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별세] "언제까지 기술 속국이어야 하나"…100년 기업 기틀 닦아
[이건희 별세] "언제까지 기술 속국이어야 하나"…100년 기업 기틀 닦아
  • 정예린 기자
  • 기사승인 2020-10-25 16:14:53
  • 최종수정 2020.10.25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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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시무식 당시 고(故) 이건희 회장. [사진=삼성전자]
1998년 시무식 당시 고(故) 이건희 회장. [사진=삼성전자]

“삼성을 세계적인 초일류 기업으로 성장시키겠다”

고(故)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1987년 회장 취임 당시 이렇게 약속했다. 33년이 흐른 지금, 메아리 없는 외침에 불과했던 고인의 약속은 삼성의 세계적 성공은 물론 한국을 글로벌 IT강국으로 도약시키는 초석을 마련한 계기가 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실제 1987년 당시 10조원이 안되던 삼성그룹의 매출은 2018년 386조원을 넘기며 29배 늘었다. 시가총액은 1조 수준에서 396조원으로 396배 커졌다. 

◇ 반도체부터 휴대폰까지…이건희가 내다 본 '미래'

그 기반에는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전격적으로 반도체 업체를 인수해 현재 삼성의 대표 사업으로 만든 고인의 안목과 의지가 주요하게 작용했다. 

1973년 이 회장이 파산 직전의 한국반도체를 인수한다고 했을 때 대내외적으로 ‘TV 하나도 제대로 못 만들면서, 최첨단으로 가는 것은 위험하다’, ‘미국과 일본보다 20,30년 뒤쳐졌는데 따라가기나 하겠는가?’ 등의 우려가 뒤따랐다. 일본의 한 기업 연구소는 ‘삼성이 반도체를 할 수 없는 다섯 가지 이유’라는 보고서를 내놓으며 비판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회장의 생각은 달랐다. 이 회장은 “언제까지 그들의 기술 속국이어야 하겠느냐?”며 “기술 식민지에서 벗어나는 일, 삼성이 나서야 한다. 사재를 보태겠다”며 반도체 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1986년 7월 삼성은 1메가 D램을 생산하며 반도체 산업을 본격적으로 꽃 피우기 시작했다. 이후 64메가 D램 개발로 기술 주도권을 확보한데 이어 생산량을 늘리며 시장 점유율도 1위를 기록, 기술과 생산 모두에서 명실상부한 세계 1위 기업으로 거듭났다. 

2005년 구미 사업장 방문한 고(故) 이건희 회장. [사진=삼성전자]
2005년 구미 사업장 방문한 고(故) 이건희 회장. [사진=삼성전자]

반도체의 성공에 이어 애니콜 신화가 바통을 이어 받았다. 

이 회장은 1993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의 신경영 선언 이후 삼성의 신수종 사업으로 휴대폰 사업을 예견했다. 고인은 “반드시 1명당 1대의 무선 단말기를 가지는 시대가 온다”며 “전화기를 중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애니콜은 1995년 8월 전세계 휴대폰 시장 1위인 모토로라를 제치고 51.5%의 점유율로 국내 정상에 올라섰다. 당시 대한민국은 모토로라가 시장점유율 1위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는 유일한 나라였다. 

이 회장은 2000년 신년사를 통해 21세기 초일류 기업 비전을 달성하기 위한 또 한 번의 계기를 만들었다. 스마트폰 보급은 물론 PC 통신 시절 향후 디지털 전환을 내다보고 또 한번의 체질 개선을 당부한 것이다. 

이 회장은 “새 천년이 시작되는 올해를 삼성 디지털 경영의 원년으로 선언하고, 제2의 신경영, 제2의 구조조정을 한다는 비장한 각오로 사업구조, 경영 관점과 시스템, 조직 문화 등 경영 전 부문의 디지털화를 힘있게 추진해 나갈 것”이라며 “이를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남보다 먼저 변화의 흐름을 읽고 전략과 기회를 선점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2010년 CES 참관하는 고(故) 이건희 회장. [사진=삼성전자]
2010년 CES 참관하는 고(故) 이건희 회장. [사진=삼성전자]

이 같은 삼성 대표 사업의 성공 뒤에는 고인의 위기 의식, 목표 달성을 위한 노력, 발전을 위한 도전 등이 자리하고 있다. 

실제 1992년 삼성이 세계 최초로 64메가 D램 반도체 개발에 성공해 처음으로 메모리 강국 일본을 추월하며 세계 1위로 올라선 순간에도 고인은 심각한 위기의식을 느끼며 밤잠을 설쳤다고 한다. 

1993년 일본 오사카 회의에서 고인은 “작년 중순부터 고민을 하기 시작해서 작년 말부터 하루에 3시간에서 5시간 밖에 잠이 안 왔다”며 다가올 위기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기도 했다. 

이 회장이 감지했던 위기는 1993년 닥쳐왔다. 품질보다 생산량 늘리기에 급급했던 생산라인에서 불량이 난 세탁기 뚜껑을 손으로 깎아 조립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이런 모습이 사내 방송으로 보도됐고 파장이 커지면서 질보다 양을 앞세우던 기존 관행에 제도이 걸렸다. 

당시 미국을 방문중이던 이 회장은 미국의 대표 전자제품 양판점인 ‘베스트바이’ 진열대 구석에서 먼지를 뒤집어 쓰고 있는 삼성 제품을 확인하고 “삼성이라는 이름을 반환하라”고 말하며 “먼지 구덩이에 처박힌 것에 어떻게 삼성이라는 이름을 쓸 수 있겠는가”라며 강하게 질타했다. 

삼성 제품이 뛰어난 품질로 인정받을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던 이 회장에게 불량 세탁기 고발 영상이 담긴 사내방송 테이프가 전달됐다. 

이를 본 이 회장은 그동안 쌓여온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꾸라”는 말로 유명한 신경영 선언을 내놨다. 1993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시작된 신경영 대장정은 총 8개 도시를 돌며 임직원 1800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350여 시간의 토의로 이어졌다. 

삼성은 1996년 연평균 17%라는 놀라운 성장률을 기록했다. 성장일로에 들어선 삼성이 안심하고 기뻐하고 있을 때 고인은 축제 분위기에 제동을 걸며 위기를 다시금 강조하며 긴급 사장단 회의를 소집했다. 

이 회장은 “반도체가 조금 팔려서 이익이 난다 하니깐 자기가 서있는 위치가 어디인지도 모르고, 그저 자만에 빠져 있다”며 질책했다. 

이후 삼성은 내부 자만을 경계하고 장래 위기에 대비하기 위한 비상경영에 돌입했다. 경영 전 분야에 걸쳐 3년 동안 원가 및 경비의 30%를 절감하겠다는 ‘경비 330 운동’을 강력하게 추진했고, 한계 사업을 과감히 정리하고 차세대 사업에 집중하는 한편 경영 합리화와 사업재구축을 목표로 비상경영을 진행했다. 

삼성이 비상경영에 돌입한지 1년 후인 1997년, IMF 외환위기가 닥쳐왔다. 위기에 미리 대비하고 허리띠를 졸라맨 삼성은 외환위기라는 거센 파도 속에서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급변하는 세계 디지털 시장을 선점하는 기회를 만들어 냈다. 

2011년 반도체 16라인 가동식 참석한 고(故) 이건희 회장. [사진=삼성전자]
2011년 반도체 16라인 가동식 참석한 고(故) 이건희 회장. [사진=삼성전자]

◇ 인재 채용 기준은 '능력'

학력과 성별에 따른 차별을 폐지하고 실력 위주의 인재 채용 기조도 삼성의 초일류 기업 도약의 기반이 됐다. 생전 이 회장은 불합리한 인사 차별을 타파하는 열린 인사를 전ㄹ격 지시하는 한편 여성에게도 동등한 기회를 부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1957년 1월 민간 기업 최초로 공개 채용 제도를 도입해 27명의 사원을 채용한 삼성은 1995년 대졸 공채 대신 3급 신입사원 입사 시험을 실시했다. 시험에 합격할 실력만 되면 대학 졸업장은 의미없는 것이 된 것이다. 또 1987년 취임 초부터 여성 인재의 중요성을 강조한 이 회장은 여성들이 육아 부담 때문에 마음 놓고 일하지 못하는 현실에 주목해 일찍이 어린이집 사업을 현실화 했다. 

◇ 협력사

취임 이듬해인 1988년 이 회장은 중소기업과 공존공생을 선언했다. 삼성이 자체 생산하던 제품과 부품 중 중소기업으로 생산이전이 가능한 352개 품목을 선정해 단계적으로 중소기업에 넘겨주기로 결정하면서 큰 화제가 되기도 했다. 

신경영 선언에서도 이 회장은 협력업체 육성을 다시 한번 역설했다. 그는 “삼성그룹의 대부분이 양산조립을 하고 있는데 이 업의 개념은 협력업체를 키우지 않으면 모체가 살아남지 못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 회장은 삼성 계열사들에게 협력사와 신뢰에 기반해 수평적이고 전략적인 파트너 관계를 맺으라고 주문했다. 이에 삼성에서는 ‘거래처’, ‘하청업체’ 등의 말이 사라지고 ‘협력업체’라는 표현을 쓰기 시작했다. 

◇ 디자인 중요성 역설…"0.6초안에 고객 발길 붙잡아야"

고인은 디자인의 중요성도 강조했다. 1996년을 ‘디자인 혁명의 해’로 선정하고 “우리의 철학과 혼이 깃든 삼성 고유의 디자인 개발에 그룹의 역량을 총집결해 나가도록 하자”고 말했다. 

2002년 4월 혁신적인 디자인의 휴대폰 'SGH-T100'이 출시됐다. 이 회장은 이 제품 개발 단계부터 꼼꼼히 디자인을 살폈고 잡기 쉽게 넓으면서도 가볍고 얇은 디자인을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조가비 형태의 이 휴대폰은 '이건희폰'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며 출시와 함께 큰 화제가 됐고 글로벌 1000만대 판매라는 대기록을 수립했다.

이 회장의 도전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2005년 밀라노에서 주요 사장단을 소집하고 ‘디자인 전략회의’를 주재한 이 회장은 삼성의 디자인 경쟁력을 1.5류로 평가하며 다시 한번 글로벌 초일류 수준으로 혁신할 것으로 주문했다. 

이 회장은 “제품이 소비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시간은 평균 0.6초인데 이 짧은 순간에 고객의 발길을 붙잡지 못하면 승리할 수 없다”고 말했다. 

고인은 삼성의 '밀라노 4대 디자인 전략'도 발표했다. 그 내용은 독창적 디자인과 UI 아이덴티티 구축, 디자인 우수인력 확보, 창조적이고 자유로운 조직문화 조성, 금형기술 인프라 강화 등으로 1996년에 이은 '제2 디자인 혁명’ 선언이었다.

이후 삼성의 디자인은 다시 한번 벽을 뛰어넘었다. 이듬해 출시된 와인잔 형상의 보르도TV는 2006년 한 해에만 300만대가 판매되며 세계 TV시장의 판도를 뒤바꿨다.

이 회장의 취임 이후 삼성은 100년 기업을 향한 그 무수한 노력과 도전의 연속이었다. 

재계에서는 회장 취임 당시 미래를 향한 약속, IT 강국의 초석, 글로벌 영토확장, 위기극복의 리더십, 사회 문화 변화 선도, 사회공헌 활동, 상생과 동반성장, 스포츠 지원, 소프트 경쟁력 강화, 그 모두가 100년 기업 삼성의 밑거름이 됐다고 보고 있다.

[위키리크스한국=정예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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