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백악관 X파일(140) 김정일의 클린턴 방북 초청 vs 클린턴의 뉴욕 김정일 초청… 어긋난 기대, 불발된 북미정상회담
청와대-백악관 X파일(140) 김정일의 클린턴 방북 초청 vs 클린턴의 뉴욕 김정일 초청… 어긋난 기대, 불발된 북미정상회담
  • 유 진 기자
  • 승인 2023.03.17 05:21
  • 수정 2023.03.17 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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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정치사에서 '2000년'은 격동의 해로 기록되고 있다. 빌 클린턴 미 대통령과 고 김대중 대통령, 고 김정일 위원장 (사진 왼쪽부터)
한반도 정치사에서 '2000년'은 격동의 해로 기록되고 있다. 빌 클린턴 미 대통령과 고 김대중 대통령, 고 김정일 위원장 (사진 왼쪽부터)

김대중 대통령의 방미 다음달인 2000년 10월 9일 북한 군부의 2인자로 알려진 조명록 차수가 미국을 방문했다. 처음에 소스라치게 놀랐던 ‘청신호’라 판단하고 부랴부랴 클린턴 대통령을 접견일정까지 짰다.

백악관에서 열린 회담에서 조 차수는 김정일 위원장이 클린턴에게 보낸 방북 초대장을 전하고, 미국 정부에게 ‘보다 확실한 대답’을 원한다고 했다.

“클린턴 대통령은 북미 정상회담 준비 사전 답사 차원에서 내가 먼저 평양에 가는게 어떻겠냐고 했다. 그러나 조명록 차수는 대통령과 국무장관이 함께 오면 모든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할 방안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올브라이트)

매들린 브라이트 장관은 미 국무부 제퍼슨 홀에서 조 차수를 위해 환영 만찬을 준비했다. 만찬이 끝난 뒤 양성철 주미대사와 올브라이트 장관, 웬디 셔먼 미 국무부 자문관 겸 대통령 대북정책 특별보좌관이 별도 회동해 후속 대응책을 상의하기도 했다.     

10여일 후인 10월 23일 올브라이트 장관이 평양을 방문했다. 이 방문은 정상회담을 개최하기 위한 사전방문 성격이었다.

올브라이트 장관의 북한 방문은 새로운 기회를 열었다. 

북한은 클린턴 대통령이 김정일 위원장과 직접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갖자며 평양에 초청했다. 미국과 북한이 미사일에 관해 대화를 전개할 새로운 일정도 잡혔다.

올브라이트 장관과 김정일 위원장은 빌 페리 특사가 1년 전 방문했을 때 나왔던 안건에 초점을 맞추면서 솔직하고 실질적인 대화를 나누었다.

문제는 올브라이트 장관의 방북이 김정일 정권 홍보에 도움이 되는 쪽으로 비쳐졌다는 것이었다. 북한의 독재자 옆에 서서 포즈를 취하는 미 국무부 장관의 사진과 텔레비전 영상은 미 외교의 흐름에 반하는 것이었다.

어쨌든 매들린 올브라이트 장관의 방북 이후 짧게나마 한반도에 희망적인 순간이 찾아오는듯 했다. 

따사로운 평화의 기운이 휴전선을 넘어 퍼져왔다. 바야흐로 햇살의 시대가 도래하는 것처럼 보여졌다. 

매들린 올브라이트 당시 미국 국무부 장관이 2000년 10월 24일 북한 평양에서 진행된 만찬 자리에서 김정일 당시 북한 국방위원장과 건배를 하고 있다. /사진=AP=연합뉴스
매들린 올브라이트 당시 미국 국무부 장관이 2000년 10월 24일 북한 평양에서 진행된 만찬 자리에서 김정일 당시 북한 국방위원장과 건배를 하고 있다. /사진=AP=연합뉴스

서울과 평양, 워싱턴과 평양간 고위급 방문은 오랫동안 북한이 고립된 상황을 끝내고 싶어 보내는 신호이자 반세기 넘게 이어온 힘겨운 군사적 대치상황을 극복할 기회로 여겨졌다.

평양을 방문하고 돌아온 올브라이트 장관과 샌디 버거 국가안보보좌관은 ‘북미정상회담으로 만약 북한 미사일 문제가 만족스럽게 타결될 수 있다면’ 클린턴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해야 한다고 말했다.

“대통령 본인은 방문길에 오르고 싶어했다. 하지만 우리는 북한의 외교 스타일, 우리의 동맹국들과의 관계, 미국내 정치, 다른 긴급한 사안 등을 함께 고려해 가장 적절한 결정을 내리기 위해 노력했다.” (브라이트 회고록)

백악관은 최종 방북 결정을 계속 미뤘다. 중동 협상이 위기에 봉착하면서 일정 잡는 일이 더 복잡해졌기 때문이었다. 클린턴 대통령은 북한 방문과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를 밀어부쳐서라도 매듭 짓느냐를 놓고 고민했다. 

백악관은 보즈워스 주한미대사에게 클린턴 평양방문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보즈워스 대사는 “클린턴 대통령 방북으로 성공적인 외교 과정의 정점을 보여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미국 외교라는 무기고에서 ‘대통령의 방북은 초대형 폭탄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정상회담이 개최된다면 진정한 돌파구가 생겨나야 했다. 현실적인 측면에서 협상의 토대를 마련할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던 미 행정부는 북미 정상회담이 이뤄지지 못할 수도 있음을 마지못해 받아들였다. 

이 어려운 선택을 벗어나기 위한 마지막 대안으로 백악관은 김정일 위원장을 워싱턴으로 초청했다. 그러나 북한은 이 초청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답했다.

휴전선에서 불어오던 ‘아늑한 시간’은 2000년말을 지나며 점점 사라지기 시작했다.

클린턴으로서는 여러면에서 방북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첫째, 시간적 제약이었다. 북한 방문 일정은 방북 뒤 한국, 일본, 중국도 들러 방북 설명까지 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1주일은 소요되지만 그럴 시간이 없었다.

둘째는 중동문제. 당시 팔레스타인 지도자 야사 아라파트가 사실상 훼방꾼이었다. 아라파트는 중동 평화협상을 타결지을 수 있다고 클린턴에게 매달렸다. 하지만 아라파트는 클린턴이 제시한 중동평화협상안을 거부했다. 클린턴은 훗날 “당시 이스라엘 바락 수상이 동의한 내 협상안을 아라파트가 거부한 것은 역사에 기록될만한 큰 실수임이 분명하다”고 술회했다.

셋째, 클린턴은 그의 대통령직을 승계할 차기 대통령에 대해 오판했다. 그는 클린턴 정부가 북미간 협상해온 결과물들을 다음 정부가 물려받아 마무리를 잘 지을 것으로 믿었다. 하지만 결과는 그렇지 못했다. 

시한부 리더였던 클린턴 대통령은 중동 평화 협상에 더 많은 시간을 쏟았다. 그러나 중동 협상이 중단되자 워싱턴에서는 클린턴 대통령이 평양 방문의 음모에 휘말려들었다고 수군거리는 소리가 번졌다.

2000년 12월 미 연방대법원은 차기 미 대통령으로 조지 W. 부시가 당선되었음을 선언하고, "미 정치사에서 가장 불안정한 시기가 저물고 있다"고 발표했다.

[기획취재팀= 최석진, 유 진 기자]

한-미 정치 40년 비사를 엮는 청와대-백악관 X파일. [위키리크스한국]
한-미 정치 40년 비사를 엮는 청와대-백악관 X파일. [위키리크스한국]

 

 

yoojin@wikileaks-kr.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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