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백악관 X파일(71) “정권 정통성 위해 레이건 방한 성사시켜라” 전두환의 특명
청와대-백악관 X파일(71) “정권 정통성 위해 레이건 방한 성사시켜라” 전두환의 특명
  • 특별취재팀
  • 기사승인 2020-05-11 07:12:29
  • 최종수정 2020.05.11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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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백악관 x파일
위키리크스 비밀문서로 엮는 한미 40년 정치비사 시리즈 '청와대-백악관 X파일

전두환이 대통령으로 취임한 직후인 1981년 3월 25일 치러진 제11대 국회의원 선거는 언론이 철저하게 통제된 가운데 치러졌다. 자연히 선거결과는 군사정권의 압승으로 끝났다.

전두환의 민주정의당(민정당)이 151석으로 과반수를 훌쩍 넘는 54.7%를 차지했다. 이어 야당인 민주한국당(민한당)이 81석으로 29.3%, 민주공화당 후신인 한국국민당(국민당)이 25석으로 9.1%를 차지했다.

이제 전두환 정권을 명실상부하게 국회 권력까지 장악한 합법적 정권이 됐다.

전두환 정권이 더욱 확고하게 정권의 정통성을 다지기 위해 추진했던 것이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의 한국방문이었다.

전두환은 1981년 2월 자신이 워싱턴을 방문하기는 했지만, 미국 대통령의 방한이야말로 전두환 독재 정권이 동아시아 미국 전략의 중요한 파트너임을 국내외에 각인시켜 줄 절호의 이벤트가 될 것으로 확신, 외교라인에 특명을 내렸다.

양국의 공식 외교채널을 통한 실무 협상을 거쳐 1983년 11월 12일로 로널드 레이건 미 대통령 부부의 한국 공식방문 일정이 확정됐다.

순조롭게 진행되던 준비작업은 갑작스런 역풍을 만나게 된다.

1983년 8월 앵커리지공항을 출발, 서울로 향하던 대한항공 747 여객기가 폭파된데 이어 10월에는 미얀마를 국빈방문 중이던 전두환 대통령 일행에 대한 테러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워싱턴 정가에서는 ‘북한의 테러가 과감하기 이를데 없는 상황에서 서울을 방문하는 것은 전쟁터에 뛰어드는 것과 마찬가지로 위험한 일이라며 만류하는 인사들이 늘어났다.

하지만, 레이건 대통령은 방한 일정을 강행했다.

레이건 방한을 앞두고 백악관 시크릿서비스 요원들이 비밀리에 서울로 날아와 대통령 일행이 묵을 호텔들을 조사했다. 조선호텔, 호텔신라, 하얏트호텔, 프라자호텔 등 130명 규모의 공식, 비공식 수행원이 묵을 호텔들을 샅샅이 답사했다.

리처드 워커 대사는 북한의 테러 가능성을 감안, 백악관으로 전문을 띄워 정동 미대사 공관에 머물 것을 요청했지만 백악관 참모들은 ‘관례상 어렵다’고 거부했다.

하지만 미얀마 사태가 터지고 답사팀에 의해 호텔의 보안 상태에 대한 몇가지 문제점이 발견되자 레이건 대통령 부부는 대사관저를 거처로 정했다. 대사관저에 기거해야 할 참모진 숫자는 예상을 초과했다. 이에 따라 워커 대사 부부는 조선호텔로 거처를 옮겨야 했다. 물론 외부에는 레이건 대통령이 조선호텔에 묵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11월 12일 오전 10시 25분. 김포공항으로 미국 대통령 전용기가 도착했다. 김포공항에서 도심으로 들어오는 가두에는 학생 고적대를 비롯, ‘로널드와 낸시 여사를 환영합니다’ ‘당신들이 그렇듯이 우리도 당신들을 사랑합니다’라고 쓴 플래카드를 든 시민단체들, 기쁨에 들뜬 군중들로 가득했다.

1983년 11월 성조기와 태극기를 흔들며 미국 레이건 대통령의 방한을 환영하는 어린이들 [연합뉴스]
1983년 11월 성조기와 태극기를 흔들며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의 방한을 환영하는 어린이들. [연합뉴스]

인파는 150만명을 넘었다. 물론 대부분 동원된 군중들이었다. 하지만 영화배우 출신인 레이건 대통령은 실제로 인기가 있었다.

레이건 대통령의 공식일정은 도착 2시간후 국회연설로 시작됐다.

레이건은 도쿄에서 서울로 오는 길에 본인에게 전해진 국회연설 중 몇몇 단락은 삭제하고, 자신의 생각을 첨가했다.

레이건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첨가했다.

“한국전에서 미군의 희생 때문에 한국민들이 감사해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한국군은 그러나 베트남전에 참전해 자유진영 수호를 위한 미국과 뜻을 같이 했습니다. 그 이후로 미국에 대한 한국의 빚은 모두 갚은 셈이라는 것을 이 자리를 빌려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레이건 대통령의 이 같은 연설은 참석한 모든 한국민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레이건은 또 이산가족 상봉과 관련, “이산 가족의 재회야말로 가장 기본적인 인권”이라며 한국 정부의 노력을 지지했다.

특히  “모든 도발자들은 미국민과 한국민이 한 목소리를 내는 단합된 소리를 들을 것입니다. 자유를 누리는 사람들은 결코 노예가 될 수 없으며, 자유는 대한민국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연설하는 대목에서는 많은 한국민들이 눈물을 흘렸다.

1983년 11월 국회에서 연설하는 레이건 대통령. [출처=국회도서관]
1983년 11월 국회에서 연설하는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 [출처=국회도서관]

대통령 연설 후 국회 본관 1층 로비 로텐더홀의 리셉션에서 박동진 전 주미대사이자 외무장관은 눈물로 얼굴이 범벅이 된 채 워커대사와 만났다. 그는 “내 생애에 가장 훌륭한 두 연설을 들었는데, 하나는 맥아더 장군이 서울 수복 후 했던 연설, 또 하나는 이번 레이건 대통령의 연설”이라고 말했다.

레이건은 방한 다음날 측근들의 만류를 무릎쓰고 DMZ도 방문해 깊은 인상을 남겼다.
 
레이건이 서울을 떠나는 날, 도심에서 김포공항으로 향하는 20km의 도로변에는 200만명이 넘는 군중이 나와 열렬히 환송했다. 이날 군중은 방한 첫날처럼 동원된 사람들이 아니었다.

1983년 11월 14일 DMZ 초소를 방문했던 로널드 레이건 전 미 대통령. [연합뉴스]
1983년 11월 14일 DMZ 초소를 방문했던 로널드 레이건 전 미 대통령. [연합뉴스]

 

레이건의 방한 외교는 한국민들 사이에 레이건 개인적인 인기를 높여주었지만, 전두환은 국내-외에서 간접적으로 정권의 정통성을 공고하게 인정받는 최대 수혜자가 됐다. 

레이건 대통령이 전두환 정권에 일방적인 선물만 준 것은 아니었다.

레이건이 방한했을 때는 야권과 대학생들의 민주화 투쟁이 고조되던 시점이었다. 그는  전두환에게 비공식적으로 ‘인권문제에 있어 유연하게 대처할 것’을 주문한 것으로 알려졌다.

레이건 방한 한달 후인 1983년 12월 21일. 전두환 정권은 ‘학원 자율화’ 조치를 발표했다. 이 ‘유화 조치’로 대학가에서 학생회가 부활하고 전국 조직이 결성되는 등 대학가는 새로운 투쟁의 시대를 맞게됐다.

[위키리크스한국= 특별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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