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줌인] 불확실성의 늪으로 빠져들어가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그 시작은 어디인가
[이스라엘 줌인] 불확실성의 늪으로 빠져들어가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그 시작은 어디인가
  • 최정미 기자
  • 승인 2023.10.23 05:43
  • 수정 2023.10.23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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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현지시간)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다. 지난 7일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기습 공격한 후 시작된 전쟁으로 수천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출처=AFP/연합]
11일(현지시간)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다. 지난 7일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기습 공격한 후 시작된 전쟁으로 수천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출처=AFP/연합]

지금의 이스라엘-하마스 충돌이 과거 어디까지 거슬러 올라가느냐는 견해가 다양하다.

어떤 이들은 로마제국 시대까지 가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19세기 후반 무렵 유대인들이 동유럽 지역에서의 집단 학살 및 박해를 피해 당시 오토만 제국으로 이주하며 유대민족 국가 건설을 내세우는 시오니즘(Zionism)이 부상하던 때를 말하기도 한다.

혹자는 1917년 영국 정부가 팔레스타인 지역의 유대인 국가 수립을 지지하며 밸푸어(Balfour) 선언을 한 시기를 말한다. 이 선언 이후 이 지역 아랍 단체들과의 충돌은 불가피한 것이 됐다.  

그러나 많은 이들에게 현 전쟁의 시작점은 1947년 '유엔 투표'로 여겨지고 있고 가디언은 전했다. 영국이 위임 통치하던 팔레스타인을 유대 민족과 아랍 민족의 두 정부로 나누는 것에 대한 투표였다. 당시 유럽의 유대인 사회는 2차 세계대전의 홀로코스트로 붕괴돼 있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물론 이웃의 아랍 국가들 모두 이스라엘 건국을 용납할 수 없었다. 1948년 5월 이스라엘이 독립 선언을 한 뒤, 유대인 무장단체와 팔레스타인인들과의 전쟁이 벌어졌으며, 이는 이집트, 이라크, 트란스요르단(현 요르단), 시리아의 아랍 연합군이 합세하는 것으로까지 확대됐다.

이스라엘군이 분쟁 지역의 대부분을 점령한 뒤 이뤄진 1949년 정전 협정으로 이제 막 수립된 유대인 정부는 사실상, 유엔의 분할 계획보다 훨씬 더 넓은 영토를 차지할 수 있게 됐다.  

이후 약 70만 명의 팔레스타인인들이 이 지역에서 영영 탈출하거나 추방됐다. 이스라엘 점령지 내 아랍 인구의 약 85%이다. 팔레스타인인들은 이 엑소더스 또는 전멸을 대재앙을 뜻하는 ‘낙바(Nakba)’라고 불렀고, 이는 이들의 현대사에 있어 트라우마가 됐다.

이스라엘 점령지에 남게 된 아랍인들은 차별을 겪어야만 했다. 이들은 거의 20년 동안 군사적 통치 아래에 놓여지게 됐고, 많은 기본적인 시민권을 박탈 당했다. 이들의 땅 상당 부분이 이스라엘에 무단 수용됐고, 이스라엘 정부의 재정적 지원이 없어 가난에 허덕여야 했다. 

이스라엘군 공습으로 부상한 가자지구 주민. [AFP 연합뉴스]
이스라엘군 공습으로 부상한 가자지구 주민. [AFP 연합뉴스]

1964년, 의장 야세르 아라파트가 이끄는 팔레스타인 해방기구가 조직한 단체들이 무장 투쟁과 함께 이스라엘 영토 내의 아랍 정부 수립을 추구했다. 이들은 서방 국가들을 대상으로 한 폭탄 테러 및 비행기 납치 등으로 국제적인 관심을 끌었다.

1967년 이스라엘은 요르단, 이집트, 시리아를 상대로 소위 ‘선제방어 전쟁’이라는 것을 일으켰다. 아랍 정부들은 예기치 못한 기습을 당했고, 이스라엘은 이집트로부터 시나이 반도 및 가자를, 시리아로부터 골란 고원을, 요르단으로부터 서안과 예루살렘 동부를 점령하는 등 빠르게 승리를 취해갔다. 

이 6일 동안의 전쟁은 이스라엘에 있어 엄청난 성공이었다. 예루살렘 전체를 장악하고 성서의 땅 유대와 사마리아를 새로이 손에 넣은 것은 서안에 유대인들이 정착하는 길을 열어줬다. 이후 서안은 분쟁의 중심지가 됐다.

팔레스타인 해방기구는 당시 다른 좌파 게릴라 운동들을 모델로 한 조직이었다. 다만 무슬림들의 지지를 받는다는 것이 달랐다.

무슬림형제단과 같은 이슬람주의 단체들은 무력 충돌을 피하고 종교적인 사회를 위해 헌신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어린 시절 사고로 팔다리를 움직일 수 없는 몸으로 가자에서 살아왔지만 카리스마 있는 셰이크 아메드 야신이 수장이 되면서 분위기가 바뀌었다. 

그는 가자에 여러 이슬람주의 조직이 설립되는 일에 힘썼다. 그 중에는 무자마 알-이슬라미야(Mujama al-Islamiya)도 있는데, 이들은 학교, 병원, 도서관 등 사회 기반시설을 확충하고 지역 주민들을 지원하는 일에 나섰다.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반이스라엘 운동인 인티파다(intifada)가 처음 일어난 직후, 야신은 무자마 알-이슬라미야에 대한 지원을 하마스를 조직하는 데 이용했다. 

이스라엘은 가자 지구에서 이슬람주의 운동을 항상 부정해 왔지만, 이들 단체들을 팔레스타인 해방기구에 대한 지지를 약화시키는 수단으로 봤고, 무자마 알-이슬라미야를 자선단체로 인식하며, 자유롭게 활동하고 지원을 받도록 했다. 또한 이스라엘은 가자이슬람대학교의 설립을 승인했는데, 이는 후에 하마스 지원의 근원지가 된다.

첫 인티파다의 배경은 이렇다. 이스라엘은 점령지인 가자와 서안 등에 유대인들의 정착을 확대하며 팔레스타인인들을 통제 하에 넣으려고 했다. 또한 팔레스타인인들을 이스라엘 내 값싼 노동력으로 취급했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환상은 1987년 젊은 팔레스타인인들이 봉기하면서 산산조각났다. 팔레스타인인들이 돌을 던지며 대규모 투석 시위를 일으켰으며, 이스라엘군이 시위 참여자들을 대대적으로 체포하고 집단 처벌을 했다. 

이 때의 인티파다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성공으로 인식됐다. 팔레스타인인들이 이웃한 아랍 국가들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립했으며, 이스라엘을 협상장으로 끌어냈기 때문이다. 또한 두 정부 원칙을 인정하는 등 이스라엘과 타협할 수 있도록 아라파트에 힘을 줬다.

1993년 첫 인티파다가 점차 소강되면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해방기구의 오슬로 평화 협상이 진행됐다. 당시 이스라엘 총리 이츠하크 라빈은 팔레스타인 정부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팔레스타인인들의 자결권 즉, 정치적 독립을 완전히 실현하는 데 아라파트와 합의했다.

오슬로 협정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수립되도록 했으며, 서안과 가자 지구에 제한적인 통치를 승인했다. 또한 예루살렘의 상황과 팔레스타인 지구 내에 정착한 이스라엘인들의 미래, 수백만 팔레스타인 난민들의 귀향과 관련한 추가적인 협상이 진행됐다. 

일부 팔레스타인인들은 이 협정을 항복으로 봤고, 우익 성향의 이스라엘인들은 팔레스타인 자치구 내 정착 포기에 반대했다. 

이스라엘에서는 훗날 총리가 되는 아리엘 샤론과 베냐민 네타냐후를 중심으로 한 오슬로 협정 반대가 일어났다. 이들은 라빈을 나치로 묘사했다. 라빈의 미망인은 1995년 극단적 국가주의 이스라엘인에 의한 남편의 암살이 샤론과 네타냐후 때문이라고 했다.

평화 협상이 지지부진한 상태에서, 2000년 미국 빌 클린턴 대통령이 캠프 데이비드에서의 최종 타결 중재에 실패한 뒤 두 번째 인티파다가 발발했다.

두 번째 봉기는 첫 번째와 달랐다. 하마스를 주축으로 여러 팔레스타인 무장단체들이 주도한 자살폭탄 테러가 이스라엘 시민들을 대상으로 일어났고, 이스라엘군이 보복 대응에 나섰다.  

이 두 번째 인티파다로 팔레스타인 3천 명, 이스라엘인 천 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인티파다의 정치적 파문은 매우 컸다. 보통의 이스라엘 사람들의 팔레스타인을 향한 태도가 단호해졌으며, 서안에 장벽이 설치됐다. 

그런데 당시 이스라엘 총리 아리엘 샤론이 팔레스타인의 독립에 대해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자치 지역를 계속 점령하지 못할 수 있다고 말했다.

두 번째 인티파다의 여파 중 하나로 팔레스타인인들을 해방하기로 한 샤론 총리의 결정이 나왔다. 2005년 가자와 서안 북부의 이스라엘 정착자들 및 군을 철수시는 것으로 시작했다. 이듬해 샤론이 뇌졸중으로 혼수상태에 빠지지 않았다면 이 정책이 얼마나 더 확대됐을지 확실치는 않다.

해방 뒤 가자는 여전히 논쟁의 중심에 있게 됐다. 이스라엘은 가자가 더 이상 점령지가 아니라고 말한다. 유엔은 이스라엘이 이 지역의 상공과 수원, 이집트로 통하는 길을 계속 통제하고 있다고 반박하고 있다. 2006년 하마스가 이 지역을 집권한 이후 이스라엘은 이곳을 봉쇄했다.

게다가 가자 지구의 많은 팔레스타인인들은 자신들을 서안 및 예루살렘 동부와 한 몸으로 보고 결국 여전히 점령되어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18일(현지시간) 튀르키예 수도 앙카라 시민들이 이스라엘대사관 앞에 몰려와 시위를 벌이고 있다. 앞서 레젭 타입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은 전날 소셜미디어에 이스라엘군이 가자지구 북부 알아흘리 아랍 병원을 공습해 수백명이 사망한데 대해 "가장 기본적인 인간의 가치마저 결여한 이스라엘의 공격 사례"라고 비난했다. [출처=로이터/연합]
18일(현지시간) 튀르키예 수도 앙카라 시민들이 이스라엘대사관 앞에 몰려와 시위를 벌이고 있다. 앞서 레젭 타입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은 전날 소셜미디어에 이스라엘군이 가자지구 북부 알아흘리 아랍 병원을 공습해 수백명이 사망한데 대해 "가장 기본적인 인간의 가치마저 결여한 이스라엘의 공격 사례"라고 비난했다. [출처=로이터/연합]

하마스는 2006년 팔레스타인 총선에서 승리하면서 가자를 장악하게 됐다. 여당인 파타(Fatah)의 부패와 정치적 부진에 대항한 결과이다. 하마스 수장 이스마일 하니야가 총리가 됐고,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의회의 하마스 조직원들을 체포하고 가자에 제재를 가하기 시작했다. 

하마스와 파타의 관계 악화는 폭력으로까지 이어졌다. 거국내각 합의는 깨졌고, 하마스가 가자를 무장으로 전복시켰으며, 파타는 서안 자치구를 계속 통치했다. 이후 팔레스타인에는 선거가 이뤄지지 않았다.

하마스는 가자에서 이스라엘 공격을 지속했다. 대부분 예고없는 폭격이었다. 이스라엘이 강력한 봉쇄를 유지하면서, 가자 주민들의 삶은 가난으로 더 피폐해져 갔다.

가디언의 표현에 따르면, 서방 국가들이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양 정부를 말로 구슬리고 있지만, 팔레스타인 정부를 절대 인정할 수 없다는 베냐민 네타냐후가 장기 집권하고 있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합의할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고 있다.

네타냐후 정부에는 팔레스타인 자치구 전체 또는 서안 일부를 이스라엘에 합병하고 팔레스타인인들에게 투표권및 완전한 권리를 주지 않을 것을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우익 정당들이 있다.

이스라엘 및 국제 인권 단체들은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자치구 내에 인종분리 정책을 키우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현재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무력 충돌은 수천 명의 사망자를 발생시키며 불확실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위키리크스한국= 최정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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