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인사이드] 미국 우파 시민운동의 역사(상)... 보스턴에서 몽고메리, 미 전역에 퍼진 반민권운동
[WIKI 인사이드] 미국 우파 시민운동의 역사(상)... 보스턴에서 몽고메리, 미 전역에 퍼진 반민권운동
  • 최석진 기자
  • 승인 2020.09.11 06:39
  • 수정 2020.09.11 06: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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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연합뉴스
사진 출처=연합뉴스

흑백투쟁을 필두로 한 미국의 사회 갈등은 뿌리가 깊다. 특히 인종문제를 두고 벌어진 우파들의 저항운동은 지금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우파들의 거리 투쟁과 비교해 살펴볼 가치가 있다.

미국인들 중 많은 사람들이 1950년대와 1960년대 민권운동은 남부 일부에서만 일어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사실은 민권-반민권 운동의 잔혹한 불길은 미국 전역에 걸쳐서 있었다.

1956년 버지니아 출신의 상원의원 해리 버드는 전국 공립학교에서의 인종통합 교육에 반발해 민권운동을 반대하는 시위를 주동했다. 그는 “남부 주(州)들이 결집해서 대대적인 운동을 벌인다면 저는 이 국가의 나머지 사람들이 언젠가는 남부가 인종통합에 반대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 ‘대대적인 운동’은 흑인학생들에 대한 폭력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흔했다. 그리고 버드는 남부의 많은 백인들만을 향해 행동에 떨쳐 일어나라고 충동했지만 민권운동에 반대하는 움직임은 분명히 남부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1963년 실시된 여론조사에서는 78%의 백인들이 만일 흑인이 자기 동네로 이사 오면 살던 동네를 떠나겠다고 대답했다. 그런가 하면 백인들 60%는 마르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가 주도한 워싱턴행진에 대해 반감을 지니고 있었다.

뉴욕에서 캘리포니아까지, 반민권운동은 전역에 걸쳐 폭넓게 일어났다. 그리고 많은 미국인들은 스스럼없이 이 운동을 지지한다고 밝히고 나섰다.

보밍햄(Bombingham), 다이너마이트 힐, 그리고 인종차별의 희생자들

미국 백인들의 인종통합 정책 반대 목소리는 처음에는 법률을 통해 백인들만의 거주지를 지켜내는 형태로 나타났다. 그러나 법의 협조를 구하지 못한 경우 그들은 종종 테러에 의존했다.

1950년대 앨라배마 주 버밍햄(Birmingham)의 ‘센터 스트리트’는 흑백을 가르는 인종 경계선 역할을 했다. 백인들은 전통적으로 센터 스트리트 서쪽에 살았다. 그러나 흑인들이 이 지역으로 이주해오면서부터 폭탄(bombing) 테러가 시작되었다.

“40년대 후반부터 60년대 중반까지 버밍햄에서는 40건이 넘는 폭탄 테러가 발생했다.”

역사가 호레이스 헌틀리는 이렇게 말했다.

“미궁에 빠진 폭발 사건이 40건이 넘었다.”

이 폭발들은 흑인 주민들을 공포에 떨게 했고, ‘센터 스트리트’에는 ‘다이너마이트 힐’이라는 새로운 별칭이 붙게 되었다. 또, 버밍햄(Birmingham) 시도 ‘보밍햄(Bombingham)’이라는 불명예스러운 이름을 하나 더 가지게 되었다.

KKK단은 처음에는 이주해온 흑인들이 사는 집의 대문을 불태우다가, 밤에 총을 쏘곤 했다. 그러나 그들은 얼마 있지 않아서 다이너마이트를 동원하기 시작했다. 백인우월주의자들이 다이너마이트를 집어던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테러리즘이라는 용어는 요즘 자주 사용돼서 익숙하지만,”

다이너마이트 힐에서 자랐던 제프 드루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50년대와 60년대 거의 매일 같이 테러의 희생자였습니다. 흔한 일이었지요.”

드루는 KKK단이 자신의 아버지에게 전화를 해서 “오늘밤 우리가 당신 집을 폭파시킬 거다.”라고 한 사실을 기억하고 있다. 이에 대해 그의 아버지는 “왜 전화를 한 거야? 할 테면 해봐. 어서 해보라고. 전화하지 말고 그냥 쳐들어와.”라고 응수한 후 전화를 끊었다.

폭탄 투척자들은 민권운동가 변호사 아서 쇼어스의 집을 수차례 목표로 했다.

“창문으로 총탄이 날아오는 일은 자주 있었지요.”

아서의 딸인 헬렌 쇼어스 리는 이렇게 떠올렸다.

“우리는 총소리가 울릴 경우 ‘바닥에 엎드려서 긴다’는 원칙을 세워놓고 있었습니다.”

-백인 전용 해변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는 흑인 시위대와 분리주의자들, 그리고 경찰의 모습(사진 출처=Wikimedia Commons)
백인 전용 해변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는 흑인 시위대와 분리주의자들, 그리고 경찰의 모습(사진 출처=ATI)

미국 여러 도시로 번진 인종 폭력

흑인 거주자들이 폭력의 위협 앞에 놓인 곳은 보밍햄(Bombingham)뿐만이 아니었다. 미국 전역에 걸쳐 비슷한 사건들이 발생했다.

1955년 초반 6개월 동안에만도 필라델피아의 흑백 분리지역 외곽에서 집을 얻거나 사려는 흑인 200명 이상이 공격을 받았다. 그리고 로스앤젤레스에서는 1950년과 1965년 사이 흑백 분리지역을 벗어나 이사하려고 시도했던 흑인 100명 이상이 폭력의 목표물이 되었다.

1951년 7월 11일, 흑인 한 가족이 일리노이즈 시서로에 있는 백인만 살던 아파트 단지로 이주해온 다음 미국 역사상 최악의 인종 폭력 사태 중 하나가 발생했다.

가장인 하비 클라크 주니어는 시카고 사우스사이드 빈민 주거지에서 벗어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의 전쟁 영웅이기도 했던 이 남자가 가족을 데리고 새로운 정착지에 자리를 잡으려하자 보안관이 찾아와서 “여기서 빨리 나가. 이 건물로는 이사할 수 없어.”라고 말했다.

클라크는 법원의 판결을 받아낸 후 드디어 가족의 짐들을 아파트로 옮겼다. 그러나 그들은 새로운 집에서 단 하룻밤도 머물 수 없었다. 백인 인종주의자들 무리가 집 밖으로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백인들의 숫자는 금세 4,000명으로 불어났다.

이 가족이 몸을 피신한 후에도 백인들은 떠나지 않았다. 대신에 그들은 아파트로 쳐들어가 가구들을 창밖으로 내던지고 싱크대를 부셔버렸다. 그런 다음 그들은 아파트 전체에 불을 질러서 같은 동에 살던 백인들조차 이재민으로 만들어버렸다.

이 난동으로 118명이 체포되었지만 아무도 기소되지 않았다. 대신에 흑인들을 불러들여 문제를 일으켰다고 오히려 아파트 건물의 소유자와 중개인이 기소되었다.

미국에서 인종 차별 정책을 유지해야한다는 목소리는 폭력을 통해서만 배출된 것은 아니었다. 일부 주정부들도 정책을 통해 비슷한 목소리를 냈다.

1934년에 설립된 ‘연방 주택관리청(FHA)’이 흑인 동네의 주택담보대출에 대한 보증을 거부하는 일이 잦았다. 이 정책은 현재는 ‘레드라이닝(redlining)’이라 불리고 있는데, 당시에는 전국적으로 흔하게 발생했다. ‘레드라이닝’이란 은행·보험회사가 특정 경계지역을 설정해서 담보융자·보험인수를 거부하는 것을 말한다.

일부 도시들도 흑백 분리정책을 유지하기 위해 지역을 구분하는 방책을 도입했다. 예를 들면, 배제 구역을 설정(exclusionary zoning)해서 특정 지역에 다세대 주택과 아파트를 하가하지 않음으로써 흑인 거주자들이 백인들만이 사는 지역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한 조치를 들 수 있다. FHA의 매뉴얼은 ‘함께 어울릴 수 없는 인종들은 같은 공동체 내에서 살아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기도 했다.

FHA는 더 나아가 백인 공동체 주민은 부동산을 흑인에게는 절대 팔거나 임대하지 않겠다고 서약하는 ‘인종 계약서(racial covenants)’를 추천하기도 했다.

흑백 분리주의를 주장하는 시위대가 아칸소 주 리틀락에 있는 센트럴 고등학교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는 모습(사진 출처=Wikimedia Commons)
흑백 분리주의를 주장하는 시위대가 아칸소 주 리틀락에 있는 센트럴 고등학교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는 모습(ATI)

흑백통합 교육이 실시되자 백인 학부모들은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1954년 미국 대법원이 학교에서 흑백을 분리하는 교육이 헌법에 위반된다고 결론을 내렸지만 학교에서의 차별 교육을 놓고 갈등은 끝날 줄을 몰랐다. 백인 학부모들은 수십 년 동안 인종통합 교육에 반대하는 투쟁을 벌였다.

그들은 자녀들을 공립학교에서 빼내 백인들끼리만 교육하는 사립학교로 보내고, 통합 교육을 시도하는 흑인들은 누구라도 위협을 받았다.

1957년 9월 4일, 아칸소 주 리틀락에 있는 센트럴 고등학교에 9명의 십대가 첫 등교를 했다. 15살의 엘리자베스 엑포드가 전에는 백인뿐이었던 학교에 나타나자 분노한 군중들과 무장한 군인들이 그녀를 막아섰다.

“완전히 홀로 고립된 느낌을 기억합니다.”

엑포드는 나중에 이렇게 회상했다.

“저는 그 상황을 어떻게 빠져나올 수 있을지 몰랐어요. 혹시 화를 당하지나 않을지 걱정이 들었지요. 소란 때문에 귀가 먹먹할 정도였어요. 개별적으로 들려오는 소리들은 들을 수 있었지만 사람들이 얼마나 모였는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완전히 저 혼자뿐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백인 학생들은 군인들이 흑인들을 몰아낼 때까지 학교에 들어서기를 거부했다. 많은 10대들은 흑인들의 등교가 허락된다면 수업을 거부할 것이라고 말했다.

리틀락의 9명 학생들이 최종적으로 수업을 받을 수 있게 되기까지 2주일 이상이 거렸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분노한 군중들은 학교를 둘러싸고, 흑인 학생들을 위협하며, 교내로 진입하려했다. 결국 학교 측은 안전을 우려해서 3교시 수업 후 학생들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리고 학기 내내 백인 학생들은 리틀락의 9명 학생들을 괴롭혔다.

이 같은 위협 때문에 차별 교육이 유지된 것은 아니지만 주 정부는 이내 통합 교육을 피하기 위해 학군을 폐쇄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그래서 1958-1959 학기에 리틀락 당국은 4개 학교의 문을 닫도록 했다. 이 조치로 인해 수천 명의 학생들이 해당 학교를 떠나야했으며, 그 안에는 백인들도 들어있었다.

한편, 정치인들이 나서서 흑백 통합에 반대하는 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1963년 앨라배마 주지사 조지 월리스는 터스키기 고등학교가 통합교육을 실시하지 못하도록 방해했다. 그는 개인적으로 나서서 13명의 흑인 학생들이 수업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았다.

그러자 수일 이내로 이 학교의 모든 백인 학생들이 백인 전용 사립학교로 전학을 했다. 결국 터스키기 고등학교는 1964년 1월 문을 닫을 수 밖에 없었다.(하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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