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 투데이] 리들리 스콧의 ‘나폴레옹’ 개봉에 맞춰 돌아본 나폴레옹과 조세핀의 사랑
[월드 투데이] 리들리 스콧의 ‘나폴레옹’ 개봉에 맞춰 돌아본 나폴레옹과 조세핀의 사랑
  • 최석진 기자
  • 승인 2023.11.30 05:52
  • 수정 2023.11.30 0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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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나폴레옹' 속의 나폴레옹(호아킨 피닉스)과 조세핀(바네사 커비) [사진 = 소니픽처스]
영화 '나폴레옹' 속의 나폴레옹(호아킨 피닉스)과 조세핀(바네사 커비) [사진 = 소니픽쳐스]

호아킨 피닉스와 리들리 스콧 감독의 재회로 화제를 모은 영화 ‘나폴레옹’이 최근 미국에서 개봉됐다.

영화는 나폴레옹과 그가 “조세핀(Josephine)”이라 불렀던 여성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얼개가 짜여있다.

스콧 감독의 묘사에 따르면, 나폴레옹은 “조세핀의 사랑을 얻기 위해 세상을 정복했고, 그 사랑이 어그러지자 이번에는 그녀를 파괴하기 위해 세상을 정복했고, 그 과정에서 자신 또한 파괴한 인물”이다.

그런데 영화 제작 과정에서 바네사 커비(Vanessa Kirby)가 조세핀 역을 맡을 것이라는 소식을 접한 역사가들은 의아해했었다.

커비는 나폴레옹을 맡은 호아킨 피닉스보다 14살이나 어린데, 역사상의 조세핀은 실제로는 나폴레옹보다 6살 연상이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스콧 감독은 ‘The New Yorker’와의 인터뷰에서 영화의 고증(考證)적 요소를 지적하는 역사가들에게 “그냥 즐기시라(get a life)”고 일침을 놓았다.

그러나 실제 역사에서 나폴레옹과 조세핀의 나이 차이는 그들의 삶과 사랑에서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

프랑스 혁명 중에 남편을 잃고 두 명의 어린 자녀를 두고 있던 조세핀 드 보아르네(Marie-Josèphe-Rose de Beauharnais)는 불확실한 미래에 직면해 있었다. 그녀는 마르티니크에 있는 가족 소유의 설탕 농장에서 나오는 수입에 접근할 수 없었고, 단두대에 처형된 남편의 재산도 물려받지 못했다.

당시 조세핀은 이미 30대에 접어들었기 때문에 더 이상 젊다고 여겨지지는 않았지만, 고위 정치인 폴 바라스와 친분을 쌓아 그의 호의 덕으로 호화로운 파리 사교계의 일원이 되는 데 성공했다.

나폴레옹과의 결혼

조세핀은 전도가 유망한 코르시카 출신의 젊은 장군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 결혼하라는 권고를 받았다. 당시 나폴레옹은 그녀에게 홀딱 반한 상태였다. 

나폴레옹 장군은 1796년 3월, 조세핀을 만난 지 불과 몇 달 후 그녀와 결혼식을 올리고 곧바로 이탈리아 혁명군을 이끌도록 이탈리아로 파견되었다.

나폴레옹은 이탈리아에서 조세핀에게 수십 통의 연서(戀書)를 썼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이 편지들 상당수에는 사랑을 호소하는 애원보다 감정적인 위협의 넘쳤다는 사실이다.

“당신은 내게 편지를 쓰지 않았소. 당신은 남편을 사랑하지 않는구려.”

나폴레옹은 한 편지에서 이렇게 감정을 폭발했다.

“나는 당신에게서 아무 소식도 듣지 못하고 있고, 당신이 더 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확신하오.”

그는 다른 편지에서는 이렇게 한탄했다. 

“나는 매일 당신의 과오를 세고 있소. 나는 화가 치밀어서 이제 당신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게 되었소. 당신보다 내가 더 당신을 사랑한다고 생각하지 않소?”

조세핀은 이탈리아에서 나폴레옹과 합류한 뒤부터는 남편이 자신의 뒤를 캐고 편지를 열어보는 것을 참아야 했다. 나폴레옹은 이탈리아에서 아내와 재회하고서도 억압적 기질은 여전했지만, 그녀에 대한 사랑은 예전 같지 않았다. 

나폴레옹은 부부 사이에 성격 차이가 존재하고 아내에 대한 사랑이 예전 같지 않다고 느끼면서도 아내의 인맥이 자신의 출세에 큰 힘이 된다는 점을 분명히 깨닫고 있었다. 그가 초기에 조세핀에 보였던 소설 같은 열정은 1797년에 이르자 제정신을 차리는 듯하더니 1800년에 와서는 냉담해지기까지 했다. 

결국 이 시기 나폴레옹이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들은 “수천 개의 부드러운 것(a thousand tender things)”이라는 식의 공식적인 멘트들로 끝을 맺곤 했다.

영화 '나폴레옹'의 한 장면 [사진 = 소니픽쳐스]
영화 '나폴레옹'의 한 장면 [사진 = 소니픽쳐스]

권력 지향적 부부

떠들썩한 전쟁 영웅의 아내로서 조세핀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 정치적 연줄을 이용했는데, 이는 나폴레옹이 자신에게 행사했던 억압에 저항하는 수단으로도 활용되었던 듯하다.

그리고 나폴레옹의 가족을 포함해 조세핀을 미워했던 사람들은 그녀의 명성을 훼손하기 위해 악소문을 퍼뜨리곤 했다. 조세핀이 내연남인 이폴리트 찰스에게 보낸 편지는 당시 그녀의 상황이 얼마나 위태로웠는지를 보여준다.

나폴레옹은 이집트에서 군대를 지휘하면서 아내가 바람을 피웠다는 증거를 받았다. 그런데 그가 조세핀의 부정(不淨)에 대해 형에게 털어놓은 편지를 영국이 가로채서 세상에 공표하는 바람에 프랑스 대중도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화를 냈던 나폴레옹은 파리로 돌아와서는 조세핀을 용서했고, 그녀는 남편이 1799년 쿠데타를 일으킨 뒤 권력을 잡을 때까지 정치적인 책사 노릇을 했다.

나폴레옹이 권력을 잡기 위해서는 혁명 시대의 특징이었던 분열주의를 타파하는 데 도움이 되는 부드러운 외교와 귀족적 혈통이 필요했다. 조세핀 또한 새로운 프랑스를 만드는 데 일익을 맡은 자신의 역할을 즐겼다.

1796년에 이탈리아에서는 남편과 합류하기를 꺼렸던 그녀는 이제 어디든 남편과 함께 동행했다. 그리고 나폴레옹이 젊은 여성들에 한눈을 팔지 않는 것도 도움이 되었다.

그러다가 1807년 나폴레옹은 아내 조세핀을 떼어놓고 폴란드로 가서 귀족 마리 왈레브스카와 오랫동안 연분을 맺었다. 그러나 그의 편지에 따르면 그는 조세핀과의 친밀함도 완전히 버리지는 않은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혼의 조짐은 점점 커지고 있었다.

한편, 1804년 나폴레옹이 세습 제국의 기틀을 마련하자 그의 가족은 그에게 제국을 물려받을 후사(後嗣)의 필요성에 대해 점점 더 압력을 가했다. 그러나 조세핀은 그 필요성을 충족해줄 수 없었다. 당시 그녀의 하녀 중 한 명인 마드모아젤 아브릴리온은 이혼을 앞둔 이 부부가 어떻게 멀어지게 되는지를 편지로 남겼다. 그 와중에도 조세핀은 1809년 자신의 운명이 결정될 때까지 계속 무너지고 있었다.

지속적인 유대

나폴레옹과 조세핀 이혼의 명분으로는 국가가 동원되었다.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대공비 마리 루이즈와 결혼하기 전까지는 조세핀을 계속 찾고, 편지도 썼다. 그리고 조세핀은 1811년 나폴레옹의 아들이 태어나자 이를 축하하며 두 사람의 운명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므로 나폴레옹과 행복을 함께할 것이라고 말했다.

나폴레옹은 1812년 러시아 원정을 감행하기 전에 조세핀이 사랑했던 파리 외곽의 휴양지인 말메종으로 그녀를 방문했다. 이것이 두 사람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조세핀은 1814년에 사망했다. 나폴레옹은 워털루에서 참배한 후 세인트헬레나로 추방되기 전까지 말메종에서 시간을 보냈다.

조세핀의 입장을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실제 두 사람의 관계가 어땠는지 정확히 파악하기는 어렵다. 그녀가 처음부터 나폴레옹을 사랑했을까? 아마도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가 나중에 나폴레옹을 사랑하게 되었을까? 아마도 그랬을 가능성이 높다. 

나폴레옹은 조세핀이 나이라는 약점과 세상의 비판을 이겨낼 수 있도록 지원해주었으며, 그녀가 전남편과 사이에 낳은 자녀들인 호텐스와 외젠을 잘 돌보아주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조세핀과 나폴레옹은 서로의 사랑보다 권력을 더 사랑했던 것 같다.

그들은 연대의 이점을 정확히 파악하고 합심해서 빠른 속도로 정상에 올랐다. 결국 아들이 필요했던 나폴레옹은 정권과 부부 생활 모두를 파탄으로 내몰았지만, 망명길에 말메종을 방문한 것을 보면 조세핀이 그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조세핀은 나폴레옹에게 언제나 정직한 아내는 아니었지만, 그에 대한 충성심은 잃지 않았으며, 그에게는 행운의 부적 같은 존재였다. 

1821년 나폴레옹은 죽기 직전 꿈을 꾸었다. 그의 꿈 이야기를 들은 그의 부하였던 대원수는  “황제께서는 꿈에서 조세핀을 만나 대화를 나눴다고 말씀하셨습니다.”라고 전했다. 나폴레옹은 저승에서 조세핀과 다시 함께하기를 꿈꾸었던 듯하다.

[위키리크스한국 = 최석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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