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우 정부는 북방정책이 하나씩 결실을 맺자 북한과 접촉하려는 발걸음의 속도와 강도를 더욱 높이기 시작했다.
미 대사관은 이 과정에서 전폭적인 지원을 했지만, 한국군과 미군의 기관들은 호불호가 엇갈렸다.
매년 봄 실시되는 팀스피릿 훈련은 수천명의 미군을 한반도로 수송해 한국을 침공한 가상의 북한군을 퇴치하도록 설계된 훈련 과정을 되풀이했다.
북한은 이 훈련을 극도로 싫어했다. 해리 S. 트루먼 미국 대통령이 미군을 대거 투입해 그들의 남침을 격퇴한 1950년의 충격적인 굴욕을 해마다 상기시키기 때문이었다.
북한은 팀스피릿 훈련에 대항해 늘 최고 수준의 전군 경계령을 내리고 선전 공세를 펴면서 ‘미 제국주의 전쟁광들과 그들의 괴뢰 남조선’이라는 표현을 써가며 맹렬한 비방을 퍼부었다.
1991년 봄 북한이 뿌린 삐라는 ‘노태우 – 그레그의 3·4 밀약… 그 이면에 숨겨진 엄청난 비밀’이라는 제목으로 ▷그레그 대사와 노태우가 차기 대권을 내각제 개헌을 통해 군부실력자 노태우를 재임시키기로 했다 ▷매춘부 스타일 YS는 믿을 수 없다 ▷상황에 따라 박철언, 김복동 2인중 양자택일의 2선책을 선택할 것이다 등 황당한 내용들을 담고 있었다.
북한은 그레그 대사가 미 제국주의의 실질적인 한국 통수권자이고, 노태우는 그 하수인 격으로 묘사했다.
상황이 더 악화되는 것은 막아야겠다고 판단한 로버트 리스카시 장군과 도널드 그레그 대사는 펜타곤, 한국 국방부와 지리한 밀고 당기기를 계속한 끝에 팀스피릿 훈련 취소 동의를 얻어냈다.
이후 남북한은 남북화해, 상호불가침, 교류협력을 골자로 한 ‘남북기본합의서’를 채택해 서명했다.
1991년 12월 18일, 노태우 대통령은 한국 내에는 핵무기가 없다고 선언했다.
12월 31일에는 남북한이 한반도 비핵화 요구와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핵사찰을 허용한다는 선언을 담은 ‘합의문’을 발표했다. 이런 협정안들의 조인을 통해 남북한 사이에는 일정기간 우호적 관계가 전개됐다.
그러나 이러한 밀월관계는 오래 가지 못했다.
1992년 가을 펜타곤에서 열린 연례 안보참모회의에서 팀스피릿 훈련을 1993년 3월 재개하기로 한 것이다. 딕 체니 국방장관은 국무부나 주한미대사관과 한마디 의논조차 없이 훈련을 부활시켰다.
국무부는 기습을 당한 꼴이었다.
팀스피릿 훈련 재개는 곧바로 남북-북미간 불신으로 이어졌다. 평양은 맹렬한 공격을 재개했고 남북 접촉의 행보는 느려졌다.
김정일은 북한 인민군 총사령관 자격으로 팀스피릿 기간 중 북한에 ‘준전시체제’를 선언했다.
급기야 북한은 핵확산방지조약(NPT) 탈퇴를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위키리크스한국= 특별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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