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 프리즘] 엘리자베스 2세 서거와 영연방 국가 '호주'의 최우선 과제
[월드 프리즘] 엘리자베스 2세 서거와 영연방 국가 '호주'의 최우선 과제
  • 최석진 기자
  • 승인 2022.09.15 05:33
  • 수정 2022.09.15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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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에 전시된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의 모습 [사진=연합뉴스]
호주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에 전시된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의 모습 [사진=연합뉴스]

"호주 사람들에게는 영국 왕을 계속 받드느냐는 문제보다 호주 원주민 문제 해결이 더 시급하다."

CNN방송은 14일(현지 시각)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의 서거로 일부 영연방 국가들에서는 군주제를 탈피하자는 운동이 일어나고는 있지만 적어도 호주에서만큼은 원주민 문제의 해결만큼 중요하게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고 보도했다.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사망하고 24시간도 지나지 않아 영연방 수반(Head of State)의 사망에 따른 호주의 일사분란한 대응에 균열이 찾아들었다.

지난 10일 멜버른에서 호주 여자축구 연맹(AFLW) 소속 팀들 간의 시합이 TV로 중계되는 가운데 ‘호주 원주민에 대한 헌정 의식(Acknowledgment of Country)’을 치르기 위해 부동자세를 취했던 선수들은 곧바로 여왕을 추모하는 1분간의 묵념 시간을 갖았다.

하지만 경기 참가 선수들이 ‘원주민들의 명백한 영토 위에 서 있음’을 선언하는 이 헌정 의식 바로 뒤에 사망한 군주를 추모하는 의식이 치러진 사실에 대해 일부는 불편함을 감추지 않았다.

결국 10일이 되자 AFLW 경기에서 여왕을 추모하는 묵념 의식은 취소되었으며, 급기야 축구 클럽 중 하나인 ‘Western Bulldogs’의 구단주가 “이 묵념 의식이 우리의 깊은 상처를 건드렸다”는 성명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이 해프닝은 1788년 영국 정복자들에 점령당한 호주 원주민들(Australia’s First Nations people)의 사라지지 않는 상처가 얼마나 깊은지를 잘 드러내는 한 사건이 되었다.

국가에 따라 정도 차이는 있지만, 여왕의 사망을 계기로 다른 영연방 국가에서는 영국 군주제에서 벗어나자는 떠들썩한 소란이 벌어지고 있다. 그러나 호주에서는 앤서니 알바니스 총리의 친(親) 공화국 노선에도 불구하고 이참에 군주제를 벗어나자는 움직임이 크게 일고 있지 않다.

알바니스 총리는 여왕 사망 이후 언론 인터뷰나 기자회견을 통해 지금은 공화국을 거론할 때가 아니라고 반복해서 강조했다. 그리고 지난 화요일에는 호주 공화국 건립을 주장하는 ‘호주 공화국 운동(Australian Republican Movement)’ 측도 “여왕을 추도한다”는 의미로 추모 기간이 끝날 때까지는 운동을 잠시 중단하는 데 동의한 듯 보였다.

하지만 알바니스 총리가 당장 공화국 전환 추진을 기피하는 데는 사망한 군주에 대한 예의 차원 말고 다른 이유가 있다. 노동당 지도자이기도 한 총리는 선거 전에 총리직에 오르게 되면 자신의 첫 임기 3년 이내에 ‘호주 원주민들(Australia’s First Nations people)‘의 권리를 헌법에 못박는 문제를 놓고 국민투표를 실시하겠다고 공약한 바가 있다.

알바니스 총리는 지난 13일 이 공약과 관련한 질문을 받고 “나는 당시에 우리가 국가수반을 우리 자체의 통치자로 바꿔놓고서도 우리 헌법에서는 여전히 원주민을 인정하지 않고, 지구상에서 가장 낡은 문화를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상할 수 없다고 말했던 겁니다. 원주민 문제는 우리 정책의 최우선 과제가 되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원주민 권리 방기하기

헌법 개정은 호주 국민 과반수의 찬성을 필요로 한다. 다른 나라들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국민 과반수의 지지를 받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호주에서는 1901년 연방제 도입 이후 헌법 개정을 요구한 44건의 제안 중 단 8건만이 통과되었다.

호주 국민들이 헌번 개정을 반대한 마지막 목소리는 1999년 여왕과 총독을 대통령으로 바꾸자는 데에서 표출되었다.

당시로 돌아가보면, 헌법 개정 운동은 오랜 군주국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호주만의 길을 개척해 과감한 새로운 다문화 국가로 나아가자는 데로 모아졌었다. 당시 원주민 문제는 헌법 개정에 따른 두 번째 질문으로 우선순위에서 밀려나 있었으며, 원주민의 영토권을 헌법에 명문화하는 데 찬성하는지를 물었었다. 이 헌법 개정 운동도 실패로 끝났고, 원주민 원로들은 문안에 대해 자신들의 의견을 구하지 않았다고 불만을 표출하기도 했었다.

이는 놀라운 현상이 아니었다. 호주 원주민들은 역대 정부들이 자신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고 오랫동안 불평해 왔고, 현재 호주 국립대학교(ANU)의 ‘퍼스트 네이션즈(First Nations)’ 부총장을 맡고 있기도 한 야우루족(Yawuru) 출신의 피터 유는 1999년 여왕에게 메시지를 직접 전달하라는 한 원주민 장로의 조언을 받아들였다.

“나이든 원로 한 분이 ‘바다 건너가 늙은 여왕을 직접 만나시오. …… 호주 사람들은 여왕을 잘 못 이용하고 있어요.’라고 말했습니다.”

피터 유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그 원로는 원주민들이 여왕의 이름을 들은 때는 그들이 체포되었을 때뿐이었다는 사실을 상기한 것이라고 피터 유는 CNN에 말했다. 

“원로들은 호주 사람들의 여왕에 대한 존경심을 고려할 때 여왕의 이름이 더럽혀지고 명성이 훼손되고 있다고 느꼈고, 따라서 우리가 가서 상황을 설명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래서 피터 유 일행은 원로의 말을 따랐다.

피터 유와 대표단은 버킹엄궁에서 약 30분 동안 엘리자베스 여왕을 알현했고, 그녀로부터 영국이나 호주의 역대 어느 정부보다 훨씬 더 따뜻한 환대를 받았다고 한다.

피터 유는 대부분의 다른 공동체와 마찬가지로 여왕에 대한 호주 원주민 커뮤니티 내의 시각도 복합적이라고 말한다.

“감정이 매우 다양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식민지화의 결과로 인해 계속해서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책임을 여왕에게 물어야 할까요?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이렇게 이어갔다.

“책임을 물어야 할 대상은 호주 정부입니다. …… 나는 자신들의 의무를 의도적으로 방기한 호주 정부에 분노하는 겁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을 실은 관이 11일 에든버러의 홀리루드 궁전에 도착했다 [사진=로이터/연합]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을 실은 관이 11일 에든버러의 홀리루드 궁전에 도착했다 [사진=로이터/연합]

‘의회에 대한 원주민 목소리(Voice to Parliament)’

앤서니 알바니스 총리는 자신의 첫 임기가 끝나기 전에 ‘의회에 대한 원주민 목소리(Voice to Parliament)’를 두고 국민투표를 실시하겠다고 약속했다. ‘의회에 대한 원주민 목소리’는 별도로 선출된 원주민과 토레스 해협 섬 주민으로 구성된 새로운 헌법 기구로 원주민에 대한 권리를 최초로 법률로 문서화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호주 국립대학교의 정치학과 명예교수이자 전 호주 공화국 운동(Australian Republic Movement) 의장인 존 와르후르스트는 ‘의회에 대한 원주민 목소리’에 대한 국민투표가 공화국 전환보다 “당연히 최우선시 되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는 “공화당 사이에서도 그것에 대해 이론이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와르후르스트 교수는 ‘의회에 대한 원주민 목소리’ 통과가 여러 가지 이유로 중요하다고 말했다.

“호주의 식민지 과거에 대한 기준선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또 호주의 인종 문제에 대한 기준선 역할도 할 겁니다. …… 나는 우리가 이 국민투표를 통과시키지 못한다면 국제적으로도 충격파가 번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모든 원주민이 와르후르스트 교수의 주장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토레스 해협 원주민 나갈루마족 출신의 텔로나 피트는 ‘메리암(Meriam)’ 여성으로 1만1,000명의 회원을 보유한 ‘헌법 개정에 반대(Vote no to constitutional change)’하는 페이스북 그룹을 운영하고 있다. 

그녀는 ‘의회에 대한 원주민 목소리’ 추진 계획으로 이어진 법률의 초안을 마련하는 데 원주민들의 목소리가 충분히 반영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녀는 정부가 이미 원주민 문제를 알고 있으면서도 문제 해결을 위해 충분히 노력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이 문제는 ‘의회에 대한 원주민 목소리’에 대한 국민투표로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녀는 “그로써 성취될 일은 원주민의 권한을 박탈하고 의회에 권력을 부여하는 것 뿐입니다”라고 말했다.

피트는 선택지가 폭넓은 대중에게 제시되기 전에 누가 변화를 지지하는지 알아보기 위해 먼저 원주민들 사이에서 국민투표를 실시해야 한다고 말한다.

와르후르스트 교수는 ‘의회에 대한 원주민 목소리’가 승인되면 추가 헌법 개정의 통과가 쉬워질 것이라고 말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의회에 대한 원주민 목소리’가 부결될 경우에는 공화국으로 가는 길이 험난할 것이라는 점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는 ‘의회에 대한 원주민 목소리’가 통과된다면 호주 국민은 군주제 이후의 삶을 고려해야 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앞으로 5년에서 10년 사이에는 무망한 일일지는 모르지만 현재의 호주는 1999년과 같은 곳이 아니기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한 운동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때쯤 되면 영국 군주제와 훨씬 더 긴밀한 유대 관계 속에서 자란 기성세대에게 스민 여왕 통치 하에서의 평생의 향수가 어느 정도 지워져 있을 것이기 때문에 호주 사람들에게 이제 공화국을 위한 시간이 도래했다고 확신을 심어주는 일이 보다 용이할 수도 있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존재는 현상유지를 바라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 우리의 관심사가 새로운 왕으로 이전되는 상황에서는 호주 사회의 금기도 사라졌다고 생각합니다.”

와르후르스트 교수는 이렇게 평가했다.

하지만 호주국립대학의 피터 유는 공화국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호주 원주민 문제를 먼저 다루어야 한다고 말했다.

“호주 원주민들(Australia’s First Nations people)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어떻게 공화국으로 옮겨갈 수 있습니까?”

그는 이렇게 물었다. 

“말이 안 되는 소리입니다. 무엇보다 흠이 없는 정책이어야 하는데 도덕적 감각이나 영혼이 부재한 정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위키리크스한국 = 최석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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