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인사이드] 콜럼바인 총기난사 사건 때 희생된 레이첼 스콧의 죽음은 과연 순교(殉敎)인가?
[WIKI 인사이드] 콜럼바인 총기난사 사건 때 희생된 레이첼 스콧의 죽음은 과연 순교(殉敎)인가?
  • 최석진 기자
  • 승인 2019.04.01 07:23
  • 수정 2019.04.01 06: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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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첼 스콧의 초상(오른쪽)과 어머니. [사진=ATI]
레이첼 스콧의 초상(오른쪽)과 어머니. [사진=ATI]

1999년 4월 20일 에릭 해리스와 딜런 클리볼드가 저지른 콜럼바인 총기 난사 사건은 그 규모나 내용 면에서 세상을 또 한 번 경악하게 했었다. 그 결과 콜럼바인 고등학교 총기난사 사건은 많은 희생자 수에 당혹한 학부모들과 법률가들에게 집중 포화를 맞았다.

화요일이었던 4월의 그날 오후 무렵까지 12명의 콜럼바인 고등학교 학생들과 1명의 교사가 사망했다. 이들 사망자 중에 레이첼 스콧이 있었다.

‘레이첼 스콧의 순교(殉敎)’에 대하여

화제가 된 뉴스거리를 찾아 이를 해설해주는 인터넷 사이트 ‘복스(vox.com)’는 레이첼 스콧은 배우나 선교사를 꿈꾸던 독실한 기독교도였다고 설명한다.

애초에 레이첼 스콧이 콜럼바인 사건을 조사하던 사람들과 사학자(史學者)들 사이에서 주목을 받았던 이유는 그녀가 최초 희생자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여학생에게는 그보다 더한 무엇이 있었음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끔찍한 참극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범인 중 한 명인 에릭 해리스가 스콧을 총살하기 전에 그녀에게 하느님을 믿느냐고 물었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던 것이다. 콤럼바인 참극 이후 최초 얼마동안 비슷한 주장이 여러 가지로 나왔었다. 또 다른 희생자 중의 한 명인 캐시 버널도 이 같은 질문에 ‘그렇다’는 대답을 했기 때문에 죽음을 피해갈 수 없었다고 사람들에게 알려졌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다른 희생자가 캐시 버널로 잘못 알려졌다는 사실이 드러났으며, 대신 레이첼 스콧의 마지막 순간이 생생하게 표면으로 부상했다. 스콧의 어머니인 베스 니모는 여러 인터뷰를 통해, 그녀의 딸이 사건 전부터 딜런 클리볼드에게 친구가 되어주려고 노력했으며, 그 또한 그녀를 좋아하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어머니 니모는 또 참극이 벌어지기 몇 주 전 얼마동안 해리스와 클리볼드는 스콧의 신앙심을 두고 놀리고 비웃었다고도 말했다.

특히 데이브 컬런의 저서 「콜럼바인」을 비롯하여 많은 조사 결과들이 총기난사범들에게는 어떤 특정한 종교적, 인종적 이유가 없었으며, 성차별적으로 어떤 희생자를 특정지은 흔적도 없다고 단정짓고 있는 반면에, 범인들이 희생자들 중 적어도 두 명에게는 희생자들의 종교를 두고 허무적 냉소주의를 가지고 살해했다는 보도들 때문에 그 사건 이면에는 세간의 호기심을 특별히 자극할 무엇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니모는 스콧의 사후에 자신의 딸이 기독교 신앙을 얼마나 존중했는지를 세상에 알리기 위해, 그리고 짐작컨대 딸이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정신적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딸의 일기를 책으로 출판했다. 나중에 스콧의 부모는 그녀의 전기에 공동 저자가 되었다.

이 책에서 레이첼 스콧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입에 올린 사실 때문에 용서를 구하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 때문에 죽어야 한다면 …… 기꺼이 그렇게 할 것이다.”

스콧의 아버지 다렐 스콧은 그가 펴낸 두 권의 책을 통해 딸의 독실한 신앙심을 널리 알렸다. 「연쇄반응 : 자비 혁명으로의 부름」과 2008년도에 펴낸 「레이첼의 웃음 : 콜럼바인 순교자 레이첼 스콧이 남긴 영적 유산」 이렇게 두 권의 책이었다. 이 중 두 번째로 펴낸 책은 딸의 전기에서 발췌된 내용들이 들어있다.

2016년, 종교를 배척한 총기난사범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신앙을 지킨 레이첼 스콧의 스토리는 마침내 <아임 낫 어쉐임드(I’m Not Ashamed)>라는 제목으로 영화로까지 만들어지게 되었다. 영화에서 스콧 역은 메이시 맥레인이 맡았다. 학교 총기난사 사건에 초점을 맞춘 이 기독교 영화는 꽤 괜찮은 흥행 수입을 올렸고, 스콧의 부모는 많은 책과 인터뷰들을 통해 딸의 기억을 함께 나누는 꾸준한 노력을 기울여왔다. 그러나 미디어들에서 가능한 모든 형태로 영속화되고 상품화된 레이첼 스콧의 마지막 순간을 다룬 이야기는 진실과는 다른 허구가 개입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가디언> 지의 조르단 호프만은, 스콧의 죽음을 순교 이야기로 둔갑시키는 일은 그저 ‘이 어린 여학생의 끔찍한 운명을 미리 짜놓은 허구적 고난 드라마에 끼워 넣는 착취나 마찬가지’라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레이첼 스콧이 사망한 그날 정확히 어떤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콜럼바인 고등학교 총기난사 사건과 레이첼 스콧의 죽음

사건이 발생한 1999년 4월 20일, 콜럼바인 고등학교의 교실과 도서관, 복도, 그리고 학생식당에서 정확히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해서 지금도 모든 것이 다 밝혀지지는 않았다. 특히, 목격자들의 증언이 너무나도 신뢰감을 주지 못하고 있다. 레이첼 스콧의 남동생 크레이그 스콧은, 공포와 충격, 그리고 아드레날린의 증가로 인해 이성적 사고와 인식에 장애가 생겨 그날의 상황을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며, 심지어는 자신이 누나의 시신을 지나쳐간 사실조차도 깨닫지 못했다.

두 범인들은 오클라호마 시티 폭발범인 티머시 맥베이를 흉내내, 그가 살해한 숫자를 넘겨서 동급생들을 가능한 많이 죽이겠다는 마음을 먹었었다. 그리고 그들이 만들었던 사제 프로판 폭탄이 터지지 않자 총기류들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누나의 목숨을 앗아간 총소리를 들었어요.”

크레이그는 <헐리우드 리포터> 지에 이렇게 말했다.

“저는 처음에는 누가 장난치는 줄 알았어요. 상급생들 중 누군가가 폭죽을 가져와 터뜨린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도서관을 빠져나왔을 때 저는 누나의 시신 옆을 곧바로 지나쳤는데도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어요.”

<투데이> 지에 따르면, 크레이그는 학교 건물에서 탈출하고 전화를 할 수 있게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뭔가 끔찍한 일이 누나에게 발생한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가졌다고 한다.

“저는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서, ‘엄마, 저는 괜찮은데 누나에게 무슨 문제가 생긴 것 같아요.’라고 알려줬어요.”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의 불길한 느낌과 누나의 죽음이 확인된 것은 다음 날 아침이었다.

1990년대 말 무렵이 되었을 때는 사회는 이미 일부 음악과 영화뿐만 아니라 폭력적인 비디오 게임들이 아이들을 폭력으로 내몰고 있다는 성토가 일상화되어 있었다. 앞에서 언급한 「콜럼바인」의 저자 데이브 컬런은 콜럼바인 사건을 다룬 미디어의 보도 태도에 대해, ‘미디어 산업이 굉장한 살인사건이라는 볼거리에 필사적으로 매달리기 시작한 최초의 사건’이라고 주장한다. 기존에 만들어진 신화와 이야기에 뉴스 보도를 짜 맞추는 발단이 되었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해서 참극을 앞에 놓고 순교 이야기는 얼마든지 확대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이첼 스콧 부류의 소위 종교적 순교를 두고 책이나 노래, 영화들은 이야기를 만들어나갔다. 그 결과 레이첼 스콧과 같이 되겠다는 종교적 열정이 전 세대에 걸쳐 빠르게 번져나갔다. 「워싱턴 포스트」의 언론인 한나 로신은 이러한 현상을 간파하고, 1999년 10월에 벌써 보도로 내보내기도 했다.

한나 로신은 이런 식으로 종교적 죽음을 열망하는 10대들의 분위기를 ‘10대의 집단적 히스테리’로 묘사했다. 이때 ‘히스테리’는 개인이나 집단이 극도의 흥분·공포·분노에 사로잡혀 정신없이 울거나 웃거나 하는 상태를 가리킨다. 특히 10대들 사이에 레이첼 스콧처럼 콜럼바인 사건에서 사망한 사람들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아 ‘기독교로 신성화된 죽음을 동경(a Christian-sanctified death wish)’하는 분위기가 널리 퍼졌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제가 순교하리라는 소명을 제 마음속에 심어주셨습니다.”

티나 레오나르드라는 10대 소녀는 「서던 밥티스트(Southern Baptist)」 뉴스에 이렇게 심정을 털어놓았다고, 한나 로신은 보도했다.

“제가 저의 소명에 대해 친구 중 한 명에게 고백했을 때 그는 ‘그건 너무 멋진 말이다. 나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났으면 좋겠다.’고 말했어요.”

영화 <아임 낫 어쉐임드(I’m Not Ashamed)>에는 범인들인 에릭 해리스와 딜런 클리볼드가 레이첼 스콧을 먼저 총으로 쏜 후 죽어가는 그녀에게 신앙을 조롱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죽기 전에 레이첼 스콧의 입에서 종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것은 분명하지만, 그녀는 범인들 중 누구에게도 총을 맞기 전이나 총을 맞는 순간이나 후에도 자신이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을 자발적으로 한 적은 없다.

적어도 경찰 보고서나 사건 조사 결과 어디에도 이에 대한 언급은 없다. 콜럼바인에서 레이첼 스콧에게 실제로 벌어졌던 상황의 상당 부분은 그녀의 죽음을 목격한 유일한 생존 증인에 의존하는 것이다. 그의 이름은 리차드 캐스탈도이며 그는 범인들이 들이닥쳤을 당시 그녀와 점심을 먹고 있었다.

“그들은 스콧에게 신에 대해 소리를 지르더니 하느님을 믿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증언했다.

“그녀의 마지막 순간은 그게 다입니다.”

리차드 캐스탈도는 그들이 그 자신에게도 하느님을 믿는지 물었고, 그가 안 믿는다고 말했더니 목숨을 살려주었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을 종합해보면 레이첼 스콧은 사실을 말함으로써 죽게 될 것이라는 점을 인지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그녀가 진정한 순교자가 되려면 그녀는 죽음을 무릅쓰고 사실을 말했어야 했다. 그녀는 그냥 공포에 질려, 살고자 하는 희망으로 대답을 했을 뿐이다.

레이첼 스콧의 묘지. [ATI]
레이첼 스콧의 묘지. [ATI]

콜럼바인 사건 이후 신앙을 만들어 가기

“며칠의 시간이 흘렀어요. …… 그래도 저는 충격에서 벗어날 수 없었어요.”

동생 크레이그 스콧은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이 저에게 이런저런 질문들을 했지만 저는 그저 멍하니 바라만 보았어요.”

스콧의 부모들은 딸이 죽으면서 남겨놓은 종교적 신념에 대한 세속적 바톤을 이어받았다. 그러나 그녀의 남동생은 처음에는 누나의 죽음을 정신적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정의나 복수라는 개념에 사로잡혔던 것처럼 보인다.

“저는 범인들에게 곧바로 복수를 할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을 하곤 합니다.”

그는 이렇게 실토했다.

“제게 5분만 기회가 주어졌어도 복수를 감행했을 겁니다. 그 생각에서 벗어나기가 힘들어요.”

크레이그 스콧이 누나의 죽음과 관련하여 세상에 대고 말을 하기 시작한 것은 언론인 케이티 커릭과의 인터뷰가 처음이었다. 그는 그때부터 누나의 죽음과 자신의 트라우마에 대해 수많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이후 그의 상처는 서서히 회복되었다.

“그 사건 이후 20년 동안 그 사건에 대해 수백 번, 수천 번이 넘는 이야기를 하리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습니다.”

크레이그와 그의 어머니는 레이첼 스콧의 이야기를 널리 알리기 위해 전국의 학교들을 돌고 있다. 그들의 딸이자 누나가 자신의 신앙 때문에 무자비하게 살해됐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함이다. 이로 인해 인터넷 공간에서는 스콧 가족을 두고 악플들이 넘쳐난다. 스콧 가족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이 가족의 십자군 활동은 전적으로 돈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십여 건의 학교 총기 사건을 미연에 방지했으며, 500명이나 되는 학생들은 우리들로 인해 자신들이 자살하지 않게 되었다고 입을 모아 말을 하고 있습니다.”

크레이그 스콧은 이렇게 주장했다.

“돈이 목적인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이것은 종교적 사명입니다. 저에게는 콜럼바인을 함께 졸업한 친구들이 있는데, 그들은 지금도 나에게 묻습니다. ‘어떻게 지금도 그 이야기를 할 수 있느냐?’고요. 하지만 저랑 한 번만 함께 다녀본다면 그 이유를 이해하게 될 겁니다.”

스콧 가족은 레이첼 스콧의 죽음 이후 그녀가 남긴 흔적을 따라가다가 그녀가 남긴 에세이를 발견했다. 그녀는 그 에세이에 자신의 삶의 원칙을 기록해놓았다. 그녀는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남의 아픔에 공감하고, 자비심이 넘친 소녀였다. 또, 그녀는 그러한 기운을 스스로에게 주입하려했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파하려 노력했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규정짓는 행위가 얼마나 나쁜 일인지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녀는 타인에게서 좋은 점을 보도록 노력했으며, 자비와 용서를 실천하는 학교의 리더였습니다.”

크레이그 스콧은 이렇게 회상했다.

그는 누나의 에세이가 다음과 같이 끝을 맺는다고 들려주었다.

“나는 한 사람이 타인에 대한 자비를 실천하는 길에 들어서면 같은 기운이 연쇄반응을 일으킨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스콧 가족이 설립한 비영리 단체 ‘레이첼의 챌린지(Rachel’s Challenge)’는 지금까지 2500만 명 이상의 사람들에게 레이첼이 남긴 마지막 메시지를 전파해왔다. 그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레이첼을 잃고 나서 목표가 생겼다. 그 사건은 이 가족에게 자신들만의 신앙을 가져다주었다. 레이첼 스콧의 꿈을 공유할 수 있다면 그녀의 죽음은 꼭 헛된 죽음 이 아니라는 믿음이다.

“저는 제 가족이 자랑스럽습니다.”

크레이그 스콧은 이렇게 말했다.

“저는 언젠가는 누나를 만날 것을 고대합니다. …… 누나가 어떤 식으로든지 자신의 죽음 뒤에 찾아든 이야기와 자신이 남긴 유산에 대해 알게 된다면, 그녀는 이렇게 말하겠지요. ‘잘했어, 동생아!’ 그렇게만 된다면 그리 나쁜 이야기는 아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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