 해군 기지를 모항으로 하며, 미 대륙 이외의 해군 기지에서 10년을 보내는 유일한 항공모함이 되었다.

60년대 키티호크의 보일러맨으로 복무했던 제임스 멜카는 뉴욕의 인트레피드(Intrepid), 캘리포니아의 미드웨이(Midway) 및 호넷(Hornet),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요크타운(Yorktown)과 같은 다른 항공모함과 마찬가지로 키티호크도 박물관으로 사용하자는 키티호크 재향군인협회(Kitty Hawk Veterans Association) 운동을 주도했다.

그러나 2018년 해군은 이 요청을 거부했다.

“키티호크의 진정한 가치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겁니다.”

그는 이렇게 한탄했다.

파넬 함장은 키티호크에 대한 기억은 그 갑판에서 함께 했던 수십명의 선원들과 함께 영원할 것이라고 말했다.

[위키리크스한국 = 최석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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