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문정의 외교 프리즘]지미 카터와 마이크 폼페이오
[조문정의 외교 프리즘]지미 카터와 마이크 폼페이오
  • 조문정 기자
  • 승인 2019.04.20 12:02
  • 수정 2019.04.20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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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카터 방북
2019년 폼페이오 배제 요구
'귀인(貴人) 찾기'는 그만
北의 전향적인 태도 변화 필요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사진=연합뉴스]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사진=연합뉴스]

누군가의 도움으로 일이 잘 풀릴 때 우리는 흔히 ‘귀인(貴人)을 만났다’라고 표현한다. 물론 본인이 스스로를 도와야 하늘도 도와준다. 노력하지 않고 방에만 박혀 있다면 ‘귀인’을 만날 수 없다.

국가도 마찬가지다. 국익(national interest)에 따라 ‘스스로 돕기’를 해야 한다. 올림픽에 ‘스스로 돕기’라는 종목이 있다면 금메달은 단연 북한의 몫이다. 수십 년 외교라는 한 우물을 판 ‘어벤져스(The Avengers)’인 북한 외무성 원로들이 있었기에 천재적인 북한 외교도 가능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귀인’까지 있었다. 이 어벤져스들과 ‘귀인’들이 없었다면 북한은 1994년 제1차 북핵 위기를 벗어날 수 없었고, 북핵 협상의 흑역사로 통하는 1994년 제네바합의도 체결되지 않았을 것이다.

김일성 주석[사진=연합뉴스]
김일성 주석[사진=연합뉴스]

1994년 제1차 북핵 위기에서 북한을 구해준 ‘귀인’은 바로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다. 

그는 1991년~1993년 3년 연속 김일성 주석으로부터 방북 초청을 받았지만, 국무부의 반대에 부딪혀 방북하지 못했다. 그러다 1994년 6월 민간인 신분으로 방북해 김일성 주석을 만났다. “북한은 핵무기를 개발할 의사도, 능력도, 필요도 없다”는 김일성 주석의 주옥같은 명언은 바로 이 만남에서 나왔다. 

이 자리에서 김일성 주석은 카터 전 대통령에게 △핵시설 동결, △IAEA 사찰관 2명의 잔류, △신형 원자로 확보 시 NPT 복귀를 약속했다. 사찰관 잔류 외에는 북한이 새롭게 양보한 것이 전혀 없었다. 불과 3개월 전 북한은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사찰을 거부했고, 1개월 전에는 5MW 원자로 연료봉을 무작위로 섞어 인출해 재처리 증거를 인멸하지 않았던가. 

카터 전 대통령은 백악관과의 사전조율 없이 CNN 생방송으로 이 소식을 알리며 마치 자신이 핵위기를 해소한 것처럼 자화자찬했다. 김일성의 약속은 당시 가장 큰 쟁점이었던 플루토늄 재처리 문제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는 빛좋은 개살구에 불과했다.

환담하는 김영삼과 클린턴
김영삼 대통령과 빌 클린턴 대통령[사진=연합뉴스]

카터가 생방송을 한 그날 빌 클린턴 당시 미국 대통령은 국가안보회의(NSC)에서 대북 제재 추진을 최종 승인하려고 했다. 그러나 전 세계에 카터의 방북성과(?)가 타전되면서 제재를 강행하기 부담스러운 상황이 됐다.

이게 다가 아니다. 카터는 김영삼 당시 대통령에게 “언제 어디서든 조건 없이 가급적 이른 시기에” 남북정상회담에 응하겠다는 김일성의 의사를 전달했다. 김영삼 대통령이 1시간 만에 김일성의 제안을 공식적으로 수락하고 갑자기 해빙무드가 확산됐다. 미국이 대북제재를 강행할 명분이 약해졌다.

백악관은 북미회담을 재개해 북한과 협상해야 하는 원점으로 돌아갔다. 북한은 카터라는 카드를 활용해 체면과 협상카드를 지키고 위기까지 모면했다.

그리고 1994년 10월 21일 북핵 협상역사에서 최악의 선례를 남긴 제네바합의가 체결된다.

북한은 제네바합의에 따라 경수로 중요부분 완공 시까지 IAEA의 핵사찰로부터 면제됐고, 핵동결의 대가로 연간 50만 톤의 중유를 받았다. 핵무기 완성을 위한 시간도 벌고 중유도 얻은 셈이다.

제네바합의는 2002년 말 북한의 고농축우라늄(HEU) 프로그램이 발각되면서 파기됐다. 우라늄농축시설 문제는 실무협상에서부터 제대로 협상테이블에 오르지도 못한 채로.

2017년 초 북한의 IRBM(중장거리탄도미사일) 시험발사 성공과 2017년 말 ICBM(대륙간탄도미사일) 시험발사 성공으로 불거진 제3차 북핵 위기는 어떻게 전개될까? 

제1차 북핵 위기 당시 카터를 초청했던 것처럼 북한은 2017년 12월 초 제프리 펠트만 유엔 정무담당 사무차장을 평양에 초청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신년사에서 평창동계올림픽 참가 의사를 밝히며 문재인 대통령의 ‘베를린 구상’에 화답했다. 이어 2018년 6월 12일 제1차 북미정상회담까지 이뤄졌다. 여기까지는 술술 잘 풀렸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지난 2월 27~28일 제2차 북미정상회담에서부터다. 북한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자국이 찾던 ‘귀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지만 존 볼턴 미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나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보다는,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사랑에 빠졌다’는 트럼프 대통령을 상대하는 편이 여전히 훨씬 낫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사진=아순시온 AFP=연합뉴스]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사진=아순시온 AFP=연합뉴스]

그래도 또 다른 ‘귀인’을 찾아 나섰다. 그게 바로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이다. 

북한 내부에서도 비핵화에 대한 지지가 높지 않은 상황에서 설상가상으로 하노이회담이 결렬됐다. 북한 최고지도자가 이례적으로 장거리 행차에 나섰는데도 실패한 이 굴욕적인 상황에서 북미 대화를 지속하려면 명분이 있어야 했다. 실패를 자인할 수 없는 북한 정권의 특성상 외부에서 희생양을 마련해야 하는데 때마침 폼페이오 장관이 아주 좋은 구실을 제공했다.

폼페이오 장관이 지난 9일(현지시간) 상원 세출위원회 소위원회에서 ‘김 위원장이 독재자라는 지적에 동의한다’고 발언했던 것이다.

그러자 북한은 18일 권정국 외무성 미국 담당 국장이 조선중앙통신 기자와 문답하는 형식으로 “국회 청문회에서 우리 최고존엄을 모독하는 망발을 쥐어침으로써 저질적 인간됨을 드러냈다”며 “폼페이오가 아닌 우리와의 의사소통이 보다 원만하고 원숙한 인물이 우리의 대화상대로 나서기 바랄 뿐"이라며 폼페이오 배제를 공개적으로 요구했다.

권 국장은 “하노이 수뇌회담의 교훈에 비추어보아도 일이 될 만하다가도 폼페이오만 끼어들면 일이 꼬이고 결과물이 날아나군 했다. 앞으로도 폼페이오가 회담에 관여하면 또 판이 지저분해지고 일이 꼬일 수 있다”고 날을 세웠다.

그러나 북한의 ‘귀인 작전’이 이번에는 통하지 않을 듯하다. 폼페이오 장관은 카터 전 대통령이 아니고, 트럼프 대통령도 클린턴 전 대통령이 아니다.

폼페이오 장관은 19일(현지시간) 국무부 청사에서 미일 외교·국방장관이 참여한 '2+2 회의'를 개최한 뒤 가진 기자회견에서 북한의 협상 배제 요구와 관련해 '물러날 의향이 있느냐'는 물음에 "아무것도 바뀐 것이 없다"며 "나는 여전히 팀을 맡고 있다(still in charge of the team)"라고 말했다.

[그래픽=연합뉴스]
뮬러 특검 보고서에 드러난 트럼프 사법방해 사례[그래픽=연합뉴스]

미국은 북한에 대한 대응을 자제하면서 속도조절론과 빅딜론이라는 카드를 쥐고 협상주도권을 놓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2020년 미국 대선을 앞두고 워싱턴 정가가 어수선하다. 미국이 북한의 요구에 응해 폼페이오 장관을 배제하며 저자세를 취할 명분도 이유도 없다.

'러시아 스캔들' 의혹에 대한 로버트 뮬러 특검의 수사 보고서가 공개돼 지지율이 하락하고 있는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의 요구에 따라 북미 고위급회담 대표를 교체할 리는 만무하다.

인생에서 단 한 명의 귀인을 만나기도 어렵다. 북한은 이미 지미 카터라는 최고의 귀인이자 은인을 만났다. 평생 한 번 만나기도 어렵다는 귀인을 찾아 나서기보다는 태도를 바꾸는 편이 낫지 않을까?

지난달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북핵 문제 중재를 위해 다시 방북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고 한다. 그가 다시 방북한다 한들, 신들린 수완을 발휘한다 한들 1994년 때처럼 북한에 귀인이 될 수는 없어 보인다. 25년 세월 동안 강산이 변해도 참 많이 변했다.

[위키리크스한국=조문정 기자]
 

supermoon@wikileaks-kr.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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