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함 10주기] 생존자에게 내린 국가의 두 번째 명령 "고통을 입증하라"
[천안함 10주기] 생존자에게 내린 국가의 두 번째 명령 "고통을 입증하라"
  • 윤여진 기자
  • 기사승인 2020-03-26 18:54:10
  • 최종수정 2020.03.26 17: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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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전준영 천안함 예비역 전우회장
국가유공자로 인정받는데 걸린 시간 9년
유공심사는 개인입증... PTSD는 최하등급
생존자의 외침, 누가 그를 그곳에 보냈나
[사진=최지환 기자]
22일 오후 3시 서울 용산구 노보텔호텔 1층 카페에서 만난 '천안함 예비역 전우회' 회장 전준영(32)씨가 활짝 웃고 있다. [사진=최지환 기자]

"육군엔 이런 말이 있다면서요. '작전에 실패한 군인은 용서할 수 있어도 경계에 실패한 군인은 용서할 수 없다' 잠수함을 탐지할 수 없는 그쪽으로 보낸 사람이 누군가요"

22일 오후 3시 서울 용산역 근처 호텔에서 만난 '천안함 예비역 전우회' 회장 전준영(32·사진)씨는 국가와 개인 사이를 고민하며 이렇게 물었다. 딱 10년 전인 2010년 4월 26일 오후 9시 22분 서해 백령도 해상에서 경계 중이던 해군 초계함 'PCC 772 천안'(천안함)은 두 동강이 난 채 바닷속으로 가라앉았다. 40명이 죽고 6명이 사라졌다. 만재배수량이 1220톤(t)에 달해 평온한 연안해서만 작전이 가능했던 천안함은 빠른 물살의 백령도 앞바다를 견딜 수 없었다. 어느 한 편에 선 사람들은 말했다. 그들이 '해상 경계'에 실패했다고. 그것도 꾸준히 10년 동안.

전씨는 그날의 일을 경계가 실패한 날이 아닌 '사고'로, '동기들이 모두 숨진 날'로 기억했다. 천안함이 가라앉은 날은 전씨가 전역을 3일 앞둔 날이다. 그는 "말년도 3일 밖에 남지 않았는데 사고가 나서 동기들도 다 죽어버렸어요. 불가항력적으로 그렇게 됐으니까 억울해요"라며 10년 동안 감췄던 속을 드러냈다. 그렇다. 전씨에게 10년 전 그날은, 경계가 실패한 날이 아닌 국가가 개인을 버린 날이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앓은 전씨는 1년 전에야 국가유공자 7등급으로 분류됐다. 9년 동안 전씨는 전투에 참여했지만 경계에 실패한 '패잔병'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PTSD 증상을 '마음병'이라 부른다. 

3시간 가까이 진행된 인터뷰에서 전씨가 말한 건 PTSD를 방치한 국가의 책임이었다. 그는 그날로부터 9년이 지나서야 국가유공자가 될 수 있었다. 생존자 58명 중 국가유공자로 인정된 이는 9명에 불과하다. 이들은 탈락자를 부르는 말은 '비해당'이다. 전씨는 9년 동안 '비해당'의 삶을 살았다.

▲어떻게 지냈나요.
"내 자신의 삶을 살기보다 이제는 천안함의 삶을 살아요. 3월은 내 시간이 아니에요. 올해는 10주기니까 외부 활동을 해야만 사람들한테 눈에 띄니까요. 벌써 10년이 됐는데 '아, 3월엔 이런 일이 있었지' 사람들이 기억하게끔 활동하고 있어요"

23일 용산역 3층 맞이방에 설치된 천안함 10주기 전시회를 뒤로 두고 사람들이 빠르게 지나가고 있다. [사진=최지환 기자]
22일 용산역 3층 맞이방에 재단법인 천안함재단 주최로 전시 중인 '천안함 추모 사진전'을 뒤로 하고 사람들이 빠르게 지나가고 있다. [사진=최지환 기자]

대전시 유성구에 거주하는 전씨는 이날 오후 1시쯤 서울 용산역에 도착했다. 용산역에선 천안함 10주기를 추모하는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용산역 3층 맞이방에서 백화점 건물로 빠지는 길목은 길이가 채 10m가 되지 못했다. 국가보훈처와 해군이 전시회 후원 기관으로 이름을 올렸지만, 그 사실이 초라하고 비좁은 공간을 화려하게 바꾸지 못했다. 그곳에 덩그러니 설치된 43개의 사진은 빠른 백령도 해상을 지키던 천안함의 잔상이었다. 

전씨는 이 썰렁한 분위기가 풍기는 이곳을 25명의 '페친'(페이스북 친구)으로 채웠다. 전씨는 그렇게 자신의 상처를 치유했다. 그는 그 과정을 "하나의 행위"라고 표현했다. 그 상처는 국가가 방치해 아물지 못한 상처고, 그날을 모르는 이들의 손가락질로 덧난 상처였다. 

▲오늘 사람들을 만나 무얼 한 건가요. 
"하나의 행위예요. 천안함이 조금 더 기억될 수 있게끔 '번개' 형태로 사람들을 맞아요. '이런 게 있었구나' 보여주는 거예요. 군인의 희생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오는데 오늘은 25명이 왔어요. 기억을 되새겨 설명하면 보는 사람들이 '이랬구나' 하거든요. 감정을 최대한 전달해요. 오늘 온 사람들은 페이스북에서 누군가 날 공격할 때 대신 대응해주는 사람들이에요"

23일 용산역에서 열린 '천안함 추모전' 사진 전시회를 유심히 지켜보는 한 아이. 이날 페이스북 친구 25명과 전시회를 둘러본 전씨는 자신의 행동을 '하나의 행위'라고 말했다. [사진=최지환 기자]
22일 용산역에서 열린 '천안함 추모전' 사진 전시회를 유심히 지켜보는 한 아이. 이날 페이스북 친구 25명과 전시회를 둘러본 전준영씨는 자신의 행동을 '하나의 행위'라고 말했다. [사진=최지환 기자]

▲공격이라면. 
"어디서 음모론을 복사해와요. 똑같은 패턴으로 똑같은 질문으로 오는데, 거기에 별 대응을 하지 않아요. 소모전으로 가니까 힘들거든요. 왜 일일이 설명을 해야지? 난 일개 병 출신인데... 나는 현장에서 오감으로 느낀 것인데... 억울한 때가 있었어요. 우리는 (전우를) 살리려고 애쓰고, 자기 할 일을 딱딱 했거든요. 어디엔가 있을 수 있는 전우를 찾으려고 '안에 누구 있어요' 소리치고, '계십니까' 외치고, 군인으로서 할 수 있는 걸 다했는데, 언제부턴가 우리는 손가락질을 받아요. 무슨 잘못을 했다는 걸까요. 육군엔 그런 말이 있다면서요. '작전에 실패한 군인은 용서할 수 있어도 경계에 실패한 군인은 용서할 수 없다' 작전을 지시한 사람이 누군가요. 잠수함을 탐지할 수 없는 그쪽으로 보낸 사람은 누군가요"

전씨는 어느 한 편에선 사람들의 삿대질처럼 자신이 경계에 실패한 패잔병이라면, 그 책임은 국가가 져야 한다고 말하는 듯했다. 

"그때는 특별히 졸릴 시간도 아니었어요. (오후) 9시면. 화살로 미사일 막으라고 하면 뭘 탐지할 수 있었을까요. 경계 실패요? 그 경계에 투입한 '윗분들'은 그러면... 우리는 병이에요. 나중에 들었는데 탐지할 수 없는 음역대라고... 경계에 실패한 것도 아니고, 작전도 실패한 것도 아니었던 것 같은데... 절대적으로 수면 안에 있는 잠수함을 탐지할 수 없는 상태에서 어떻게 작전할 수 있을까. 그걸 우리한테 떠넘기고... 해군이나 정부에서 책임져야 했는데 뭔가 흐지부지됐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알바비 받았냐' '너 무슨 교육을 받았냐' 그런 오해가 섞인 질문을 많이 하더라고요. 특히 군부 정치 때 군 생활을 한 사람들이 그래요. 본인이 생활한 군 시기에 아는 정보와 조직을 두고 말하는 건데, 사실 숨길 것도 없어요. 나는 그냥 군대 갈 때 돼서 간 거고, '말년'(전역일)도 3일밖에 남지 않았는데 사고가 나서 동기들도 다 죽어버렸어요. 불가항력적으로 그렇게 됐으니까 나는 억울해요"

전투복에처럼 왼쪽 어깨에 태극기가 달린 옷을 입고 있던 전준영씨는 '국가란 무엇인가'를 물었다.  [사진=최지환 기자]
전투복에처럼 왼쪽 어깨에 태극기가 달린 옷을 입고 있던 전준영씨는 '국가란 무엇인가'를 물었다.  [사진=최지환 기자]

▲PTSD 얘기할까요. PTSD는 시간이 갈수록 주기는 넓어지지만 강도는 세진다면서요. 
"그렇죠. 한 방에 와요. 그런데 (보훈처) 심사 기준을 잘 모르겠어요. 내가 기분이 괜찮을 때랑 '다운될 때' 심사받는 게 확연히 달라요. 병원은 내가 힘들고 외로울 때 갑니다. 하지만 심사는 정해진 날짜에 가죠. '힘듭니까' 이런 추상적인 질문을 하는데, 나는 기분이 썩 좋지 않더라고요. 내가 이런 평가를 받아야 하나. (보훈심사위원회) 심사위원이 이렇게 말해요. '생존자시군요. 힘드시군요. 그런데 애매한데요' 그게 상처더라고요. '마음병'이 있는 사람들은 위로받고 싶은 게 있어요. 그런데 애매하다니요"

<서울대 의학정보>에 따르면 PTSD(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는 '사람이 전쟁, 고문, 자연재해, 사고 등의 심각한 사건을 경험한 후 그 사건 공포감을 계속적인 재경험을 통해 느껴 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에너지를 소비하게 되는 질환'을 말한다. 보훈처는 이 질환을 국가유공자 등급 사유로 인정하지만, 가장 낮은 7등급을 부여한다. 다른 등급과는 달리 7등급 국가유공자가 받는 취업·교육·의료 지원은 제한적이다.  

▲면전에서 그런 말을 하나요.
"이렇게 말해요. '에이 이거 아닌데' 계속 머리를 긁적이더라고요. 그런 몸짓은 나중에 해도 되는데 왜 그걸 내 앞에서 했는지..." 

국가유공자 심사는 크게 두 절차로 나뉜다. 먼저 보훈처 산하 보훈심사위원회가 군과 민간에서 발급받은 의료기록을 바탕으로 상이등급 요건자가 맞는지 심사한다. 이 절차를 통과하면 보훈병원에서 별도의 신체검사를 통해 보훈심사위 심사가 맞는지 다시 확인한다. 과거엔 보훈병원 절차를 통과하지 못하면 다시 보훈심사위 절차부터 밟아야 했다. 이 절차를 모두 통과해야 국가유공자가 될 수 있다.

▲자료가 충분하지 않다는 말인가요. 
"축적할 시간이 없었어요. (2010년) 3월 26일 사고가 나고 수도병원에 1~2주 정도 입원했어요. 다시 생활관으로 이동해 영결식 때까지 기다렸어요. 그리고 이틀 뒤 전역했어요. (전역 후에도) 병원 다니는 게 너무 힘들었어요. 그때만 해도 정신질환 인식은 '또라이'로 보는 거예요. 정신과에 간다고 하면 '쟤 정신이상자 아니냐'라는 사회적 눈초리와 시선이 싫었어요. 그러다 잠을 너무 심하게 자지 않으니까 아버지가 위험하게 봤는지 병원으로 끌고 갔어요"

▲그때가 언젠가요. 
"2010년 6월 이전이에요. 전역은 2010년 5월 1일, 사고는 2010년 3월 26일. (첫 심사에서 국립유공자로 인정된) 다른 하사는 군이 군 병원에 보내니까 상담기록이 자연스럽게 남아요. 하지만 난 첫 번째 전역자고, 사회인이 됐으니까 강압적으로 병원에 가는 게 아니잖아요"

전씨가 늘 메는 가방엔 2010년 3월 26일을 상징하는 것을이 잔득 달려 있다. [사진=최지환 기자]
전씨가 늘 메는 가방엔 2010년 3월 26일, 군, 국가를 상징하는 것들이 잔득 달려 있다. [사진=최지환 기자]

▲전역 이후 국가유공자 신청 절차를 안내받은 게 있나요. 
"사전교육은 없었어요. 국가유공자 개념 자체가 없었어요. (첫 국가유공자 신청 때) PTSD 심사 자체가 없었거든요. 제대하고 신청했는데 '안 된다'고 하니까, 그때는 큰 욕심이 없었어요. '살았으니까 됐지' '나는 하나도 안 힘들어 괜찮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죠" 

전씨는 전역 전 국군수도병원에서 'PTSD 고위험군' 진단을 받았지만 2011년 첫 신청 때 "자료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국가유공자에서 탈락했다. PTSD는 국가유공자 7개 등급 중에 최하위 7등급으로만 분류된다. 왜 그보다 높은 등급이 될 수 없는지 법은 설명하지 않는다. 7급은 한 등급 높은 6급과는 달리 의료 지원이 제한적이고 취업 지원 대상에서 가족이 제외된다. 

▲인정되지 않은 이유가 뭔가요.
"'진료기록이 부족하다'고 했어요. 그때는 (보훈병원) 신체검사 때 군의관이 바로 등급을 매긴 것으로 기억해요. 그때는 군의관을 잘 만나면 되고, 잘못 만나면 안 되고 그런 거였어요. 군의관이 딱 잘랐어요. 보훈병원 담당의가 '조금 부족해 보인다'고 잘랐어요. 누군가 이런 말을 하더군요. '사회생활 능력을 100%으로 따졌을 때 PTSD 증상을 앓은 생존자는 능력이 25% 떨어지는 사람들이다. 75% 능률밖에 없다. 그래서 7급을 주는 거다' 그 기준이 대체 뭘까요" 
 
▲국가는 생존자를 '천안함 용사'라고 불렀잖아요. 군이나 국방부에서 신경 써준 게 없나요. 
"없었어요. (생존자들이 PTSD로) 아픈 건 '특별한 케이스'잖아요. 공무상 부상자와는 같은 잣대로 본다는 것 자체가 나 스스로는 받아들이기 힘들었어요. 준전시 상황에서, 아니 전시 상황에서 어찌 됐든 부상을 입고 나왔으면, 손가락 안에 든 사건 중 하나잖아요. 그런데 개인이 입증하겠다고 병원에 다니고, '나아파요 아파요' 그래야 하고. 국가가 '이분은 어떤 사유로 등급을 받기 어렵다'고 해명을 하고, 기록을 찾아고 해야 하는데 (생존자가) 다 찾아서 '나 아파요' 하는 게 뭔가 거꾸로 되야 하지 않을까요"

[사진=최지환 기자]
22일 용산역 맞이방에 설치된 '천안함 추모 사진전'을 지켜보는 전준영씨. [사진=최지환 기자]

▲결국 8년이 지나 2019년 5월 두 번째 신청 만에 7급이 인정됐어요. 그 입증을 어떻게 했나요.
"입증이라기보다 힘들어서 (병원을) 다닌 게 차곡차곡 쌓인 거예요" 

▲정신과 진료는 비용도 만만치 않다고 들었어요.
"그나마 주치의가 내 사정을 알아서 저렴하게 해줬어요. 한 번 상담하는데 5만원, 심리테스트 받는데 40만원 비용이 들거든요. 5만원이 어떤 사람한테는 작은 돈일 수도 있어요. 하지만 무직자한테는 그 5만원이 큰돈이에요. 5만원이 없어서 병원에 다니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생존자 입장에서 가장 중요한 게 취업 문제라면서요.
"심리적으로 취업이 안 되면 알잖아요. 조금이라도 (씀씀이를) 줄여야 하는 상황에서 마음의 여유가 있어야 병원엘 다니고 할 수 있는 건데요"

▲생존자 중에는 국가유공자 신청 자체를 포기한 사람도 있던데요.
"어차피 신청해봤자 되지 않으니까 포기한 거예요. 요즘엔 또 몇 명이 되니까 긍정적으로 보기도 하지만 1~2년 전만 해도 '등급 받지도 못할 건데' 이런 사람이 많았어요" 

생존자 58명 중 예비역 33명 가운데 2명은 국가유공자 신청 자체를 하지 않았다. 나머지 31명 중 단 9명만 국가유공자가 인정된 까닭이다. 

▲지난해 보훈처가 '천안함 생존자' 건강 상태를 재확인하겠다고 했는데요.
"심리상담센터를 만들긴 했어요. 지금도 운영되는 거로 알아요. 하지만 안 갔어요. 나랑 맞는 사람이랑 대화해야지, 그게 있다고 가서 마음이 풀리지는 않아요. 정신과를 여러 번 옮겨봤는데 나랑 맞는 사람이 있어요. 그걸 '병원 쇼핑'이라고 하더라고요. 정신의학적으로 맞는 사람을 만나야만 치료가 수월해요. (심리상담센터에서) 약물치료는 할 수 있겠지만, 결국 '마음병'이기 때문에 말로 풀어야 해요" 

▲한 번 더 재검을 받아야 한다던데요. 
"재검까지 2년 남았어요. 2021년 5월이에요. 호전되는 게 보이면 탈락이에요. 처음 등급을 받고 다른 국가유공자가 그랬어요. '3년 뒤에 비해당될 수도 있겠다'" 

국가유공자법 제6조의3은 "국가보훈처장은 직권으로 재판정 신체검사를 실시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여기에 PTSD도 포함된다. 

▲관련 규정을 보면 재검은 '해야 한다'가 아니라 '할 수 있다'던데, 국가가 천안함 생존자를 포용하지 못한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어요. 
"어떤 친구는 같은 (PTSD) 진단을 받았는데 (3년 뒤에 재검해야 한다는) 서류를 받은 적이 없대요. 나는 받았어요. 우리가 그냥 어디에 떨어져서 다친 게 아니잖아요"

▲10주기를 맞아 국회를 찾아 여러 활동을 한 것으로 알아요. 보훈 제도, 무엇부터 바꿔야 할까요.
"일단 전상수당을 말하고 싶어요. 공상자와 전상자가 받은 급여 차가 2만 3000원이에요. 그 돈 받으려고 전상자가 될 필요는 없거든요. 하재현 중사 같은 경우도 한쪽 다리를 잃었어도 공상 판정됐어요. 그가 전상 판정을 위해 여기저기 목소리를 낸 건 '전투 상황에 투입됐던 군인이다' 그거 하나 때문이에요" 

하 중사는 지난 2015년 8월 4일 경기 파주 비무장지대(DMZ)에 투입돼 수색작전을 벌이다 북한군이 설치한 목함지뢰를 밟아 다리를 잃었다. 하지만 보훈처는 적과의 교전 중 부상을 뜻하는 '전상'이 아닌 교육훈련 같은 공무 중 부상을 말하는 '공상'으로 처리했다. 사회적 논란이 일었고 뒤늦게 대통령이 "관련 법조문을 탄력적으로 해석하라"고 지시하자 보훈처는 지난해 10월 2일 전상으로 정정했다.

▲PTSD 관련해선.
"절차를 바꾸고 싶어요. 개인입증주의잖아요. 나라가 보듬어주고 챙겨줄 것으로 알았는데 내다 버린 느낌... 국가가 걱정해서 따뜻한 전화 한 통 했다면 마음이 많이 녹았을 건데 그것마저 없었어요"

전씨는 미국과 한국을 비교했다. 

"미국은 전투에 참여한 군인을 추적 관찰해요. (전역자에게) '병원 다녀오셨습니까. 다녀오셨으면 데이터 올려주세요' 그런데 미국은 참전자가 많지만 대한민국은 전상자가 별로 많지 않아요. 만 50세 이하로 분류하면 전상자가 58명밖에 되지 않아요. 보훈처가 그 58명 관리하지 못할까요?"

PTSD가 국가유공자 사유로 인정될 수 있는 등급은 '최하등급'인 7급이다.  

"PTSD가 급수로는 최하급인데, (그 증상의) 심각성을 모르나 봐요. 언제 울지 몰라요. 갑자기 터져요. 위험한 상황으로 바뀔 수 있어요. 그런데 7급이요? 어쩔 땐 '어쩔 수 없이 준건가' 이런 생각이 들어요" 

전씨가 국가유공자 7급이란 표지를 가슴에 다는데 걸린 시간은 9년. 3년의 해군 복무를 명한 국가는 그가 전역한 2010년 5월 1일 두번째 명령을 하달했다. 고통을 입증하라.      

23일 전씨와 함께 사진전 모임에 동행했다 인터뷰까지 기다린 페친. [사진=최지환 기자]
22일 전준영씨와 함께 '천안함 추모전' 모임에 동행했다 인터뷰가 끝날 때까지 기다린 전씨 페이스북 친구 3명이 '천안함 46용사' 사진을 배경으로 함께 사진을 찍었다. [사진=최지환 기자]

[위키리크스한국=윤여진 기자]

aftershock@wikileaks-kr.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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