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숭호 칼럼] 여름을 견딜 수 있는 책 두 권!
[정숭호 칼럼] 여름을 견딜 수 있는 책 두 권!
  • 정숭호 칼럼
  • 승인 2022.07.11 09:41
  • 수정 2022.07.11 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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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와 파르티타를 가장 좋은 음악이라고 생각한 밀스타인은 평생 여러 차례 이 곡을 녹음했다. [출처=자유칼럼그룹]

여름을 이기는 방법으로 독서도 좋지요. 선풍기, 에어컨을 켜놓거나 앞뒤 베란다 문 활짝 열어놓고 살랑살랑 시원한 바람길에 헐렁한 반바지 차림으로 재미난 책 읽다가 어진 부인께서 차가운 수박 내주면 한 입 베어 물고, 졸리면 잠자고 …. 기막힌 피서 아니겠습니까? 내 말에 동의하시는 분들께, 괜찮으시다면, 딱 두 권 추천드리겠습니다. 취향 같은 분이 많으리라 기대하며.

하나는 미국 작가인 에이모 토울스가 쓴 소설 ‘모스크바의 신사’이고, 하나는 대단했던 바이올리니스트 나탄 밀스타인의 회고록 ‘러시아에서 서구로’입니다. 소설은 1917년 볼셰비키 혁명 직후의 러시아가 배경이고, 회고록은 볼셰비키 혁명을 피해 유럽으로 망명한 러시아-엄밀히 말하면 우크라이나-태생인 밀스타인이 자신이 만났던 20세기 예술가와 그들의 작품을 공저자인 솔로몬 볼코프와 함께 돌이켜본 기록입니다.

며칠 전에 읽기를 끝낸 ‘러시아에서 서구로’를 먼저 이야기해드리겠습니다. 나탄 밀스타인은 1904년에 태어나 1992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를 소개한 글에는 야샤 하이페츠(1901~1987)가 제자들에게 “다른 사람은 몰라도 밀스타인의 연주회에는 꼭 가봐라”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빠지지 않습니다. 하이페츠는 20세기의 가장 천재적 바이올리니스트라는 자부심이 가득해 좀체 다른 사람을 인정하지 않은 사람이지요. 두 사람보다 한 세대 앞 바이올리니스트로 ‘사랑의 기쁨’을 작곡한 프리츠 크라이슬러(1875~1962)도 세상을 떠나기 전에 “현재 가장 완벽한 바이올리니스트”라고 밀스타인을 극찬했다고 합니다.

밀스타인의 책에는 20세기의 유명한 음악가와 화가가 작품과 함께 수없이 등장합니다. 라흐마니노프, 토스카니니, 푸르트벵글러, 카라얀, 카잘스, 호로비츠, 퍄티골스키, 오이스트라흐, 라벨 등등 쟁쟁한 인물들의 본모습, 인간적 장·단점이 밀스타인이 직접 겪은 생생한 일화 속에 펼쳐집니다. 하지만 장점보다는 단점이 더 많이 적혀 있습니다. 그래서 더 재미있습니다. “예술의 깊이와 인간의 깊이는 서로 다르구나. 사람 속은 정말 알 수 없구나”라는 생각을 하면서 읽었습니다.

나는 ‘봄의 제전’, ‘불새’를 작곡한 이고리 스트라빈스키(1882~1971)를 그 음악과 함께 좋아했습니다. 음악에 조예가 깊은 밀란 쿤데라(1929~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가 “스트라빈스키는 음악에 이념을 담지 않은 작곡가”라고 쓴 산문을 읽고는 그를 더 지지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밀스타인은 스트라빈스키가 돈을 지독히도 밝혔다며 사실상 사람 취급을 안 했습니다.

초현실주의 화풍으로 이름 높은 마르크 샤갈(1887~1985)은 그림을 사려는 사람에게 “나는 돈에 관심이 없어요. 가격은 내 아내와 이야기하구려”라고 하고는 손님 등 뒤에 앉아서는 얼마를 받아야 하는지 부인에게 열심히 손가락 신호를 보내더라는 이야기도 나옵니다.

이 밖에도 과대 포장됐거나 과소 평가된 예술가와 그들의 일화가 많이 나오는데 밀스타인은 이야기들을 토막 내지 않고 사람과 사람을, 사건과 사건을 연결해가며 다른 이야기를 끌어냅니다. 손에 잡으면 다음에는 누가 나올까가 궁금해서 내려놓기 싫게 만드는 책. 가까이서 보면 복잡한 무늬가 얽혀 있지만 펼쳐놓으면 점잖고 고상하게 보이는 미묘한 색깔의 이탈리아산 고급 양복천이 떠올랐습니다. 내가 모르는 음악가도 많이 나오지만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그러면서 배우는 건데….

아, 이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서구로 망명한 러시아 음악가들이 20세기 세계 음악의 주류를 이루자 서구 출신 음악가 가운데 이름을 러시아 이름으로 바꾼 사람이 많았다는군요. 이름 때문에 당연히 러시아 출신 지휘자로 알았던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1882~1977)가 억양까지 러시아식으로 바꾼 영국 웨일스 출신임을 다른 사람이 말해줘서 알았다고 써놓았습니다.

스트라디바리와 과르네리 이야기도 재미있습니다. 이 명품 바이올린들이 이름에 걸맞은 소리를 내려면 표면에 칠한 바니시(니스)가 원래 그대로거나, 다시 칠했다면 원래 것 못지않게 좋은 바니시를 솜씨 뛰어난 명장이 칠했어야 하는데, 자신이 가르쳤던 ‘한국인’ 바이올리니스트들의 스트라디바리는 고친다며 싸구려 바니시를 함부로 칠해서 싸구려 바이올린 소리가 났다고 합니다. (2004년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오스트리아의 엘프리데 옐리네크의 소설 ‘피아노 치는 여자’에도 빈에 유학 온 한국 피아니스트를 폄훼하는 내용이 있더군요. 한국 음악인들이 세계 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내기까지는 이런 모멸의 시간이 있었다는 이야기!)

‘모스크바의 신사’는 무더위가 요즘 못지않았던 2년 전 이맘때 읽고 “너무너무 재미있다”는 글까지 썼더랬는데, 내가 독후감 올리기 전인 2017년에 미국 전 대통령 버락 오바마가 나와 비슷한 소감을 이미 썼더라고요. “재미가 넘쳐서 추천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입니다.

아래 상자 속 글은 ‘질 줄도 알고 속을 줄도 알아라’라는 제목으로 그때 쓴 독후감에 인용한 부분입니다. 주인공은 볼셰비키 혁명으로 모스크바의 한 호텔에 ‘종신 연금’된 제정 러시아의 젊은 백작. 호텔 최고의 VVIP고객에서 레스토랑 웨이터로 전락한 백작이 스위트룸에 투숙한 당대 러시아 최고 여배우와 얼떨결에 사랑을 나눈 직후 상황입니다. 혁명 지도자들이 총애하는 여배우가 이 ‘반동적’ 백작과 사랑에 빠지는 건 러브스토리의 필연적 전개!

젊은 남자로서 백작은 평소 한발 앞서 상황을 이끄는 것에 자부심이 있었다. 적시에 나타나기, 적절한 표현, 필요한 것을 예측하기 …. 백작에게 이 같은 것들은 교양 있게 잘 자란 남자의 특징이었다. 그러나 상황에 따라서는 (여성에게 지는 척, 속는 척) 한발 뒤처지는 것이 그 나름의 장점이 있다는 것을 백작은 새삼 깨달았다. 그로서는 그게 훨씬 더 편안했다.
(중략)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한발 뒤처지는 것이 한발 앞서는 것보다 더 편안하면서 더 자극적이기까지 했다. 한발 뒤처진 사람은 편안한 입장에서 새로이 알게 된 사람과의 저녁 시간이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흘러갈 거라고 상상할 것이다.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나눈 뒤에 편히 주무시라는 말을 건네며 문 앞에서 헤어질 거라고 상상할 것이다. 그런데 식사 도중 예기치 못한 칭찬이 있게 된다. 우연히 손가락이 상대의 손을 스치는 일도 생긴다. 부드러운 고백이 있고, 자신의 생각을 내세우지 않는 겸손한 웃음이 이어진다. 그런 다음 갑작스러운 키스 ….

소설이든 드라마든 재미있으려면 멋진 남녀 주인공의 사랑, 맛있는 음식과 술, 문학과 음악과 미술 및 역사와 과학에 관한 풍성하고 수준 높은 대화, 권력과 돈, 악당과 조력자의 이야기가 잘 짜인 순서대로 전개되어야 한다고 믿는 저에게 ‘모스크바의 신사’는 이 모든 게 다 들어 있는 소설이었습니다. (한번 읽어보시라니까요!!) 거기에 만악의 근원, 나쁜 정치까지 언급해주면 더 바랄 것이 없지요. ‘모스크바의 신사’에 들어 있는 이런 묘사 같은 것 말입니다.

“(호텔에 연금된 후 웨이터가 된) 백작이 알아낸 바로는, 볼셰비키들은 어떻게든 이유를 달아서 어떤 형식으로든 가능한 한 (예전 호텔 무도장에서) 자주 집회를 가졌다. 대개는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문제들을 가장 새로운 명칭을 붙여 요란하게 요구하는 집회였다.” 개혁, 혁신, 혁명…? 아무리 그래봤자 권력자만 바뀌었을 뿐 언제나 옛것의 되풀이더라는 겁니다.

망명자가 쓴 망명자 이야기가 대부분인 밀스타인의 자서전에도 볼셰비키 혁명,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비판이 없을 수 없지요. 스트라빈스키와 샤갈의 돈 밝힘은 그들 원래의 성격 탓인지, 내일을 알 수 없는 망명자라는 신분에서 비롯된 것인지 밀스타인은 밝히지는 않았으나 나는 후자일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 어쨌든 이 두 책의 재미는 이런 정치적 메시지를 은근슬쩍 비치고 있기 때문이지 싶습니다. 더 쓰면 스포일러! 이제 글을 끝내겠습니다. 더위 견뎌내시길!

/ 메타버스인문경영연구원장, 전 한국일보 경제부국장, 신문윤리위원  

[출처= 자유칼럼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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