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별세] 온 몸으로 위기 느낀 이건희가 내놓은 '신경영' 선언
[이건희 별세] 온 몸으로 위기 느낀 이건희가 내놓은 '신경영' 선언
  • 정예린 기자
  • 기사승인 2020-10-25 15:03:30
  • 최종수정 2020.10.25 15: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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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초일류 기업으로 도약 기틀 닦아
"질 위해서라면 양 희생에도 좋다"
故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1993년 신경영 선언 당시 모습. [사진=삼성전자]
故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1993년 신경영 선언 당시 모습. [사진=삼성전자]

“변하지 않으면 영원히 2류나 2.5류가 된다”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꿔라”

고(故)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1993년 6월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한 ‘신경영’ 선언은 숱한 화제를 모았다. 당시 국내 1위 기업으로서 자만에 빠져있던 임직원들에게 위기의식을 강조하며 ‘변화’와 ‘도전’을 주문했다. 

‘애니콜 화형식’ 등을 통해 뼈를 깎는 체질 개선을 통해 품질을 중시하는 구조를 마련했고, 학력제한 철폐 등으로 능력주의 인사 기조를 정착시켰다. 재계에서는 신경영을 기점으로 초일류 기업의 도약을 위한 기틀을 마련했다는 평가하고 있다. 

◇ 위기의식 온 몸으로 느낀 이건희

이건희 회장은 글로벌 경영환경의 격변 속에서 살아 남기 위해서는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기업이 돼야 하는데, 삼성의 수준은 그렇지 못하다고 진단했다. 당시 일선 경영진의 관심은 지난해에 비해 얼마나 많이 생산하고 판매했는지 등의 양적 목표 달성에 집중돼 있었다. 

이 회장은 “우리는 자만심에 눈이 가려져 위기를 진정 위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자기 자신의 못난 점을 알지 못하고 있다”며 “이대로 가다간 망할지도 모른다는 위기를 온몸으로 느끼고 있다. 내가 등허리에 식은땀이 난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실제 삼성이 만든 제품은 동남아 등 일부 시장에서 부분적으로 성공을 거두고 있을 뿐, 미국, 일본 등 선진 시장에서는 싸구려 취급을 받고 있었다. 이에 이 회장은 1993년 2월 전자 관계사 주요 임원이 참석한 가운데 미국 LA에서 전자부문 수출상품 현지비교 평가회의를 주재했다. 현지 매장 점검에서 삼성제품은 고객으로부터 외면받아 한쪽 구석에 먼지를 쓴 채 놓여 있었다. 고인은 “삼성이란 이름을 반환해야 한다”며 통탄했다고 한다.

이후 고인은 당시 일본 도쿄에서 삼성의 경영 현장을 지도해 온 일본인 고문들과 회의를 진행했다. 고문들은 삼성의 취약점으로 약한 상품기획력, 늦은 시장 진출 시기 등을 지적했다. 

회의에서 거론된 내용들은 이 회장이 숱하게 지적하며 고치기를 강조해온 고질적 업무관행이었다. 도쿄에서의 회의 직후 프랑크푸르트로 건너간 고인은 품질고발 사내방송 프로그램 비디오테이프를 받고 보고 또 다른 충격을 받았다. 해당 테이프는 세탁기 조립 라인에서 직원들이 세탁기 덮개 여닫이 부분 규격이 맞지 않아 닫히지 않자 즉석에서 덮개를 칼로 깎아 내고 조립하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2013년 열린 신경영 20주년 만찬에서 고 이건희 회장 모습. [사진=삼성전자]
2013년 열린 신경영 20주년 만찬에서 고 이건희 회장 모습. [사진=삼성전자]

◇ "질 위해서 양 희생시켜도 좋다"

1993년 6월 7일 이 회장은 비장한 각오로 임원 등을 프랑크푸르트 캠핀스키 호텔로 불러 모아 새로운 삼성을 여는 회의를 주재했다. 이 자리에서 나온 것이 바로 신경영 선언이다. 

이 회장은 “삼성은 이제 양 위주의 의식, 체질, 제도, 관행에서 벗어나 질 위주로 철저히 변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신경영 선언 이후 주요 임원들을 긴급 소집한 고인은 신경영을 전파하기 위한 회의와 교육을 지속했다. 고인은 약 2개월에 걸쳐 회의를 직접 주재하며 삼성의 신경영 철학을 교육했다. 이 기간 동안 교육 받은 임직원은 1800여 명에 이른다. 이들과의 대화시간은 350시간에 달했으며, 이를 풀어 쓰면 A4 용지 8500매에 해당하는 방대한 분량인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 신경영의 핵심은 질 위주의 경영이다. 당시 고인은 양 위주 경영의 한계를 지적하며, 불량은 암이라는 표현까지 썼다. 

이 회장은 “위궤양은 회복되지만 암은 진화한다. 초기에 잘라내지 않으면 3~5년 뒤에 온몸으로 전이돼 사람을 죽인다. 삼성은 자칫  잘못하면 암의 말기에 들어갈 가능성이 있다. 암은 초기에 수술하면 나을 수 있으나 3기에 들어가면 누구도 못 고친다”고 지적했다.

이어 “질을 위해서라면 양을 희생시켜도 좋다. 제품과 서비스, 사람과 경영의 질을 끌어 올리기 위해 필요하다면 공장이나 라인의 생산을 중단해도 좋다는 말”이라며 “질 위주의 경영을 해야 불량이 줄고, 품질이 좋아지고, 효율도 더 나고, 물건이 더 나와서 결국은 좋은 의미의 양이 된다”고 강조했다. 

◇ 뼈를 깎는 체질 개선…화형식까지

고인의 강한 질타 이후 품질을 최우선으로 불량을 뿌리 뽑기 위한 실질적인 조치들이 잇따라 취해졌다.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가 라인스톱 제도다. 

라인스톱제도란 생산현장에서 불량이 발생할 경우, 즉시 해당 생산라인의 가동을 중단하고 제조과정의 문제점을 완전히 해결한 다음 재가동함으로써 문제 재발을 방지하는 제도다. 생산물량이 밀려 있는데도 불구하고 라인을 세워야 하는 생산 담당자들에게는 상당한 고통이었지만, 실제 효과는 컸던 것으로 전해진다. 전자제품의 경우 1993년 불량률이 전년도에 비해 적게는 30%, 많게는 50%까지 줄어들었다. 

이와 함께 1995년 3월 불량 무선전화기 화형식도 삼성의 뼈를 깎는 의지를 보여줬다고 평가 받는다. 

당시 삼성전자 무선전화기 사업부의 제품 불량률은 11.8%까지 올라가는 심각한 상황이었다. 신경영 선언 이후 1년 이상 지났음에도 여전히 불량품이 나오는 것에 대한 원성이 높았다. 

고인은 "신경영 이후에도 이런 나쁜 물건을 만들고, 엉터리 물건을 파는 정신은 무엇인가? 적자 내고 고객으로부터 인심 잃고 악평을 받으면서 이런 사업을 왜 하는가?  삼성에서 수준 미달의 제품을 만드는 것은 죄악이다. 회사 문을 닫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시정해야 한다"며 문제의 심각성을 강하게 질타했다.

1995년 1월 이건희 회장은 품질사고 대책과 향후 계획을 점검하면서 고객들에게는 사죄하는 마음으로 무조건 새 제품으로 교환해주는 특단의 조치를 취하도록 했다. 이와 함께 수거된 제품을 소각함으로써 임직원들의 불량의식도 함께 불태울 것을 제안했다. 15만 대, 150여억 원 어치의 제품이 수거되었고 화형식을 통해 전량 폐기 처분됐다.

2006년 미국 뉴욕 익스피리언스 매장 방문한 고 이건희 회장. [사진=삼성전자]
2006년 미국 뉴욕 익스피리언스 매장 방문한 고 이건희 회장. [사진=삼성전자]

◇ 학력·성별 제한 폐지 등 인사에도 '신경영' 철학 전파

신경영의 변화는 공정한 인사의 전통을 조직에 뿌리 내리고, 연공서열이나 각종 차별조항을 철폐해 시대 변화에 맞는 능력주의 인사가 정착되는 계기가 됐다. 

삼성은 1993년 하반기 신입사원 공채부터 전형 방법을 전격적으로 변경했다. 필기시험에서 전공시험을 폐지하고 전산 기초지식과 상식, 영어 듣기 시험을 도입했다. 1994년 6월에는 가점주의 인사고과, 인사규정 단순화, 인간미·도덕성 중시 채용, 관계사 간 교환근무제 도입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인사개혁을 단행했다.

1995년 7월에는 채용 대 학력제한을 철폐하는 것을 포함한 열린 인사 개혁조치를 발표해 사회에 신선한 충격을 던졌다. 열린 인사는 기회균등 인사, 능력주의 인사, 가능성을 열어주는 인사 등 세 가지 내용을 담고 있었다. 

학력이나 성별 제한을 폐지하고, 1년간의 고과 결과에 따라 개인별로 급여를 차별화해  능력만큼 보상받는 능력급제를 단계적으로 모든 계열사에 실시했다. 사내대학을 설립하는 등 고졸 및 현장직 사원도 능력을 개발할 수 있도록 제도를 확충했다. 

여성인력의 활용을 확대하기 위해기존 남녀차별 관행을 없애고, 우수한 여성인력 육성을 위한 방안도 마련했다. 1992년 여성전문직제를 도입해 비서전문직을 공개채용하는 한편 신경영 이후에는 하반기 대졸사원 공채에서 대규모 여성 전문인력 채용을 본격화했다. 

이 회장은 21세기형 인재 양성을 위해 지역전문가제, 테크노 MBA 과정 등을 토입해 임직원의 경영능력 육성도 도왔다.

이 회장은 “기업이 인재를 양성하지 않는 것은 일종의 죄악이며, 양질의 인재를 활용하지 못하고 내보내는 것은 경영의 큰 손실”이라며 “부정보다 더 파렴치한 것이 바로 사람을 망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위키리크스한국=정예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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