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백악관 X파일(78) 12대 총선에서 신민당 제1야당 도약 ‘선거혁명’ 이루다
청와대-백악관 X파일(78) 12대 총선에서 신민당 제1야당 도약 ‘선거혁명’ 이루다
  • 특별취재팀
  • 기사승인 2020-09-01 11:13:31
  • 최종수정 2020.09.01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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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백악관 x파일
청와대 백악관 x파일

독재정권 vs 민주화진영 ‘결전의 날’인 1985년 2월 12일이 밝았다.

전국적으로 온종일 투표가 진행될 때만 해도 이 날이 역사가 뒤바뀌기 시작한 날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12대 총선의 개표가 시작되자 마자 전두환 정권은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창당된지 25일만에 신민당이 서울 등 대도시를 중심으로 제1야당으로 부상하는 기적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김영삼의 예상대로 이민우의 종로 출마는 ‘신민당 돌풍’을 불러와 12대 총선에서 신민당은 지역구 50석, 전국구 17석을 획득하며 제1야당으로 도약했다.

신민당은 서울·부산·인천 등 대도시에서 승리를 거두고 향후 정치민주화를 가져오는 ‘태풍의 눈’이 됐다. ‘관제야당’ 민한당이 전국구 포함 35석을 차지한 것에 비해, 신민당이 67석이라는 두 배에 가까운 성과를 보인 셈이다.

과거 전두환 정권 하에서 치러진 선거들은 정권의 개입과 협박, 매수로 얼룩져 있었고, 국민들의 불만 섞인 목소리도 점차 커지던 때였다.

이같은 상황에서 실시된 12대 총선은 전두환 정권에 대한 반대세력을 결집시키는 기폭제가 됐다.

수많은 유권자가 모인 제12대 국회 총선 서울 종로-중구 유세장면. 1985년 2월 3일 /연합뉴스
수많은 유권자가 모인 제12대 국회 총선 서울 종로-중구 유세장면. 1985년 2월 3일 /연합뉴스

김영삼은 이를 ‘선거혁명’이라고 칭했다. 언론과 동료들의 부정적 전망에도 불구하고 신민당이 승기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은 단식투쟁을 비롯해 민주산악회와 민추협 조직, ‘종로 구상’ 등 덕택이었다. 여기에 김대중의 귀국이 ‘주마가편’의 역할을 했다.

12대 총선 결과에 대해 대부분의 정치인과 언론은 신민당 지역구에서 20석 내외를 차지, 민한당에 이어 제3당에 그칠 것이라고 전망했다.

하지만 김영삼은 신민당이 총선에서 50석 이상을 획득할 것이 틀림없다고 공언했다. 일반의 예상과는 너무나 격차가 크다며 주변에서는 김영삼의 전망이 실언이 될까 봐 걱정할 정도였다.

그러나 김영삼은 반드시 승리할 것을 확신했고, 예상은 적중했다.

승리를 확신했던 김영삼과 다르게, 김대중은 12대 총선 결과를 ‘믿기지 않는 야당의 선전’이었다고 술회했다. 김대중은 승리의 공(功)이 자신에게 있다고 주장하면서, 자신의 귀국을 ‘9회말 역전 만루 홈런’에 비유했다.

국민도, 정부 여당도 그리고 신민당 내부에서도 믿기지 않은 야당의 선전이었다.

참다운 야당 출현을 국민들이 얼마나 갈망하는지, 민주화를 얼마나 열망하는지 알 수 있었다. 헌법을 바꿔서 직접 ‘우리 대통령’을 뽑아야 한다는 것이 표심이었다. 결국 목숨을 건 나의 귀국은 국민들의 민주 의식과 민주 세력의 야성을 일깨웠다.

재미 있는 사실은, 전두환 또한 12대 총선 ‘신민당 돌풍’에 본인이 기여한 바가 있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전두환은 회고록에서 “여당이 반대했지만 대한민국 정치 발전을 위해 야당 정치인들에게 해금 조치를 내려줬다”면서 “민한당의 패배와 정국 변화는 예상했던 일”이라는 궤변을 내세웠다.

정치인 해금은 본인의 의도는 아니었지만, 시대 상황상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정치풍토쇄신특별법’에 의해 정치활동이 금지되어 있던 567명의 정치인 가운데 1983년 12월 1차로 250명을 해금한 것을 시작으로 2.12총선이 두 달 남짓 남은 시점인 1984년 11월 말에 구여권의 김종필, 이후락, 야권의 김영삼, 김대중 씨 등 15명만 제외하고 모두 풀어주었다.

제12대 국회의원 선거 유세장에 야당 돌풍으로 청중들이 구름처럼 모려들었다.
제12대 국회의원 선거 유세장에 야당 돌풍으로 청중들이 구름처럼 모려들었다.

전두환은 “여권 내에서는 이들이 정치 일선에 복귀하게 되면 정국을 강경 분위기로 몰고 갈 것이 분명하다고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나는 우리나라 정치가 한 단계 더 발전하려면 정치적 이유로 특정인들의 정치활동을 규제하는 일이 더 이상 고집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 모두 풀어주었다”고 회고록에서 주장했다.

12대 총선은 관제 야당인 민한당을 침몰시켰다. 총선이 끝난 지 두 달도 되지 않아 민한당 당선자 35명 중 29명이 신민당에 입당했다. 총선에서 나타난 민심의 명령이었다.

민한당은 민심의 바다에서 속절없이 가라앉았다. 신민당은 103석의 거대 야당으로 우뚝 서게 됐다.

총선에서 민심을 확인한 전두환 정권은 3월 6일 정치풍토쇄신법으로 규제에 묶여 있던 마지막 14명에 대한 해금조치를 발표했다. 이로써 김영삼과 김대중, 김종필 모두 정치 활동의 자유를 얻게 됐다. 

국민의 힘에 힘입어 ‘3김’이 4년 4개월 만에 정치활동의 자유를 획득한 셈이었다.

전두환 정권은 ‘주사파의 등장’과 여야 충돌로 인한 ‘국회 공전 현상’을 언급하며 총선 이후의 혼란한 사회적 분위기를 거듭 강조하기 시작했다.

전두환은 총선이 끝난 직후 국무총리에 노신영 안기부장을, 민정당 대표에는 12대 국회에 전국구로 진출한 노태우 의원을 임명하는 등 정부여당의 체제 개편을 단행했다.

그러나 12대 국회는 야당이 김대중 씨 등의 사면복권을 선결하라는 요구를 하며 개원을 지연시킴으로써 임기 개시 후 33일 만에야 겨우 임시국회를 열 수 있었다.

여당 대표를 맡은 노태우는 “김대중과 김영삼의 권력 투쟁 때문에 박정희 정권처럼 ‘1980년 서울의 봄(10·26 및 5·17 비상계엄 조치)’ 같은 정치적 과도기 사태가 재현될 수 있다”고 위협하는 발언을 쏟아냈다.

하지만 민심은 돌아서고 있었다.

학생, 종교, 사회단체, 상당수 언론사들이 신민당 편에 서는 등 살얼음 같은 군사정권에서도 저항세력은 커져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위키리크스한국= 특별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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