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좋은 정자은행이 필요합니다”
[기고] “좋은 정자은행이 필요합니다”
  • 위키리크스한국
  • 승인 2022.10.18 16:35
  • 수정 2022.10.18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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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경훈 산부인과 전문의(서울아이비에프여성의원)

의사로서 시간을 보내다 보니 이런저런 사연을 듣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한편으론 안타까운 사연이 있어 속상하고, 어쩔 수 없이 택해야 했던 선택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이 있어 애처러워지곤 합니다. 그중에서도 정자은행과 관련된 이야기들은 안타까운 사연에 속해 있다고 봐야 합니다.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무정자증이라는 게 정말 예상치 못한 진단명입니다. 어느 남자가 자신의 정액에 정자가 없는 무정자증이라 생각이라도 했겠냐 싶습니다. 더 나아가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가, 그래서 결혼을 결심했고 평생을 같이 하기로 했던 남편이 무정자증일 거라는 것을 누가 알 수 있겠습니까. 자신이 선택한 사랑이 일상적인 결과로 이어지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에 남편 자신도 그 사실을 모르는 상황이라면 누구에게 원망할 수 있을까 싶습니다.

누군가가 도와주어야 하는 상황입니다. 2019년 한 연구에 따르면 연 500명 정도가 정자은행을 사용해야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의료 현장은 다르게 생각하면 해결이 금방 될 수 있지만, 윤리적 문제와 움직이지 않는 사회적 통념으로 시작도 못하는 문제가 종종 있습니다. 여러 군데 둘러볼 필요도 없이 생식세포 기증과 수증이 그러합니다. 다소 침습적이고 통증과 마취를 시행해야 하는 난자 기증은 뒤로 미루더라도, 정자 기증은 침습적이지도 않고 아프지도 않는데 정자 기증과 수증도 무척 어렵습니다. 이렇게 어려울까 싶습니다. 좋은 정자은행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전하기 위해 몇몇 의료 현장의 에피소드를 전해봅니다.

우선 정자를 기증하러 오시는 분들을 보면 하나 같이 번듯하고 예의 바르는 분들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어렵게 여기 인천까지 와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말을 건너면 의례히 “아닙니다. 기증이 그리 어렵지도 않는데요”하고 답하시는데 “어떻게 오셨어요?”라고 재차 물으면 “인터넷으로 찾아보고 왔어요”라고 하면서 쿨하게 답하곤 합니다. 좀 더 다가가 “왜 기증을 결심하셨냐”고 물어보면, 다양한 의견을 말해주시는데 우선 재정적인 보상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 듯 싶습니다. 행정적인 문제 때문에 여러 번 방문하게 되어 자신의 돈과 시간을 쓰게 되었는데도, 싫은 소리 한번 하시지 않아 죄송스러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진중하게 “이렇게까지 기증을 하는 이유가 뭔가요”라고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아주 인상이 깊은 이야기를 해주신 분들이 있는데 우선 “저는 결혼을 생각하지 않고 있어요. 그런데 이렇게 저의 유전자가 끊기는 것도 다소 아까운 측면이 있어서 기증을 생각했어요”라고 하는 분이 있었고 “저는 이제 애를 더 낳을 생각이 없어요. 아내와 상의를 했는데 난임 부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면 괜찮다고 했어요”라고 했던 난소능 저하 아내를 둔 남편분도 생각이 납니다.

다른 한편으로 정자 수증을 받으러 오신 난임 부부들도 한결같이 좋은 느낌을 주는 분들입니다. 얼마나 깨가 쏟아지는 지 모르겠습니다. 유전학이나 내분비 공부하다 난임 클리닉을 꾸리면서 젊음이 보냈던 제가 불쌍해 보일 정도로 사이가 좋아 보입니다. ‘부러운 사이군’ 하면서 얄미운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이분들에게 새로운 가족이 생긴다면 ‘정말 그 아이에게 행운이겠다’ 싶은 그런 분들이 많았는데 다들 아이 심장 소리를 듣고 하염없이 울곤 하셨습니다.

난임 진료는 결과치가 통계로 산출되고 평가되는 냉험한 진료 현장입니다. 치료 과정이 중요하게 여겨지는 다른 의료 행위와 달리, 아무리 친절하고 최신 기계를 써도 결국 임신이 안되면 별 의미가 없는 게 되곤 합니다. 헛된 시간 돈 낭비일 뿐인 것이 되는 통계치가 지배하는 현장입니다. 난임 의료진 사이에도 과정이 어떻든 임신에 성공하면 그 난임 부부에겐 그 의사가 명의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난임 외래 현장은 종종 냉정합니다. 몇 번의 시도에도 임신이 되지 않으면 다른 난임 클리닉으로 바꾸기도 하고, 1%의 임신율 상승을 위해 의료진도 다소 엄격한 요구를 하곤 합니다.
 

이와 달리 정자은행을 이용하는 난임 부부는 좀 더 과정을 중요시 여기는 듯 싶습니다. 자신의 프라이버시가 정말 잘 보장되기를 바라고 동시에 의료진을 더 믿는 느낌이 듭니다. 너를 믿을 테니 나의 믿음에 보답을 해달라는 다소 부담스러운 상황이 만들어지는데 그 부담감을 잘 이겨내면 보람이 큽니다. 임신에 성공해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남편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믿어주셔서 저희가 더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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